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며 찾아봤지만 로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강재호는 그녀 곁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누나, 진정해요. 차가 여기 있다는 건, 분명 로아도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에요.”“로아야...”임슬기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면 어떡해... 로아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진짜...”6년 전 김현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감싸주던 하윤까지 자신을 지키다 죽었다.그 이후로 임슬기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강재호와 마주쳤다.“누나.”“재호야, 로아 소식 있어?”강재호는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에요. 근데 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요.”임슬기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한 걸 본 강재호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로아는 똑똑하니까 괜찮을 거예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에서 내리는 석지헌이 보이자 강재호는 눈살을 찌푸렸다.“누나, 저 사람은 왜 따라왔어요?”“작업실 앞에서 마주쳤어.”그때, 유치원 선생님과 보안요원이 급히 나왔다.“로아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당신 정말 뻔뻔하네요!”임슬기는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 채 배정우를 노려보았다.눈빛은 매섭지만 그 모습은 마치 화난 토끼처럼 앙증맞고 사납기도 했다.그런 표정을 배정우는 오직 임슬기에게서만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자가 끝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현실이 그의 가슴을 찢어질 듯 아프게 만들었다.그는 이내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미안합니다. 방금은 제가 무례했네요. 반지 관련된 사항은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
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배정우라는 사람 모르는데.”“그래?”서나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그런데 왜 하필 너를 찾아왔을까?”그러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손으로 그녀를 툭 밀었다.“에이, 뭐 어때. 너도 이름 헷갈렸을 수 있지. 일단 가봐. 손님을 회의실에 세워둘 순 없잖아.”어쩔 수 없이 임슬기는 마음을 다잡고 회의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배정우가 창가에 서 있었다.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우뚝 서서 유리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
임슬기는 그날 밤 머릿속이 온통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 밤을 꼬박 새워버렸다.다음 날 아침, 강재호는 그녀의 퀭한 눈 밑에 짙게 드리운 다크 서클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누나, 오늘은 그냥 푹 쉬어요. 나가지 말고.”“오늘 월요일이잖아. 출근해야지.”“누나는 공동 대표예요. 회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루쯤 안 가면 어때요.”임슬기는 머리를 괴고 식탁에 앉아 말했다.“커피 좀 내려줘. 오늘 초안 마감인데 진짜 거의 다 끝났거든. 계약 어긴다는 말은 듣기 싫어.”“혹시 석지헌 씨 건이에요?”
“저...”임슬기는 석지헌을 슬며시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석지헌 씨,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그런데 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요.”그 말을 들은 석지헌이 곁눈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짓궂게 물었다.“설마 여자 좋아하는 건 아니죠?”“아뇨!”임슬기는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연애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요. 그러니까...”“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꽃도 그만 보내고 밥도 그만 사라, 이
한동안 날카롭게 대치하다가 임슬기는 입술을 감쳐물었다.“더 볼 일 없으면 먼저 갈게요.”임슬기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배정우 옆을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배정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둡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꿰뚫듯 바라보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종현이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지난 4년 동안 네가 사고당했던 그날이면 꼭 묘지에 가더라. 넌 정말 걔 안 보고 싶어?”임슬기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대로 얼어붙은 듯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발을 떼고 싶었지만 다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워 도저히 움직일 수 없
임슬기는 그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절대 착각일 리 없었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반지의 모든 디테일을 임슬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건 배정우가 그녀에게 청혼하며 건넨 반지였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다.석지헌은 임슬기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이 반지 마음에 들어요? 제가 사드릴게요.”“아뇨. 괜찮아요.”임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마음에 든 건 아니에요.”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 자리에 배정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아니, 배정우가 없었다면 이 반지가
집에 돌아온 임슬기는 여전히 그 초대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작업실의 운영 상황이 어떤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돈이 정말 급하면 진승윤이 언제든 송금해 줄 것이다.처음 스튜디오를 차릴 때도 자본금은 전부 그가 댔다.그런데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임슬기는 아직도 그 창업 자금을 갚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하지만 배정우만 생각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누나, 가봐. 사람들이랑 좀 부딪히고 어울리는 게 결국 누나한테 도움이 될 거야.”강재호는 과일주스를 한 잔 짜서 임슬기에게 내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