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다.그녀는 기쁨을 금치 못하며 두 아이를 모두 안으려 했지만 한 명밖에 안을 수 없었다.두 아이는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아이를 안으면 여자아이가 삐졌고, 여자아이를 안으면 남자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온다연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강후가 나타나 남자아이를 들어 어깨에 올리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다른 팔로 안았다.욕구가 충족된 두 아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아빠 최고’를 외쳤다. 온다연은 웃으며 잠에서 깼다.그녀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아쉬운 듯 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중얼거렸다.“왜 꿈이야?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꿈속의 달콤한 느낌은 머리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대로 한참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침실 문을 나서자, 음식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유강후가 흰색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쟁반에 담긴 요리를 식탁에 옮기고 있었다.그 모습은 꿈속의 한 장면과 정말 똑같았다.유일하게 다른 점은 옆에 두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순간 온다연은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렸다.유강후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잘 잤어? 벌써 점심이야. 씻고 와서 밥 먹어.”“오늘 태풍에 폭우가 쏟아져서 요리사는 비가 그치면 오기로 했어. 이 요리들은 내가 직접 만든 거니까 입에 맞지 않더라도 이해해 줘. 오늘 악천후 때문에 비행기가 못 들어와서 평소처럼 재료가 많지 않아.”“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양갈비 스테이크와 버섯 수프는 준비했어. 어서 씻고 와서 먹어.”...온다연은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아쉬운 듯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표정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그녀는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인정해. 너는 저 사람에게 푹 빠져 있어. 과거의 일들도 너의 그런 감정
식탁에 놓인 요리들은 대부분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플레이팅은 요리사가 한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맛은 훌륭했다.유강후는 양념을 걷어내고 가장 좋은 부분만 골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온다연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다 먹었다.요 며칠 가끔 메스껍기도 했지만 3년 전 임신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그녀는 아이가 영양이 부족할까 봐 매번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게다가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요리라도 신선하고 건강해 보이면 무조건 조금씩 먹었다.그녀가 먹기 싫은 데 억지로 먹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그녀의 그릇을 치웠다.“그만 먹어. 이따가 속이 안 좋으면 또 토하겠어.”그는 갓 짜낸 수박 주스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주스를 좀 마셔.”온다연은 한 모금 마시더니 약간 달다고 느껴져서 말했다.“다음에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어요.”유강후는 살짝 놀랐다. 갓 짜낸 오렌지 주스는 약간 쓴맛이 나는데, 온다연은 쓴맛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입맛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채소를 많이 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가 약간 안쓰러웠다.“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그가 공을 들여 이 작은 주방을 조성하고, 채소와 양식 기지를 세운 이유는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그가 있는 한, 그녀는 편식해도 되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어도 된다.의사에게 물어보니, 편식이 지나치지만 않으면 아이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했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유강후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떴다.꽤 먼 거리였지만, 온다연은 대략적인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입덧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 같았고 태도도 공손한 편이었다.이때 임원식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대표님이 곽 박사님을 모시느라 꽤 고생했어요. 돈만 있으면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지난번에 잃은 아이는 두 사람에게 영원한 아픔이었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만약 이 두 아이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도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유강후는 호박석 구슬을 살짝 건드리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배 속에 아이가 있으니 너무 흥분하면 안 돼.”온다연도 마음이 무거웠다. 한참 후에야 일어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염지훈은 상태가 많이 좋아져 유동식을 먹을 수 있었다.권예진이 빨대로 그에게 유동식을 먹이고 있었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본 염지훈의 눈빛이 밝아졌다.“밖에 비가 쏟아지는데, 왜 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온다연이 오지 않은 이틀간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 생각을 하니 염지훈은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그는 권예진이 들고 있는 컵을 밀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진아,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다연과 할 말이 있어.”권예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고, 결국에는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온다연은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그녀에게 건넸다.“폭우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집에서 준비한 거니까 먼저 대충 드세요. 이따 비가 그치면 맛있는 걸 사줄게요.”권예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권예진이 나간 후, 온다연은 침대를 조금 올리고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편안하게 해주었다.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다.한참 후 염지훈이 말을 꺼냈다.“너의 부모님이 오신다며?”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틀 후예요.”염지훈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나지막이 물었다.“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된 거 알아?”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아직 몰라요. 하지만 지훈 씨가 운전하다가 기둥에 부딪혔다고 말할 거예요.”염지훈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다
염지훈의 목소리는 마치 고통에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다연아, 기억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널 사랑할 거야. 내 사랑이 결코 유강후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유강후가 줄 수 있는 건 나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그냥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야. 우리가 좀 더 일찍 서로를 알게 되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지도 몰라.”“만약 어느 날, 유강후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그 사람이 너한테 상처를 줬다면 뒤를 돌아봐. 난 항상 이 자리에서 널 기다릴게.”염지훈은 손을 들어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다연아, 알겠지만 나랑 유강후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 나는 네가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보란 듯이 잘 지내. 울지 말고. 나는 다연이가 울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라서 싫어.”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차가운 손끝에서는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만약 한발 앞서서 널 알게 되었다면 그때는 날 선택할 거야?”눈이 시큰해진 온다연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모르겠어요.”이 모든 게 유강후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녀 역시 유강후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마 염지훈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염지훈은 손을 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거면 됐어. 적어도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잖아.”온다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요.”어느새 염지훈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으니까 표정 좀 풀어. 내가 널 놔주면 기뻐해야지. 회장님이랑 사모님 오시면 내가 직접 약혼 취소하겠다고 얘기할게. 난처해하지 않아도 돼.”지난 3년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 온다연은 아직도 자신을 아끼고 있는 연약한 남자를 보며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염지훈은 그녀의 슬픔을 알아차린 듯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슬퍼하지 마. 나도 그냥 포기하는 건 아니니까.”“원하는 게 뭐예요
온다연은 할 말이 있는 듯 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권예진은 의사와 간호사를 동행하여 안으로 들어왔다.정기 검진을 하고 상처를 치료한 후, 의사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얘기해주고선 걸음을 옮겼다.권예진은 염지훈을 정성껏 보살피며 약을 챙겨줬다.조용히 옆으로 비켜선 온다연은 권예진의 애틋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수십억 인구가 있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고 한다. 다들 미련을 품은 채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물 흘러가듯 태연하게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온다연은 떠날 준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염지훈이 권예진에게 물었다.“밖에 아직도 비와?”권예진은 재빨리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아직도 오네요. 소나기가 내리는 걸 보니 곧 멈출 거예요.”이때 염지훈이 말했다.“며칠 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사줄게.”권예진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속으로 기뻐했다.“괜찮아요. 그냥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병간호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요.”염지훈은 병상 옆 탁자에서 카드를 꺼내 온다연에게 건넸다.“부탁 하나만 들어줘. 예진을 데리고 쇼핑몰에 가서 선물 하나 사줘. 아니, 여러 개도 괜찮아. 가격 보지 말고 마음에 드는 게 있다고 하면 전부 다 사. 한도 제한이 없는 카드니까 실컷 써.”온다연은 카드를 받고 권예진을 쳐다봤다. 수줍은 미소와 놀라움으로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임원식에게 염지훈을 부탁한 후 권예진과 함께 쇼핑몰로 향했다.그들이 간 쇼핑몰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와 시즌 신제품을 모아둔 곳이었다.반짝이는 주얼리, 최신 한정판 가방, 옷, 신발로 가득한 이곳은 그야말로 여자들의 지상 천국이다.눈이 반짝인 온다연과 권예진은 제일 먼저 쥬얼리 샵으로 걸음을 옮겼다.보석 디자인이 세련되고 독
청아한 외모에 피부도 하얗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타고난 권예진이 쥬얼리를 착용하자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온다연은 웃으며 물었다.“예쁘죠? 마음에 들어요?”권예진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일단 나가서 다른 곳도 구경해봐요.”그러자 온다연이 말했다.“마음에 드는 건 맞죠? 이렇게 영롱한 쥬얼리는 예진 씨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울려요. 그럼 이걸로 살게요.”권예진은 쥬얼리를 빼내면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너무 비싸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아쉬운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은 고민도 없이 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이 세트는 저희가 살게요.”이때 매니큐어를 한 가느다란 손이 나타나 권예진이 들고 있던 목걸이를 가로챘다.“예쁜데? 우리 집 강아지한테 딱이네.”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온다연은 화려한 외모의 여성을 마주했다.전형적인 혼혈인 얼굴인데,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건방짐이 가득했다.그 여자는 온다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눈치채고선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 후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꺼내더니 중지에 낀 분홍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어루만지며 살 돈이 없으면 빨리 꺼지라는 표정을 지었다.온다연은 단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저기요. 이 세트는 저희가 먼저 사겠다고 했어요.”여자는 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힐끗 보더니 온다연과 권예진이 입고 있는 옷을 훑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여기에 있는 쥬얼리들이 엄청 비싼 건 알아?”여자는 아주 당연하게 온다연을 돈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지난 며칠 동안 온다연은 줄곧 호텔에 머물렀고, 병원을 오가며 병간호만 했으니 당연히 그 어떤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다.입고 있는 옷은 유강후가 맞춤 제작한 옷이기에 그 어떤 로고도 박혀 있지 않았지만 품질과 디자인은 흠잡을데 없이 완벽했다.당연히 권예진도 아무런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임시로 산 것이기에 아주 평범했다.두 사람은 얼
온다연은 비웃었다.“뻔뻔하네요. CCTV가 없을 것 같아요?”마크 부인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난 여기의 지분을 갖고 있어. 내가 CCTV 고장 났다고 하면 그냥 그런 거야. 너같은 동양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랑 급이 달라. 가난한 주제에 설치기는.”온다연은 몸을 숙여 바닥에 놓인 목걸이를 집어 들더니 마크 부인의 얼굴에 세게 내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마크 가문의 사모님이 이렇게 무례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인종차별이 취미예요? 이렇게 하시는 목적이 뭐죠?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을텐데?”“마크 가문은 아시아 쪽 사업 범위를 확장할 생각이 없나 봐요?”“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크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업의 70%가 아시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데 참 아이러니하네요.”“사모님은 혼혈 아니신가요? 본인도 동양인의 피를 지녔으면서 이렇게 자기 폄하를 한다는 게 놀랍네요.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마크 부인은 온다연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그러나 온다연이 단번에 막았고 그녀의 손을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사모님이 이렇게 무례하고 거만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마크 가문과의 협력에 대해 다른 가문들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오늘 하신 행동에 대해서는 널리 퍼뜨려드릴게요.”길고 가는 하이힐을 신고 있던 마크 부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부축했다.이때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왔다.“무슨 일이야?”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되었던 온다연은 곧바로 권예진에게 밖에 있는 경호원을 불러오라고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그 남자는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표정이 금세 바뀌었고 서툰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강씨 가문의 사모님 맞으시죠?”그는 온다연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마크라고 합니다. 어제 연회에서도 마주쳤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온다연은 악수를 하지 않고 그저 냉담하게
온다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경호원을 불러왔다.“매장 CCTV 영상을 받을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요. 소리가 있는 걸로요.”그러자 경호원이 답했다.“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 최대 주주가 대표님의 친구거든요.”“그럼 지금 바로 구해줘요.”경호원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이 지금 염지훈 씨의 병실에 계십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하셔서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봐 너무 걱정됩니다. 그쪽으로 가보시는 게...”온다연은 표정이 어두워진 채 곧바로 차에 올랐다.“빨리 병원으로 가요.”...병실 안.유강후와 염지훈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두 사람의 눈에는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듯한 분노와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한참 후 염지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비웃으려고 찾아왔어요? 여기에 누워있는 걸 보니까 속이 후련하죠?”유강후의 목소리도 차가웠다.“아쉽네.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하는데...”유강후는 말끝을 흐리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오늘은 싸우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염지훈, 너는 내가 성격이 유해진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몇 년 전의 나였다면 너랑 박씨 가문은 진작에 끝났어. 다연 때문에 참는 거야.”염지훈의 눈에는 분노가 엿보였다.“내가 그쪽을 무서워할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그동안 막아뒀던 건 전부 다 해제했으니까 부상이 나으면 스스로 물러나.”염지훈은 피식 웃었다.“왜요? 두려워요?”“내가 목숨으로 다연을 협박하면 강 대표님의 곁을 떠날까요? 알다시피 다연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어요. 그쪽이랑 유씨 가문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까지 기억하는데 과연 강 대표님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유강후는 숨을 들이마시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염지훈. 너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죽였겠지.”그는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다연한테 아이가 생겼어.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