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안 믿어요.”“왜요?”그녀는 잠시 멈칫했다.“말뿐이잖아요. 제가 당신을 믿을 이유가 없잖아요.”이번에는 배정우가 말이 없었다.이게 그녀가 그에게 준 대답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4년이 흘렀고 그녀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를 믿지 않기를 택했다.“속죄할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요?”임슬기는 가슴이 조여왔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임슬기로서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고 강하린으로서 더 이상 이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정우 씨, 당신 아내는 이
신기하게도 그가 하라는 대로 하자 그녀는 숨이 정말로 한결 편안해졌고 긴장과 두려움도 반쯤 사라졌다.배정우는 그녀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질까 봐 걱정되어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곁에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21년 전에도 그는 내가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로 그녀를 어둠 속에서 끌어냈다.그래서 그녀는 그의 발걸음을 좇아 열심히 달렸고 결국에는 그와 결혼까지 했다.하지만 6년 전, 연다인라는 여자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고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에
배정우는 단박에 그녀가 자신을 비꼰 걸 알아챘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임슬기를 아는 그로서는 그녀가 새벽에 자신을 밀어 떨어뜨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물었다.“어젯밤에 내가 무례하게 군 건 없었나요?”“배정우 씨, 정신 차리셨으면 얼른 가세요.”임슬기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나가시죠.”“강하린 씨, 어젯밤에 내가 실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 사과드릴게요.”전날 술기운 때문인지 배정우의
임슬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키스를 당한 채 온몸의 힘이 빠져 배정우의 품에 안긴 채로 축 늘어졌다.그때 그녀의 귓가에 배정우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슬기야, 슬기...”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마법이 풀리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임슬기는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밀어냈다.“배정우 씨, 전 강하린이에요. 임슬기가 아니라고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배정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아니야, 난 틀리지 않았어.”그러고는 다시 입을 맞추려 고개를
배정우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임슬기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제가 맞췄죠? 저랑 돌아가신 부인이 닮아서 그런 거잖아요.”“아니에요.”“아니라고요?”임슬기는 비웃듯 그를 바라보았다.“배정우 씨, 실망이에요. 이미 다 행동으로 보여줬으면서, 왜 인정할 용기조차 없어요?”배정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강하린 씨는 제가 뭐라고 말하길 바라요?”사실 임슬기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괜히 스스로 감정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걸.그녀가 정말 신경 쓰고 있는 건 ‘강하린’이 ‘임슬기’의 대체품이 된다는 그
임슬기는 질문을 던진 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보았다.“배정우 씨가 시간이 안 되시면 그냥...”“시간 돼요.”그 짧은 한마디에 임슬기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게 되었다.마음속엔 괜히 불편함이 스며들었다.애초에 진심으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그에게 예의를 차리려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제안이었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남자는 절대로 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그 사실을 떠올리자 임슬기의
권민이 막 임슬기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아직 연결도 되기 전, 배정우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나오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끊어.”권민이 해명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그 말을 듣자 배정우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그는 권민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곧장 전화를 끊어버리더니 번호까지 삭제해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권민에게 던져주며 경고했다.“앞으로 나 몰래 또 그 여자랑 연락하면 그땐 가만 안 둬.”권민은 고개를 숙였다.“네, 알겠습니다.”배정우는 시선을 거두
“오랜만이네.”육문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수석 문을 열어두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가요.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배정우는 말없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가는 내내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착하면 자연히 입이 열릴 것처럼.약 10분쯤 후 둘은 아까의 그 바에 다시 도착했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배정우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고 술을 한 잔 따라 천천히 입에 댔다.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슬기랑 자
한참이 지나서야 육문주가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래요.”김현정을 떠올리자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아직 그렇게 젊고 앞으로도 살아갈 시간이 많았던 사람이었다.“근데 나 요즘엔 꿈에서도 현정이를 거의 못 봐요. 처음 1년은 자주 꿈에 나왔는데, 최근 2년 동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나와요.”임슬기는 눈물을 꾹 삼키며 말을 이었다.“혹시 나한테 실망해서 일부러 꿈에 안 와주는 걸까요?”김현정에 대한 이야기는 메리카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누구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비슷한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