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둡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맞아. 네가 감옥에서 나오는 조건이었잖아.”그 말투는 마치 이제야 깨달은 그녀가 멍청이 같다고 비웃는 듯했다.임슬기는 또 한 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고 다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괜찮다는 듯 이를 악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손톱을 살갗에 박아 넣으면서 눈물을 참았다.“응, 우리 사이의 조건이었지. 이만 가.”말을 마치고 등을 돌린 임슬기는 눈물을 터뜨렸다.‘그날 밤 이후로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배정우의 손이 멈칫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임슬기를 쳐다봤다.“임슬기, 시도 때도 없이 네 뱃속에 있는 애새끼 얘기 꺼내지 마.”임슬기는 배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애새끼라니... 네 아이잖아!”“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야, 배정우. 그럼 연다인이 임신한 건 왜 네 아이라고 확신하는 건데?”배정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다인이는 너처럼 천박하지 않거든.”“그래? 그럼 네가 팔을 자른 그 남자 말이야. 사실 연다인이랑 몸을 섞는 관계라는 건 알고
연다인은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스스로의 체면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권민의 손을 뿌리치고 옷을 가다듬으며 말했다.“함부로 입을 놀리기만 해 보세요.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전 그냥 대표님 따까리일 뿐이라면서요? 제가 말한다고 대표님께서 듣겠어요? 안심하셔도 됩니다.”권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전해야 할 말은 이미 전했으니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오늘 일로써 연다인의 본성을 알게 된 그는 깜짝 놀랐다. 지난 2년 동안 꽤 잘 숨
“이거 놔! 놓으라고!”차에 끌려 올라간 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손톱으로 흉악하게 생긴 남자를 마구 할퀴었다.그는 임슬기의 얼굴을 한 대 쥐어박으며 욕을 했다.“감히 나를 할퀴어? 죽고 싶어?”임슬기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먹은 약 효과가 온몸에 발작하면서 기절해 버렸다.어떤 몸집이 마른 남자가 그녀를 차에 던졌다.“이거 진짜 돈 벌 수 있는 거 맞아? 사기는 아니지?”“당연히 벌 수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정우 아내야. 돈이 없을 리 없잖아. 몇십억은 문제없을걸?”그는 다시 임슬기를 내려
‘그래서 재현이한테도 날 거절하라고 시킨 거네. 이렇게 해야만 날 납치하려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으니까.’‘내가 어두운 곳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이런 방에 가둔 거야? 이번에도 같은 이유겠지? 17년 전에 납치당했던 걸 똑같게 재현해서 날 짓밟으려고.’‘도저히 배정우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너무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말을 마친 두 남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한편, 병원에서.배정우는 연다인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배정우가 문을 거칠게 열며 소리쳤다.“임슬기!”방을 한 바퀴 돌며 살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혹시 반도 별장으로 돌아갔나?’생각도 할 틈 없이 그는 차를 몰고 급히 반도 별장으로 향했다.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임슬기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정말로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건가? 그래서 도망친 걸까?’‘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내가 주는 벌이야. 임슬기는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해. 평생 떠나면 안 된다고!’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다가오지 마. 배정우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어!”“내 말을 믿는 게 좋을걸?”“아니, 그럴 리 없어.”“저항하지 마. 금방 끝낼 거니까. 최대한 부드럽게 할게.”임슬기는 뒤로 물러섰지만 뒤벽이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가까이 오지 마...”“그렇게 울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잖아. 내가 잘 다뤄줄게.”말을 마친 그는 옷 단추를 풀어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그가 입을 맞추려 하자 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손발이 묶여 있는 바람에 불편하다고 생각한 남자는 밧줄을
진승윤은 임슬기의 상황이 너무 걱정되었다. 그런 뉴스가 터진 데다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혹시나 배정우가 이성을 잃을까 봐 불안했다.명인시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는 산길을 질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오늘 마침 옆 도시로 출장을 갔었는데 그러다가 김현정의 전화를 받았다. 그제야 진승윤은 일이 터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도로를 질주하던 그는 갑자기 누군가가 차 앞을 막고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구인지 잘 보지는 못했지만 진승윤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차를 막고 서 있는 사람은 임슬기였다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