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너무도 다정한 배정우의 모습에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정우야, 이제 나 안 미워하는 거야? 이제 원망 안 해?”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슬기야,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응?”“그럼... 연다인은? 연다인을 조강지처로 만들 거라고 했잖아...”“안 그럴 거야. 슬기야, 우리 마지막 남은 시간까지 둘만 행복하게 보내자. 아기도 지우자. 아기가 있으면 네 몸 상태가 더 나빠질 거잖아.”그
‘폐암'이라는 두 글자에 배정우의 손에는 힘이 더 세게 들어갔고 임슬기의 목이 거의 으스러질 정도로 조르고 있었다.“애초에 시한부도 아니었어!”연다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며 깁스한 오른손을 들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하지만 방금 간호사님이 분명 나한테...”“하, 전부 이 여자가 사람을 매수해서 거짓말을 한 거야. 동정심 유발이라도 하려고!”배정우는 임슬기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간 뒤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임슬기.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너를 향한 내 증오가 커진다는 거 몰라?!”연다인은 얼른 다가가 배정우를
임슬기는 화가 나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연다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다.“연다인, 네가 직접 나한테 말했잖아. 교통사고도 거짓말이라는 거 네가 오전에 감방에서 말해준 거잖아!”“난 그런 적 없어...”연다인은 바로 배정우의 품으로 숨으며 눈치를 살피곤 입을 열었다.“정우야, 난 오전에 감방에 간 적 없어...”“하, 거짓말하지 마. 너 분명 왔잖아. 너 때문에...”임슬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정우가 소리를 지르며 잘라버렸다.“그만! 임슬기, 아직도 부족해서 이러는 거야? 간호사를
‘17년이라니?'연다인을 안고 있던 배정우의 손이 경직되었다. 그와 임슬기는 알고 지낸 지 4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7년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하, 정말 갈수록 뻔뻔해지네. 17년이라고? 그딴 시간은 대체 어떻게 계산한 거지?”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자꾸만 찬 공기만 들어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그는 잊은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다. 그저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해 하늘이 그와 그녀를 이어준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에야 알게 되
임슬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녀는 그저 자신의 주치의에게만 폐렴이라고 검사 결과를 고쳐달라고만 했다. 그런데 연다인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임슬기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그러니까 누가 병원 사람들을 매수해 제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건가요?”“네, 간호사까지 전부 매수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임슬기 시가 매수한 사람이라고,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문까지 냈더라고요. 그래서 임슬기 씨 남편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그런 거였다니...'임슬기는 픽 웃었다. 연다인
연다인은 임슬기의 앞으로 다가가 길을 막아서며 이 말을 던진 것이다. 임슬기는 그대로 얼어붙게 되었다. 현재 상황에서 연다인이 원한다고 한마디만 한다면 배정우는 바로 사줄 것이 분명했으니까.대성 그룹에 140억이란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다. 하지만 임씨 가문 저택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었고 그곳엔 부모님과 오정태, 그리고 임종현과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집 안에는 예전에 쓰던 물건도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연다인이 범죄를 저지른 증거도 있었던지라 절대 연다인의 손에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본가 저택을 손에 넣어서 뭐하게?”
다시 진승윤을 떠올렸을 때는 며칠이 지난 후였다. 어차피 진승윤과 별다른 사이도 아니었고 진승윤은 배정우의 친구였으니 떠오르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였기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진승윤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역시나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들 중 행복한 결말을 맺은 사람은 없었다.진승윤은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심각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미안해요.”“정말 괜찮다니까요...”연다인이 비웃으며 끼어들었다.“슬기야, 정우가 자꾸 오해하고
당황한 임슬기를 본 진승윤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매번 슬기 씨를 볼 때마다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인데 변호사로서 어떻게 그냥 보고 지나쳐요. 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구해주려고 했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행여나 임슬기가 오해하고 부담이라도 느낄까 봐 계속 설명했다.“정우도 지금 날 의심하고 있진 하지만 전 정우의 방법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우는 제 친구니까 정우 대신 슬기 씨를 돌봐주고 있는 거예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