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혹시 누군가 대표님 명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오후, 임슬기가 체포된 뒤 배정우는 즉시 모든 언론사에 보도를 금지한 뒤 사전에 내보낸 기사도 철회하도록 분부했다.만약 누군가 목숨을 걸고 보도를 내보낸 게 아니라면, 연다인이 이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설명했다.창밖을 응시하는 배정우의 검은 눈동자에는 잠깐 살기가 스쳐 지났다.만약, 정말로 연다인이 관련되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연다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하지만 배정우는 미동도 없이 버티고 있다가
임슬기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점심이었다. 머리를 문지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보지 않아도 김현정이 국을 끓이고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임슬기는 세면대로 걸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울 속 창백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다,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죽음의 문턱까지 와서도 복수는커녕 살인 누명까지 쓰게 생겼으니, 삶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김현정이 그녀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언니, 얼굴이 너
임슬기는 연다인의 차 뒤를 따라 점점 시내를 벗어나 산으로 향했다.연다인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까 두려웠던 임슬기는 옷 안에 숨겨둔 카메라를 켰다. 이번에는 자신이 다친다고 해도 모두에게 연다인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리라 결심했다.30분을 더 운전한 후, 연다인의 차가 급커브를 돌며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던 임슬기는 음침하고 으스스한 환경에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사람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이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설마 날 죽일 생각인가?’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주머니에 작은 칼을 숨겨두었다.차에
연다인은 임슬기의 머리카락을 또 한 번 세게 잡아당기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그 후 임씨 가문이 망하자, 오정태는 증거를 들고 너를 찾아왔다가 나를 만난 거야. 그대 오정태의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연다인은 임슬기의 턱을 움켜쥐고 사나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늙은이가 나를 범인 보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라. 사실 처음엔 그를 죽일 생각도 없었거든. 그런데 제 분수를 모르고 자꾸 네 걱정을 하더라고. 죽기 직전까지도 널 걱정하더라? 역겹게!”갑자기 연다인은 임슬기를 바닥에서 끌어 올려 소각
진승윤과 김현정이 도착했을 때, 임슬기는 깜깜한 화장터에서 다리를 절며 겨우 걸어 나오고 있었다.“슬기 언니!”김현정은 차에서 뛰어내린 뒤 달려가 임슬기를 부여안았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입가엔 핏자국이 선명했다.“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연다인 그 나쁜 년이 한 짓이죠?”김현정의 품에 안겨서야 임슬기는 공허하던 눈빛이 흔들리더니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현정아, 집사님이 재가 되고 말았어.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 걸까...”임슬기의 말에 김현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등을 토닥이다 한참 뒤에 입을
금액 아파트로 돌아간 뒤 임슬기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꺼내 태블릿에 넣은 뒤 영상을 편집해 진승윤에게 보내고 문자를 남겼다.[추적할 수 없는 계정을 만들어서 영상을 올려줘요. 연다인에게 실시간 검색어 1위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줘야죠.]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윤한테서 회답이 왔다.[알겠어요. 슬기 씨가 이렇게 반격하니까 저도 기쁘네요.]잠깐이지만 임슬기는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 진승윤은 그녀를 너무 잘 대해주었다.모든 부탁을 거절 한번 없이 응해주는 진승윤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이러는 거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게
‘이혼 합의서?’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임슬기는 비로소, 연다인이 이미 이혼 서류를 배정우에게 건넸음을 알아차렸다.“이혼 서류를 받았다면 연다인이 전부 설명했다는 거 아니야?”배정우는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임슬기를 노려보며 말했다.“연다인과 무슨 상관이야? 네가 보낸 거 아니야?”“배정우, 그렇게 항상 똑똑한 척하더니 왜 매번 연다인한테 휘둘리는 건데?”배정우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임슬기는 웃음이 나왔다.“이혼 서류는 연다인이 강요한 거야. 내가 자수했던 영상처럼 거래 조건 중 하나였어.”“무슨 거래?”“오정태.
“너!”연다인은 사악한 눈빛으로 임슬기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고 욕했다.“임슬기, 전부 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네가 꾸민 일이잖아! 날 해치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잖아!”“내가?”임슬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연다인, 참 뻔뻔하네?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고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너고, 내 결혼생활을 망친 것도 너야! 그런데 지금 누가 누굴 해쳤다는 거야!”“난 그런 적 없어! 내가 왜 널 해치겠어?”연다인은 울며 배정우 품으로 달려들었다.“정우야, 슬기가 한 말 믿지 마. 난 슬기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