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은 그가 온다연에게 선물한 작은 생명체였다.천 마리 넘는 새끼 고양이 속에서 직접 골라낸, 꽤 많은 공을 들인 녀석이다.당시 구월은 온다연처럼 허약한 체질에 상처도 많아 돌보기 힘들었다.하지만 온다연은 떠날 때 구월을 주희에게 넘길지언정 그의 곁에 두려 하지 않았다.‘그때 내가 그렇게 밉고, 떠나려는 마음이 그렇게 단호했던 걸까? 단 한 번도 나에게 감사함을 느껴본 적이 없고, 털끝만큼도 내 입장을 고려한 적이 없었던 걸까? 내가 저 애한테 그렇게 볼품없는 존재였던 건가?’유강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조그마한 체구에 가녀린 목소리를 가진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고양이조차 남겨주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정리하고 떠났고, 연락 한 번도 하지 않을 만큼 맺고 끊음이 명확했다.유강후는 그렇게 차에 앉아서 온다연과 주희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이 심장에서 사지로 퍼져나가는 동안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온다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어둠과 고통이 서려 있었다.가을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며 시야를 흐렸다.운전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이권은 온다연과 주희가 구월을 안고 털을 말리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대표님, 들어갈까요? 목욕이 끝난 모양이에요.”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유강후는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됐다, 가자. 회의가 있어.”“그럼, 주희가 대표님께 무례하게 군 건 어떻게 할까요?”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전에 나은별과 유하령도 이런 짓을 했었지?”이권은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넘겼다.유강후는 눈을 감았다.“그러니까 이게 다 업보야. 그때 내 반응이 얼마나 어리석었을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받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 일인 줄 이제 알았어.”“다연이 고립무원일 때 나는 다른 사람 편을 들었어...”이권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작은 사모님이 마음속에 서운함이 쌓여서 일부러 그러실 거예요. 너
주한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가슴이 쓰라려 한참 만에 겨우 대답했다.“이쪽 일을 다 처리하면 귀국할 거야. 그때 가서 내가 처리할게.”그때 경호원이 차 문을 열었다.“아가씨, 비가 오기 전에 차에 타세요.”온다연은 차에 타려다가 갑자기 주희 쪽으로 몸을 돌리며 쌀쌀맞게 말했다.“앞으로 그런 얄팍한 수를 쓰지 마. 난 이런 행동이 너무 싫어.”주희가 눈을 내리깔았다.“누나, 무슨 말이에요? 얄팍한 수라니요?”온다연이 냉정하게 지적했다.“유강후가 너를 때렸다고 말한 거. 사실은 유강후가 너에게 손을 대지 않았는데, 네가 일부러 거짓말한 거잖아.”주희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싱긋 웃었다.“역시 누나를 속일 수가 없네요. 마음 아프셨어요?”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의 성격을 난 너무 잘 알아.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하려 했다면 그렇게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했을 거야. 네 목숨을 가져가는 게 그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라고.”“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마. 나도 예전에 이런 식으로 누명을 쓴 적이 있어서 이런 행동이 정말 싫어.”주희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억울하다는 게 어떤 건지 느껴보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자가 이전에 누나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고요. 나는 치졸한 사람이니 이대로 멈추지 않을 거예요.”“입 다물어!”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넌 그 사람의 상대가 아니야.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정말 그 사람 비위를 건드리면 나도 너를 지키지 못해.”주희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했다.“알았어요, 누나.”온다연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내가 지금 쓰는 번호야. 별일 없으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하지 마. 바쁘니까.”“정기적으로 구월을 보러 올게. 당분간은 네가 데리고 있어. 지금은 내가 키우기 좀 불편한 상황이라서.”주희는 명함을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차에 타기 전에 또다시 당부했다.“다시는 유강후
여기까지 생각한 온다연은 휴대폰을 켰고, 유강후가 최상위에 고정한 메시지를 보게 됐다. 여전히 오늘 아침에 올린 메시지에 멈춰 있었다.그의 프로필 사진이 곰돌이 커프스단추인 것을 보고 그녀는 코끝이 찡했다.이건 그녀가 몇 년 전 물건을 살 때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줬는데, 그가 이렇게 소중히 여길 줄은 몰랐다.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프로필 사진을 가볍게 스친 후 자기 아랫배로 옮겨갔다.‘내가 오늘 너무 심했나?’이때 집사가 노크하고 들어왔다.“아가씨,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대표님을 안으로 모시는 게 어때요?”온다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강후 씨가 밖에 있어요? 언제 왔는데요?”“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비가 너무 쏟아져서 계속 차 안에 계시는데, 아가씨가 걱정돼서 오신 것 같아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울 수 있으니까요.”온다연이 잠자코 있자, 집사가 말을 이었다.“어쨌든 아이 아빠시잖아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계속 차 안에 계시면 공기가 희박해 답답하실 거예요.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게다가 방금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곧 상륙한다고 했어요...”창밖을 내다보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 같았다.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운 것도 사실이었다.그녀는 고민 끝에 결국 동의했다.“들어오라고 하세요.”집사는 마치 사면령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바로 대표님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온다연이 쌀쌀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비를 맞는 게 그렇게 가슴 아파요? 집사님이 비를 맞는 것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네요.”집사가 급히 변명했다.“아니에요, 아가씨. 그저 비가 너무 쏟아져서 차 안에 계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러는 거예요. 게다가 우리가 여기 지내면서 항상 대표님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됐어요. 그만 변명하고 얼른 그 사람을 안으로 들이세요.”집사가 총총걸음으로 나갔다.약간 들뜬 듯한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네!”약 10분 후, 뜨끈뜨끈한 계란 국수가 완성됐다. 뽀얀 국물에, 노릇노릇한 계란 후라이, 파릇파릇한 채소와 송송 썬 실파가 입맛을 돋우었다.국수 옆에는 간장을 살짝 뿌린, 부드러운 계란찜이 놓여 있었다.유강후는 쟁반에 담긴 국수와 계란찜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와서 먹어. 맛이 괜찮을 거야.”온다연은 사양하지 않고 국수를 조금 덜어 작은 그릇에 담은 후 나머지는 유강후 앞으로 밀어주었다.“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이건 당신이 드세요.”사실 그녀는 별로 배고프지 않았다. 단지 유강후가 저녁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 주방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시켰던 건데, 유강후가 직접 요리할 줄은 몰랐다.온다연은 국수를 한 입 맛보았다.“맛있네.”진심이었다. 그 요리사가 만든 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계란찜도 부드럽고 감칠맛이 났다.유강후는 눈빛이 밝아지더니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번졌다.“맛있다니 다행이야.”온다연은 남은 국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혼자 다 못 먹어요. 당신이 많이 만든 거니까 남은 건 당신이 다 먹어요.”유강후도 배고팠던 터라 사양하지 않고 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웠다.온다연은 먹으면서 곁눈질로 스리슬쩍 유강후를 훔쳐보았다.그는 빨리 먹는데도 동작이 우아해 이런 쪽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게다가 호텔 가운을 걸쳤을 뿐인데 얼굴이 너무 잘생겨 보였다. 보기만 하면 홀딱 빠질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다.온다연은 갑자기 슬펐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를 미워해야 하는데, 매번 그의 얼굴에 끌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정말 너무 못났어.’여기까지 생각한 온다연은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소파 쪽으로 갔다.유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맛이 없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만 마셨다.유강후는 그녀에게 다가와 머리카락을 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안 먹어? 맛이 없으면 다시 만들어 줄게.”온다연은 그의 손을
그녀가 거부하지 않자, 유강후는 계속 수박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온다연은 수박을 정말 좋아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에 담긴 수박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그러고는 너무 졸린 탓인지 소파에 엎드린 채 꾸벅꾸벅 졸았다.유강후는 과일 접시를 치우게 하고 물수건을 가져와 온다연의 손과 얼굴을 깨끗이 닦아준 후 그녀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온다연은 발버둥 치려 했지만 하루 종일 분주히 보낸 탓에 너무 졸렸다. 게다가 유강후의 숨결이 그녀를 감싸면서 더욱 졸음이 몰려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돌아누웠다. 곧 고르로운 숨소리가 들려왔다.유강후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조용히 옆에 누웠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 뒤에서 살며시 안았다.온다연은 귀찮은 듯 몇 마디 잠꼬대를 했지만 결국 눈을 뜨지는 않았다.유강후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번졌고, 눈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나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요 며칠 그녀를 안고 자지 못했던 유강후는 정말 한 순간도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끝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고 강씨 저택에서 보내온 잠옷을 갈아입은 그는 다시 온다연의 옆에 누웠다.밖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토네이도가 지나가며 지구 종말이 온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실내는 따뜻하고 평화로웠다.온다연은 언제부터인지 자세를 바꿔 유강후의 품에 쏙 들어와 있었다. 손은 그의 허리를 꽉 잡고 있었고, 다리도 장난스럽게 그의 다리에 감겨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분명 나를 떠날 수 없으면서 왜 인정하지 못하는 거야? 이런 날씨에 내가 없으면 잠을 설칠 게 뻔하잖아.”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언제쯤 화가 풀릴까? 계속 이렇게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아기도 편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다.그녀는 기쁨을 금치 못하며 두 아이를 모두 안으려 했지만 한 명밖에 안을 수 없었다.두 아이는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아이를 안으면 여자아이가 삐졌고, 여자아이를 안으면 남자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온다연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강후가 나타나 남자아이를 들어 어깨에 올리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다른 팔로 안았다.욕구가 충족된 두 아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아빠 최고’를 외쳤다. 온다연은 웃으며 잠에서 깼다.그녀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아쉬운 듯 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중얼거렸다.“왜 꿈이야?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꿈속의 달콤한 느낌은 머리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대로 한참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침실 문을 나서자, 음식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유강후가 흰색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쟁반에 담긴 요리를 식탁에 옮기고 있었다.그 모습은 꿈속의 한 장면과 정말 똑같았다.유일하게 다른 점은 옆에 두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순간 온다연은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렸다.유강후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잘 잤어? 벌써 점심이야. 씻고 와서 밥 먹어.”“오늘 태풍에 폭우가 쏟아져서 요리사는 비가 그치면 오기로 했어. 이 요리들은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입에 맞지 않더라도 이해해 줘. 오늘 악천후 때문에 비행기가 못 들어와서 평소처럼 재료가 많지 않아.”“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양갈비 스테이크와 버섯 수프는 준비했어. 어서 씻고 와서 먹어.”...온다연은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아쉬운 듯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표정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그녀는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인정해. 너는 저 사람에게 푹 빠져 있어. 과거의 일들도 너의 그런 감정
식탁에 놓인 요리들은 대부분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플레이팅은 요리사가 한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맛은 훌륭했다.유강후는 양념을 걷어내고 가장 좋은 부분만 골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온다연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다 먹었다.요 며칠 가끔 메스껍기도 했지만 3년 전 임신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그녀는 아이가 영양이 부족할까 봐 매번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게다가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요리라도 신선하고 건강해 보이면 무조건 조금씩 먹었다.그녀가 먹기 싫은 데 억지로 먹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그녀의 그릇을 치웠다.“그만 먹어. 이따가 속이 안 좋으면 또 토하겠어.”그는 갓 짜낸 수박 주스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주스를 좀 마셔.”온다연은 한 모금 마시더니 약간 달다고 느껴져서 말했다.“다음에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어요.”유강후는 살짝 놀랐다. 갓 짜낸 오렌지 주스는 약간 쓴맛이 나는데, 온다연은 쓴맛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입맛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채소를 많이 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가 약간 안쓰러웠다.“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그가 공을 들여 이 작은 주방을 조성하고, 채소와 양식 기지를 세운 이유는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그가 있는 한, 그녀는 편식해도 되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어도 된다.의사에게 물어보니, 편식이 지나치지만 않으면 아이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했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유강후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떴다.꽤 먼 거리였지만, 온다연은 대략적인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입덧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 같았고 태도도 공손한 편이었다.이때 임원식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대표님이 곽 박사님을 모시느라 꽤 고생했어요. 돈만 있으면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지난번에 잃은 아이는 두 사람에게 영원한 아픔이었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만약 이 두 아이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도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유강후는 호박석 구슬을 살짝 건드리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배 속에 아이가 있으니 너무 흥분하면 안 돼.”온다연도 마음이 무거웠다. 한참 후에야 일어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염지훈은 상태가 많이 좋아져 유동식을 먹을 수 있었다.권예진이 빨대로 그에게 유동식을 먹이고 있었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본 염지훈의 눈빛이 밝아졌다.“밖에 비가 쏟아지는데, 왜 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온다연이 오지 않은 이틀간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 생각을 하니 염지훈은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그는 권예진이 들고 있는 컵을 밀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진아,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다연과 할 말이 있어.”권예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고, 결국에는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온다연은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그녀에게 건넸다.“폭우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집에서 준비한 거니까 먼저 대충 드세요. 이따 비가 그치면 맛있는 걸 사줄게요.”권예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권예진이 나간 후, 온다연은 침대를 조금 올리고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편안하게 해주었다.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다.한참 후 염지훈이 말을 꺼냈다.“너의 부모님이 오신다며?”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틀 후예요.”염지훈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나지막이 물었다.“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된 거 알아?”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아직 몰라요. 하지만 지훈 씨가 운전하다가 기둥에 부딪혔다고 말할 거예요.”염지훈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다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