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별이 부은 얼굴을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온다연, 넌 너무 건방져. 감히 나를 때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온다연이 어깨를 으쓱했다.“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조만간 나씨 가문도 사라질 텐데 네가 뭘 할 수 있겠어?”그녀는 테이블 위의 정교한 디저트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정말 이 디저트를 안 먹을 거야? 어쩌면 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맛볼 수 있는 고급 디저트가 될 텐데.”나은별이 코웃음을 쳤다.“네가 갑자기 진씨 가문의 딸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어.”“하지만 네가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어.”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때 김원도가 나를 납치한 후, 유강후에게 너를 갖다 바치면 나를 놓아주겠다고 했는데, 유강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온다연은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어떻게 했든 이미 지나간 일이야. 나은별, 당장 꺼져. 나한테 도발하지 마. 너는 그런 자격이 없어.”하지만 나은별은 말을 이어갔다.“유강후는 주저 없이 너를 납치범에게 넘겼고, 너는 결국 김원도에게 끌려가 바다에 빠져 죽었지.”“아니, 죽지 않았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에 대한 유강후의 사랑은 단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보상일 뿐이야. 언젠가는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온다연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애써 진정하고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확신에 차 있다면 기회를 주지. 지금 유강후를 불러 너를 선택할 건지 물어보는 게 어때?”나은별은 눈에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지금 당장은 날 선택하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너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 당연히 너에게 미안해서...”“닥쳐!”온다연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딴 헛소리 집어치우고 정신병 치료나 받아. 과거에 나와 유강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나는 그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은 없으니까.”“정말 네가 말한 것처럼 나
나은별은 몸을 떨며 눈에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네가 감히!”온다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코웃음을 쳤다.“못 할 게 뭐가 있어? 네가 죽으면 너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네.”그녀는 몸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마.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나은별은 독살스럽게 그녀를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가버렸다.온다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여자에게 사람을 붙여서 대체 뭘 하려는지 지켜봐요. 저 여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아가씨!”임원식이 떠난 후에야 온다연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머리 통증이 더 심해져 토할 것 같았다. 나은별의 말은 칼날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임혜린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이 안 좋아? 나은별이 헛소리한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잠시 쉬니 조금 나아졌다.“그 여자 말이 사실인 것 같아.”임혜린이 급히 그녀를 달랬다.“말도 안 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유강후가 성질이 더럽고 잘난 척하는 데다 남의 비밀을 마음대로 까발리긴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아. 너를 두고 나은별을 좋아할 리 없어.”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그 말이 아니야. 강후 씨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아. 이전에 나은별이 납치됐을 때, 강후 씨가 나를 그 여자 대신 납치범에게 넘겼다는 거 말이야. 사실인 것 같다고.”임혜린은 한참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그 일은 내가 아는데, 오해가 있어. 그때 유강후는 너를 닮은 사람을 준비해 납치범에게 넘기고 나은별을 구출하도록 지시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부하들이 너를 그 사람으로 착각해 현장으로 데려간 거야.”온다연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으로 시큰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그다음은?”임혜린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
나은별은 깜짝 놀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입술마저 하얗게 질렸다.유강후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이마에 닿은 권총을 의식한 나은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강, 강후 씨, 왜 총을 나한테...”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유강후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말해, 왜 여기에 있냐고?”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눈빛이었다.그녀는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나는 그냥 커피 마시러 왔을 뿐이야...”유강후는 믿지 않는 듯 서늘한 총구를 천천히 내리꽂았다.총구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나은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강후 씨, 제발 이러지 마...”총구는 결국 그녀의 턱에 닿았고, 목소리는 얼음 동굴에서 나온 듯 차가웠다. “온다연에게 무슨 말을 했어?”나은별은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 아무 말도 안 했어. 강후 씨, 총을 치워줘. 무서워.”유강후는 무자비하게 말했다.“너도 무서운 걸 알아? 나쁜 짓을 할 때는 왜 겁이 안 났지?”나은별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강후 씨, 난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여자 때문에 나를 죽일 거야?”유강후는 극도로 혐오하는 표정을 지으며 잔인하게 말했다.“한 번 더 온다연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입을 총으로 갈겨버려 영원히 말 못 하게 할 거야!”나은별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의 눈빛에 서린 독기에 그녀의 심장이 얼어붙었다.“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인사만 했을 뿐이야...”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말해서는 안 될 단어 하나라도 흘렸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나은별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믿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잖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
한이준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쪽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한씨 가문에서 그동안 충분히 도와줬으니 이제 더 이상 형을 괴롭히지 말아요.”나은별은 성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이준 씨, 나는 예전에 재민 씨 여자친구였어요. 재민 씨가 돌아왔으면 최소한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녀에게 한 톨의 호감도 없는 한이준이 차갑게 말했다.“안 좋은 소리 듣기 전에 얼른 사라질 생각은 없는 건가요?”나은별이 맞받아쳤다.“내가 틀린 말을 했어요? 이준 씨, 당신들 행동이 너무 못됐잖아요. 재민 씨를 찾았다면 최소한 나에게 알려주긴 했어야지. 내가 그 사람 소식을 알 자격도 없어요?”한이준은 문득 그동안 이 여자를 지켜주고 도와준 것이 바보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뻔뻔한 여자를 이전에 형수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형을 2~3년만 기다렸어도 나는 그쪽을 형수라고 존대했을 거예요. 하지만 소이섭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지 오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그쪽을 도왔어요. 이제 우리 한씨 가문은 빚진 게 없어요!”“형이 돌아왔지만, 그쪽은 이미 소이섭과 사귀는 사이 아닌가요?”“사람은 너무 욕심부리면 안 돼요. 모든 걸 다 가지려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나은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이섭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오해예요.”한이준은 코웃음을 쳤다.“그쪽이 소이섭과 무슨 사이인지는 알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쪽이 강후에게 치근대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나은별 씨,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나씨 가문이 몰락했어도 마지막 체면은 지켜야죠.”나은별이 또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한이준이 유강후를 잡아끌고 가버렸다.그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강후, 다 네가 자초한 거야! 한이준, 너도 제명에 못 죽을 거야!’유강후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임혜린도 여기 있는데, 정말 지금 들어갈 거야?”한이준이 초조해하며 이를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 지금의 임혜린은 네가 가진 돈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을 거니까.”말을 마친 유강후는 더 이상 한이준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문을 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온다연이 보였다.유강후를 본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회의 중이지 않았어요? 왜 왔어요?”유강후가 그녀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어보며 물었다.“몸이 안 좋아?”임혜린이 옆에서 빈정댔다.“모른 척하긴. 강후 씨 죽마고우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은별이 여기 왔던 걸 모른다고 하지 마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무시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전화했을 때야 나은별과 만난 걸 알았어. 왜 말하지 않았어?”온다연은 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중요한 회의를 방해할 만큼 큰일도 아니었어요.”유강후의 걱정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나은별이 무슨 말을 했어?”“집에 가서 얘기해요. 피곤해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임혜린에게 말했다.“오래된 지인이 널 찾고 있어.”임혜린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군데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이준이 들어왔다.임혜린은 벼락 맞은 듯 멍하니 서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이준 역시 그녀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그녀의 살점을 도려낼 듯 날카로웠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임혜린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가까운 거리임에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결국 그녀 앞에 다가선 한이준이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임혜린.”그제야 정신을 차린 임혜린의 입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한 대표님이셨군요. 오래된 지인이라 해서 누군가 했더니.”한이준이 안으려고 뻗어오는 팔을 임혜린은 피했다.“한 대표님, 자중하세요.”한이준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혜린아, 나는 줄곧 널 찾고 있었어. 너도 알고 있었지?”임혜린이 그의 팔을 뿌리
임혜린이 문어귀에 도착하니 한이준의 경호원이 막아섰다.“임혜린 씨, 여기서 나가면 안 됩니다.”임혜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리쳤다.“당신들이 뭔데 사람을 못 가게 해?”경호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저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임혜린이 이를 악물고 한이준을 돌아보았다.“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이 개자식이 국내에서 하던 짓을 여기서도 하다니? 진짜 미쳤구나!’한이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냥 널 보내기 싫을 뿐이야. 좀 순순히 말을 들으면 안 돼? 그러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잖아.”이 말에 임혜린은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그녀는 분노를 삼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이준 씨, 여기서도 국내에 있을 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는 3년 전의 임혜린이 아니에요. 당신의 그 수작들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고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경고했다.“지금 보내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한이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경호원이 재빨리 임혜린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임혜린은 버럭 화를 내더니 몸을 돌려 경호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감히 내 휴대폰을 빼앗아?”경호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나 문설주를 잡았다.임혜린이 다시 달려들자, 경호원은 다른 동료 뒤로 숨었다.다른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녀는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빼앗은 경호원을 노려보았다.“이름이 정진호 맞죠? 오늘 나를 잘못 건드렸어요. 내가 한이준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 아니면 계속 못살게 굴 거니까. 나는 뒤끝이 장난이 아니에요.”깜짝 놀란 정진호가 황급히 사과했다.“임혜린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 이해해 주십시오.”임혜린이 차갑게 웃었다.“그럼 이제 끝장났네요. 계속 고통받을 준비 해요.”정진호는 속으로 탄식했다.그는 한이준의 측근으로, 임혜린에게 여러 번 당한 적이 있었다.
한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그때 화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줘.”임혜린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무슨 기회요? 우리 엄마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날 믿지 않는 이준 씨 때문에 약을 못 챙겨서 우리 엄마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때 기회를 줄 순 없었어요?”임혜린은 그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한씨 가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10년 동안 이준 씨를 챙겨줬죠. 잘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엄청 고생한 건 제가 알아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준 씨는 그럴 자격 없잖아요?”“이준 씨가 준 케이크는 정말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저한테 남겨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버리려고 했다는 걸 몰랐어요.”“만약 그게 이준 씨가 버리려던 케이크인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거예요.”“우리 이제 성인이잖아요. 서로에 대한 체면 정도는 지켜주자고요.”모든 단어와 문장이 한이준에 대한 원망이었다.한이준은 손을 떨며 임혜린을 잡았다.“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려. 혜린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임혜린은 흠잡을데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요?”그녀는 손을 들어 한이준의 뺨을 내리쳤고 잘생긴 얼굴에는 곧바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는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화가 풀렸어?”임혜린은 차갑게 웃었다.“뭘 풀어요?”“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면 다시 사과할게.”“좋아요. 그럼 사과하세요. 바라던 참이니까.”그러자 한이준은 눈을 반짝였다.“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이제 날 용서했다는 뜻이지?”임혜린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사과를 받으면 꼭 용서해야 하나
툭하는 소리와 함께 임혜린의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내 사랑’이라는 사람의 전화는 여전히 수신으로 표시되었다.한이준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발로 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깨졌다.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임혜린은 한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왜 남의 핸드폰을 발로 차요? 미쳤어요?”한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임혜린, 그동안 남자를 얼마나 만났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은 그의 뺨을 내리쳤다.“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미친 X. 꼴도 복 싫으니까 얼른 나가요.”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이 깨져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위에는 ‘내 사랑’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임혜린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더 이상 한이준과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한이준을 밀치고 밖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문에 다다르자 임혜린은 캐비닛에 있는 도자기를 쥐더니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그러자 도자기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들려있었다.임혜린은 그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을 위협했다.“경고하는데 막지 마요.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져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바라봤다.“대표님...”한이준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 계속 이러면 나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어.”임혜린은 싸늘하게 말했다.“할 말 없어요.”그러고선 한이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임혜린이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이 두려운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마음이 조급해진 임혜린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길 막지 말고 비켜요.”이때 경호원이 나타나 임혜린의 손에서 도자기 조각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임혜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