그 말에 연다인이 분노를 터트렸다. 조금 전 연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임슬기, 누가 내연녀라는 건데?”“당연히 너지. 여기 너 말고 더 있어? 나랑 정우는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하고 결혼했어. 넌 뭔데?”예전에 임슬기는 명인시의 가시 돋친 장미라 불릴 정도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왜냐하면 독설을 잘했고 안하무인인 데다가 세상에 두려움이 없었다. 배정우 같은 사람 말고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남자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뻔했
임슬기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벌벌 떨렸다.2년 전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TV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유언도 듣지 못했고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가 갔을 땐 이미 재만 남아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너무 단순했고 연다인과 배정우를 철석같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 임슬기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연다인, 혹시 우리 아빠를 죽인 사람이 너야?”연다인이 코웃음을 쳤다.“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너.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쇠약해져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계단 난간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문을 열자 배달원이 서 있었다. 임슬기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물건을 안쪽에 놓아줄 수 있나요?”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안쪽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임슬기의 머리와 손에 피가 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다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이곳은 재벌
‘다인이한테 사과하라고? 꿈 깨.’아무리 비굴하고 나약하고 상스럽다 할지라도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임슬기의 집안을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 남편까지 빼앗아간 내연녀에게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임슬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폐의 고통과 목에서 전해지는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난... 다인이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짜증이 밀려온 배정우는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더욱 꽉 조였다.“임슬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임슬기는 핏발이 선 눈으로 배정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입에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기괴하게 웃었다.“이제 만족해?”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눈이 어찌나 깊은지 임슬기와 배정우의 사랑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임슬기!”그는 화를 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임슬기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동생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배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피가 흐르는 허벅지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무릎 꿇으라고 했지? 꿇을게. 얼마나 꿇을까
번개가 내리치니 배정우는 이상하게도 불안하고 초조해져 들고 있던 펜을 휙 던져버렸다.권민은 창밖을 힐끗 보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번뜩이는 번개를 보게 되었다. 곧이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고 그는 입술을 틀어 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직도...”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원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입을 연 것이었지만 그의 걱정이 되려 배정우의 심기만 거슬리게 한다면 아마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배정우는 원래부터
배정우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커튼을 쳐주려고 일어나려고 했다.“내가 커튼 치고 올게.”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연다인은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정우야, 커튼 안 쳐도 돼. 비가 그치고 나면 갠 하늘에 뜬 햇살이 바로 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잖아.”말을 하면서 연다인은 고개를 푹 숙였고 눈물이 뚝뚝 이불 위로 떨어졌다.“정우야, 난 우리가 다시 비 갠 뒤 피는 무지개처럼 함께 힘든 일을 헤쳐나가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우리 다시 그럴 수 있을까?”배정우는 그녀의 눈물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연다인이 유산으로 감정이 불안
귓가에 울리는 삐 소리에 배정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누워있는 임슬기를 보면서 그녀도 심장이 멎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의료진은 계속 임슬기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면서 거칠어진 숨결을 내뱉으며 배정우를 힐끗 보았다.]“보호자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것 같네요.”마음의 준비를 하라니...배정우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설마 죽는다는 말씀인가요?”의료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보호자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죽어요. 더구나 몸에 칼에 맞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