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이 차갑게 웃었다.“임슬기, 널 생각해서 밥 먹으라고 한 건데. 네 주제를 알아야지.”“그럼 문 열어. 문을 잠그고 밥 먹으라는 게 날 생각한 거라고? 가식적인 것.”“먹고 싶으면 날 기쁘게 해줘야지. 그럼 개처럼 짖어봐. 마음에 들면 문 열어줄게.”연다인이 흉악스럽게 웃었다.‘아주 제대로 망신당하게 해주겠어.’그런데 들려오는 건 임슬기의 차가운 목소리였다.“개처럼 짖어보라고? 꿈 깨.”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연다인이 문을 두드리며 협박했다.“뻔뻔한 것. 지금 안 먹으면 오늘 아무것도 못 먹을 줄 알아. 재간
연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정우 네가 밖에서 문 잠갔잖아.”그 말에 배정우가 차갑게 쏘아보았다.“밥을 줬다고 하지 않았어? 준 다음에 또 잠갔어?”연다인은 그의 눈빛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슬기를 풀어줬다고 혼낼까 봐 그랬지...”“됐어.”배정우는 그녀의 변명을 듣기 싫은 듯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임슬기, 내가 문 부수고 들어가길 기다리는 거야?”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배정우가 문을 걷어차려던 그때 연다인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그의 품에 쓰
배정우는 임슬기의 방문 앞을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거두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차를 몰고 반도를 나섰다.그는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머릿속에 자꾸만 임슬기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임슬기는 잘 울지 않았다. 심지어 손에 피가 흘러도 얼굴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연다인은 울보였고 늘 억울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귀찮아졌다.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배정우의 곁을 지켜준 사람은 연다인이었고 심지어
이성은 그녀에게 이건 그저 덧없는 꿈일 뿐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배정우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슬기야, 그날 서촌에서 네가 불길 속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갔어. 그때 우리 둘이 함께 거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임슬기는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배정우가 이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서촌이라니... 정말 서촌에서 날 구해준 사람이 승윤 씨가 아니라 정우였단 말이야?’진승윤이 말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게
“흥, 임슬기.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차피 정우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지껄여 봐.”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임슬기를 어떻게 괴롭혀 둘의 이혼을 더 빨리 진행시킬지 생각했다.지난 2년 동안 배정우는 반도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연다인은 그녀가 들어와 살게 되면 배정우와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임슬기를 대하는 배정우의 태도만 더 좋아졌다.완전히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돼버렸다.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에 앉지 못하면 단 하루로 편히 살 수 없었다.부엌으로 들어가던 연다인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
“무슨 일이야?”연다인이 임슬기를 보며 훌쩍거렸다.“슬기가 화를 내면서 내 몸에 국을 쏟았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걱정돼...”휴대폰 너머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연다인은 전화를 끊자마자 약 올리듯 웃으며 말했다.“임슬기, 우리 둘 중에 누가 벌을 받게 될까?”그녀는 절대로 배정우와 임슬기가 다시 만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13년 전의 비밀이든 2년 전의 비밀이든 영원히 이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었다.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다인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그는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창백하고 깡마른 임슬기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임슬기, 아직도 자는 척이야? 사람 때릴 힘도 있으면서 어디서 연약한 척인데?”임슬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익숙한 남자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왜? 말문이 막혔어?”“무슨 말을 하겠어. 내가 말하면 믿어주긴 할 거고?”그 한마디에 배정우는 흠칫 놀라더니 가슴 한쪽이 저도 모르게 아팠다.어젯밤에 술에 취하긴 했지만 그때도 이 질문을 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걸 직접 똑똑히 봤는데 믿지
연다인은 위층으로 올라가 유리문 밖에 서서 쓰러져 있는 임슬기를 내려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임슬기, 봤지? 정우는 네가 말하는 그 빌어먹을 진실 따위에 관심도 없어.”그러고는 유리문을 열려다가 그제야 배정우가 문을 잠그고 열쇠까지 가져갔다는 걸 알았다.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유리문을 발로 걷어찼다.“젠장.”힘없이 난간에 기댄 임슬기가 겨우 눈을 떴다.“연다인, 네가 이겼다면서 왜 그렇게 화를 내?”“흥.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고작 햇볕에 내놓는 게 전부라니. 생각할수록 열 받아.”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