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 지나서야 육문주가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래요.”김현정을 떠올리자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아직 그렇게 젊고 앞으로도 살아갈 시간이 많았던 사람이었다.“근데 나 요즘엔 꿈에서도 현정이를 거의 못 봐요. 처음 1년은 자주 꿈에 나왔는데, 최근 2년 동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나와요.”임슬기는 눈물을 꾹 삼키며 말을 이었다.“혹시 나한테 실망해서 일부러 꿈에 안 와주는 걸까요?”김현정에 대한 이야기는 메리카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비슷한 마음을
스웬시에 도착한 첫날, 임슬기는 잠깐 밖을 돌아다니며 밥을 한 끼 먹고는 이내 호텔로 돌아왔다.사실 그녀는 지난 4년간 단 한 번도 혼자서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강재호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로아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 화면 속 모두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강재호는 그녀가 너무 집착한다며 제발 좀 놀다 오라며 투덜거리더니 몇 마디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임슬기는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았다. 아직은 밤 여덟 시,
“왜 안 된다는 거죠?”배정우의 물음에 임슬기는 마음속에 차오른 답답함을 꾹꾹 누르며 냉정하게 말했다.“배정우 씨, 오늘 두 번이나 절 구해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우리가 서로 보호해 줄 사이까지는 아니잖아요.”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전화기 너머의 배정우는 한참 침묵했다. 이윽고 낮게 한마디를 뱉었다.“...알겠습니다.”“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 저 많이 피곤해서요.”그 말과 함께 임슬기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어쩌면 이렇게 끝내는 게 꽤 차
임슬기가 대답할 틈도 없이 강재호가 먼저 단칼에 잘라버렸다.“웃기고 있네. 가서 그쪽한테 꼬이는 여자들이랑이나 먹어요. 우리 누나한테 얼씬도 하지 마세요.”석지헌은 일부러 아쉬운 척 한숨을 쉬며 말했다.“재호 씨의 누나를 알게 된 뒤로는 그런 여자들 다 정리했어요. 난 역시 성숙한 스타일이 좋더라고요.”“뭐라고요?!”그 말만큼은 정말 듣기 거북했다. 그럴듯한 말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슬기는 이제 그런 말에 흔들릴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예의 바른 미소만 띤 채 말했다.“배고프니까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요.”
“저기요, 석지헌 씨. 전 나쁜 남자 안 좋아해요.”“그냥 편하게 말하면 안 돼요? 말끝마다 석지헌 씨라고 하면 너무 거리감 드니까.”그 말에 임슬기는 피식 웃었다.“그쪽은 내 의뢰인이잖아요. 거리감 있는 게 당연하죠.”순간 석지헌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말이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다.“그래요? 그럼 보통 의뢰인을 집까지 데려와요?”‘...내가 언제 데려왔어?’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주방에서 강재호가 음식을 들고나왔다.임슬기를 보자마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달려왔다.“누나, 벽돌 맞을 뻔했다면서요? 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임슬기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방금까지 조금이나마 느꼈던 감동과 초조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굳이 따지자면 배정우만큼 매정하게 군 사람이 또 있을까?참 우스운 소리였다.임슬기는 가슴 깊은 곳의 분노를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입가에는 냉소가 감돌았다.“배정우 씨, 구해줘서 고맙긴 한데요. 간호사님도 별일 아니라잖아요. 굳이 매정이니 뭐니 따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배정우는 잠시 말을 잃은 듯 멍해졌다.단단히 다문 입술 끝이 일그러졌고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의 손을
순식간에 사방에서 보안요원들이 달려와 병을 던진 남자를 바닥에 꽉 눌러 눕혔다.마스크와 모자를 벗겨보니 그는 유호준이 아니었다.임슬기는 순간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유호준은... 어디 있어요?”남자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으며 악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퉤, 지독한 년. 너한테 할 말 없어! 오늘 아침 벽돌도 내가 던진 거야. 널 죽여버리려고 그랬어. 이 빌어먹을 년아!”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유호준과 한패인 건 분명했다.보안요원이 물었다.“강하린 씨, 경찰에 신고할까요?”“네, 부탁드려요. 경찰서
임슬기는 무언가 변명하려다가 서나은의 눈빛을 보는 순간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유호준이야.”“유호준?”임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로아 납치한 것도, 오늘 벽돌 던진 것도 다 유호준 짓이야. 고소 취하하라고 협박하면서 위자료 명목으로 2억 달래. 그래야 그만두겠다고.”서나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욕설을 퍼부었다.“미친놈 아니야? 우리가 돈 돌려달란 소리도 안 한 게 어디야. 뻔뻔하기 짝이 없네. 법을 뭐로 보는 거야?”그러고는 임슬기의 초췌한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표정을 누그
다음 날 아침.강재호는 임슬기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임슬기는 빨리 원고를 끝내야 한다며 기어코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어쩔 수 없었던 강재호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그럼 조심해요. 유호준이 누나한테 손을 뻗칠 수도 있으니까. 로아는 내가 하루 종일 지킬 테니까 걱정 마요.”임슬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토스트를 문 채 급히 신발을 신고 나섰다.아직도 꿈속 장면이 너무 생생했던 탓일까. 꿈에서 깬 지금까지도 가슴이 떨렸다.작업실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그녀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누군가의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