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였어.”그 말에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진승윤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고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고마워, 승윤아. 정말 고마워...”임슬기가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때 그녀가 17년을 사랑했던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었던 진승윤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녀를 살렸다.그 은혜를 임슬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에게 철저하게 부서졌다.진
“말해!”배정우는 온성현의 멱살을 낚아채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잔혹하게 번뜩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누가 시킨 거야? 누가 내 아내를 해치라고 했지?”이때의 온성현은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는 도련님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온성현은 울먹이며 애원했다.“배, 배 대표님...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배정우는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놓고 곧바로 그의 배를 짓밟았다. 살짝만 힘을 줬을 뿐인데 온성현은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온성현. 지금 네가 운 좋은 건, 죽어가는 사람
임슬기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고 울면서 안기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투명한 벽이라도 놓인 듯 가까이 갈 수 없었다.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초조해진 임슬기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엄마!”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을 뿐, 점점 멀어져 갔다.“엄마, 가지 마!”임슬기는 울부짖으며 투명한 벽을 깨뜨리려 몸을 던졌다.“나도 데려가 줘... 엄마, 제발...”그렇게 울던 임슬기는 눈을 떴다. 손은 아직도 진승윤의 팔을 꼭 붙잡
칼이 내리꽂히자 온성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비명과 살려달라는 외침만 반복할 뿐이었다.그 광경에 진승윤조차도 깜짝 놀랐다.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고 그는 한동안 임슬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금 임슬기가 온성현의 검지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바닥엔 피가 낭자했고 장면은 말 그대로 끔찍했다.임슬기의 얼굴에까지 핏방울이 튀었지만 그녀는 단지 당근을 썬 것처럼 표정이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곧 그녀는 피 묻은 과일칼을 툭 하고 옆으로 던지고는 또박또박 말했다.“온성현, 오늘을 똑똑히 기억해. 다음번엔 네 목이 날
육문주는 웃으며 말했다.“승윤 형, 오랜만이네요.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하죠.”하지만 진승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임슬기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슬기야, 육문주랑 이야기 나눠. 나는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말을 마친 진승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두 사람의 관계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임슬기는 진승윤의 뒷모습을 보며 약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육문주 씨, 진승윤한테 뭐 잘못했어요?”육문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승윤 형이 정우 형이랑 지금 사이가 나빠졌잖아요.
육문주는 임슬기를 안고 있는 진승윤의 모습을 보고 잠깐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승윤 형, 형수님한테 약을 탄 거예요?”“그냥 수면제야.”“하지만...”진승윤은 육문주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육문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 자유야. 하지만 네가 배정우를 도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면, 난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승윤 형, 정우 형이 어떤 일들은 정말 잘못한 게 맞지만...”육문주는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사실, 정우 형은 진심으로 형수님을 걱정해요. 형도 그건 알고 있잖아요.”“슬기를
“변호사님이 여긴 왜, 왜 오신 거예요?”연다인은 진승윤의 기세에 눌려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침대에 주저앉았다.진승윤은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다인을 차가운 눈빛으로 빤히 바라만 보았다.“진승윤 씨, 도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연다인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당해 마음이 불안해졌다.“연다인 씨, 다행히도 난 여자한테 손은 안대요.”진승윤의 손을 대지 않는다는 말에 연다인은 다시 기세가 올라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니까 뭐 하러 온 거냐고요? 임슬기 그년 대신 복수라도 하려는 거예
연다인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아픈 오른손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배정우를 바라보았다.“정우야...”하지만 배정우는 연다인을 동정하는 마음 하나 없이 오히려 차갑게 질문했다.“기사에 나온 거, 사실이야?”배정우가 묻는 기사는 연다인이 교통사고로 조작해 진승윤을 죽이라고 사주한 일이었다.“정우야, 날 믿지 못하는 거야?”연다인은 억울하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지만, 배정우는 그녀의 우는 모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당황스러워진 연다인이 울며 그를 끌어안으려 하자, 배정우는 몸을 피하며 말했다.“다인아, 난 지금 네게 솔직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