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유강후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넋 놓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그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유강후 씨, 저도 이제 집이 생겼어요.”“그때의 저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저와 같은 비참한 사람한테도 오늘이 있고 집도 있고 아이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유강후는 어릴 적 힘들었던 온다연을 생각하며 아픈 마음에 그녀를 안아 다리에 앉히고 자신의 품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게 했다.그러고는 온다연을 꼭 껴안고 마치 맹세라도 하는 듯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넌 항상 집이 있었고 난 항상 널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한 번이라도 뒤돌아보기라도 했으면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겠지만 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어.”“다연아, 이제 다시는 날 버리지 말아 줘.”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뽀뽀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그 순간 온다연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꼭 잡고 있을 것이고 누가 빼앗으려 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리라 생각했다.창밖에 낯익은 거리의 풍경을 보던 온다연은 마음속으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말했다.“저 배고파요 강후 씨, 저 앞 상남가에 있는 고기만두랑 야채죽에 김치까지 더해서 먹고 싶어요.”상남거리는 바로 그녀가 이전에 살던 곳의 오래된 거리였다.그 시절 온다연은 여유가 좀 생길 때면 아침에 그 집 고기만두 한 접시를 주한이랑 나눠 먹곤 했다.고기만두는 한 접시에 여덟 개로 되어 있었는데 매번 주한이는 싫어한다면서 양보하여 온다연에게 여섯 개를 줬고 그녀는 거절하며 다시 만두를 집어 주한의 입에 억지로 넣어주면서 그의 얼굴을 기름투성이로 만들었었다.온다연은 그 감칠맛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함께 고기만두를 나눠 먹었던 그때의 즐거움도 잊을 수 없었다.마치 그녀가 영원히 주한이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입을 맞추고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알았어, 지금 바로 사람 시켜 사 오라고 할게.”온다연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이고 좋은 것만 소유하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앞에 가져다주고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줄 알았어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본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살았어요.”그러더니 갑자기 삐져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자기만 갖고 있으면 그만이지, 유하령에게 그렇게 많은 물건을 사주면서 공주처럼 떠받들어까지 주었잖아요. 됐어요, 입맛도 사라졌으니 그냥 집에 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양 볼을 꼬집더니 웃음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누가 속이 좁은지 모르겠네.”온다연은 그런 유강후의 손을 깨물고는 말했다.“당신이거든요!”유강후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달래며 말했다.“그래 맞아, 내가 속이 좁아. 그럼 된 거지? 좀 더 자고 깰 때쯤이면 우리 도착할 거야.”온다연은 순순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여 체온과 안정감을 느끼며 휴식을 취했다.상남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9시였다.밤새 눈이 많이 온 탓에 거리와 나무에는 온통 눈이 덮여 있었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거리가 너무 좁아 차는 골목에서 좀 떨어진 곳에 주차할 수밖에 없었다.주차한 곳에서 만둣가게까지 가려면 이삼백 미터를 걸어서 가야만 했다.온다연이 차에서 내리자 유강후는 바로 그녀를 들어 안았다.“길에 눈이 너무 많아 미끌어서 넘어질까 봐 그래.”이 거리는 많이 익숙한 거리라서 온다연은 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내려줘요, 저 혼자 걸어갈래요. 이백 미터밖에 안 되는데 당신이 옆에서 조금만 잡아주면 넘어질 리 없어요.”그러면서 유강후의 품에서 빠져 내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어깨를 꼭 껴안고 담요를 걸쳐주고는 말했다.“가자, 이제.”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어깨와 머리 사이에도 많은 눈이 덮여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머리카락
그때 유강후가 마침 들어오더니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어두워졌다.온다연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당당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저분이 제 남편이에요.”유강후는 몸집도 웅장하고 잘생긴 데다 옷차림도 깔끔하여 사모님은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아가씨 남편은 정말 패기 있게 잘 생겼네요. 둘이 잘 어울려요. 그런데 낯이 익은데, 설마 연예인은 아니죠?”그 말에 유강후의 어두워졌던 얼굴색은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며 유강후의 팔짱을 끼고 돌아서서 사장님을 보며 말했다.“사장님, 고기 속 한 접시랑 표고버섯 속 한 접시, 그리고 좁쌀죽 두 그릇이랑 밑반찬 두 접시 주세요.”“그래요.”사장님은 웃으며 물었다.“전에 고기 속만 드시더니 오늘은 왜 표고버섯 속도 시켜요?”온다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저의 남편이 표고버섯을 좋아해요.”그러고는 휴지를 가져와서 밥상과 의자를 다시 한번 닦고 유강후를 보며 말했다.“얼른 앉아요. 이 가게 위생은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유강후가 이런 구멍가게에 별로 와본 적이 없어 온다연은 그가 적응이 안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러나 유강후는 싫은 내색 한번 내지 않고 대신 온다연이 쓸 수저를 뜨거운 물에 헹구어주었다.온다연은 그가 처음 이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놀라웠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주한이가 할 수 있는 거 나도 할 수 있어. 모르면 배워서라도 할 수 있어.”그때 사모님이 만두를 들고 오더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남편이 정말 자상하네요. 둘은 감정이 참 좋아 보여요.”“두 분 다 외모가 출중하니 아기는 또 얼마나 예쁘겠어요. 정말 부럽네요.”온다연은 웃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고마워요, 사모님이 만드신 만두는 역시나 맛있어요.”사모님은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다른 재주도 없고 만두 만들 줄밖에 모르니 아가씨 같은 단골손님들 덕분에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어요.”
온다연은 사모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웃고 넘기며 부하 직원들을 불러 아침 식사를 하게 하고는 다시 만두를 먹으면서 사모님과 잡담을 나누었다.유강후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옆에서 들으면서 그가 알고 싶어 했던 것들과 온다연의 과거도 많이 알게 되였다.거의 다 먹을 때쯤 사모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 가게도 이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 양반이 몇 해 동안 밀가루 반죽만 해왔더니 손목도 이젠 못쓰게 됐어요.”“내년에 만약 우리 딸이 미래 그룹에 들어가면 우리도 가게를 내놓고 은퇴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단골손님들에게 마지막으로 아침 식사하러 오라고 통지할 것이니 꼭 와요. 그날은 돈 안 받고 제가 쏘는 거로 할게요.”온다연은 조금 아쉬워하며 말했다.“가게 문 닫는 거예요? 그럼 먹고 싶으면 어딜 가야 해요?”생각해 보니 좀 유치한 물음인것 같아서 온다연은 다시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따님이 지금 미래 그룹에서 출근한다고요?”“네, 아직은 인턴직이에요.”사모님은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을 띠며 말했다.“딸이 다니던 학교에 모두 세 명의 미래 그룹 인턴직 자리가 있었는데 제 딸도 그중 한 명이에요. 잘하면 내년에 정규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했어요. 미래 그룹의 급여와 대우가 보통 회사의 네다섯 배잖아요. 정규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우리 부모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사모님 딸 저도 봤잖아요. 참 야무지고 착하시던데 틀림없이 정규직이 될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잡담을 나누고 나서야 온다연은 유강후와 가게를 떠났다.잠시 후, 방금 같이 나섰던 경호원 한 분이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그는 손에 든 입사 초대장 한 장을 사모님께 전해 드리며 말했다.“이건 사모님 딸에게 주는 입사 초대장이에요. 내일부터 정규직으로 미래 그룹에 입사시킬 것이지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주말마다 고기만두 두 접시를 대표님 사무실에 가져다줘야 해요. 밖에서 사면 안 되고 꼭 이 가게
한편, 차 안에서 온다연은 포장한 만두를 따뜻한 채로 보온 도시락통에 넣어 두고 두유도 보온병에 담아 두며 음식이 식을까 봐 걱정하였다.그 행동을 본 유강후는 질투하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장 집사 밥 먹었을 거야. 이렇게 안 챙겨줘도 돼.”온다연은 보온병을 제대로 놓고 말했다.“우리 다 같이 금방 비행기에서 내린 건데 집사님도 많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 점심까지 챙겨줘야 하는데 당신은 집사님이 로봇인 줄 알아요?”유강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집에 먹을 것도 많고 요리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그건 다르죠. 제가 가져다드리면 더 좋아하실걸요.”유강후는 화가 나서 불쾌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온다연은 여태 그에게 선물해 준 적이 없었고 먹는 것을 포장해 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남만 챙기고 자신을 챙기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이런 생각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박혀 있었지만 이번 일로 자극받아 더욱 불쾌해졌다.차 안에 저기압이 느껴지자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에 잠겨 있었다.‘이 남자는 갈수록 속이 좁아지네. 예전에는 일하는 면에서 침착하고 대범하여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하는 걸 보니 다 연기였네. 이 남자 속은 바늘구멍보다도 더 좁은 거 같아.’온다연은 화가 나 있는 유강후의 몸에 기대여 새끼손가락으로 그의 손가락을 터치하며 말했다.“그냥 장 집사한테 아침밥을 포장해 주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화내는 거예요?”유강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장 집사님은 이제 당신 가족이랑 마찬가지예요.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그렇게 잘해주는데 아침 식사 하나 챙겨주는 게 이 정도로 화낼 일이에요? 진짜 너무 소심하네요. 유강후 씨, 그냥 이럴 거면 저도 화내요.”말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반대쪽으로 기대었다.유강후는 손을 뻗어 온다연을 다시
“비록 값비싼 시계는 아니지만 이 시계는 그 당시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준 사랑의 선물이에요. 아버지는 이것을 우리 집의 보물로 제 남편만이 착용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말을 들은 유강후는 가슴이 철렁거리더니 다행히 자신이 한발 앞서 이 시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만약 염지훈이 먼저였다면 그는 화가 나서 피를 토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하며 유강후는 다시 시계 판을 닦으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나도 이 시계가 괜찮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내가 먼저 갖고 있다가 나중에 나도 아버님처럼 딸한테 물려줄 거야.”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대며 말했다.“아기들이 또 발로 차고 있어요. 유강후 씨, 저 이제 몸이 점점 불편해지는 거 같아요. 거동도 불편한 거 보니 아기들이 일찍 나올 수도 있을 거 같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불룩한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안에 있는 작은 생명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내가 이미 다 안배해 놓았어. 그때 되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웬 씨가 와서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배를 만지고 있는 유강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번에는 그 어떤 일이라도 있으면 안 돼요.”그녀는 자기 손목에 찬 진주 팔찌를 보며 이어 말했다.“유강후 씨는 그 아이를 봤었죠? 어떻게 생겼어요? 엄청 작았죠?”이것은 온다연이 처음으로 아이에 관해 물어본 것이고 처음으로 용기 내여 이 문제에 직면한 것이었다.비록 아직도 가슴이 아프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지만 온다연은 그 어두운 곳에서 나오기로 하고 미래를 잘 맞이하여 유강후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유강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잠깐 머뭇거리더니 한참 후에야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엄청 작았어. 내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거 같았어. 피부도 너무 투명하여 혈관과 장기들이 다 보일 정도였어.”말을 하고 두 사람은 다시 침묵하고 있었다.그 아이는 그들의 영원한 아픔이자 감정의 연결고리로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나쁜 것도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은 장화연을 식탁으로 데리고 가서 포장된 만두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일단 따뜻한 아침 식사라도 하세요. 집사님도 이 가게 만두 좋아하실 거예요.”장화연은 만두를 한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맛있네요. 밀가루 반죽이 잘된 거 같아요. 제가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데요.”온다연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했다.“좋아하실 줄 알고 집사님을 위해 포장해 온 것이니 이거 다 드셔야 해요.”장화연은 먹으면서 말했다.“사모님,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미리 말해주면 제가 준비할게요. 근데 아직 배달되지 않은 음식 재료들이 있어서 만들 수 없는 요리도 있을 거예요.”“오늘 금방 집에 도착하여 다들 피곤하실 테니 먼저 쉬세요. 쉬고 오후에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봐도 돼요. 제 기억으로 은행 반점의 생선찜이 맛있었는데 그 가게 요리사를 집으로 부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니 집사님은 오늘 푹 쉬세요. 제가 다 안배할게요.”장화연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냥 제가 안배할게요. 사모님 거동도 불편하실 텐데 많이 쉬셔야죠.”온다연은 배를 만지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너무 많이 잤어요. 비행기에서 오는 내내 잠만 자서. 지금은 상태가 엄청 좋아요. 집사님은 여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일단 아침 드시고 나면 들어가서 좀 쉬어요. 집에 부족한 음식 재료들이 있는지 제가 한번 보고 사람 시켜 사 오라 하면 돼요.”그때 유강후가 들어오더니 온다연과 장화연이 사이좋게 얘기 나누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점심은 다 준비됐어?”온다연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저 먹을 줄만 알지? 오늘 점심은 하지 않고 모두 쉬는 거로 하고 다 쉬고 나서 은행 반점의 요리사를 불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게 할 거예요. 그 가게 생선찜도 엄청 맛있어요.”“왜요? 내가 주인 노릇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되지. 마누라가 말한 건 다 맞는 말이지. 이 집에서는 네 마음대
수건도 너무 오래되어 이미 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온다연은 자기가 떠나기 전에 사용했던 것임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아줌마는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사모님이 떠나신 후 대표님은 우리가 이 물건들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신국에 가기 전 대표님은 3년 동안 계속 이 물건들을 사용하셨어요. 그때 사모님이 쓰시던 수건 두 장도 3년 동안 쓰셔서 정말 더는 쓸 수 없을 정도예요. 저희는 감히 버리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될지 말만 해주세요.”이 물건들을 3년 동안이나 계속 사용했다고?온다연은 코끝이 찡해나며 눈물이 나오려 하자 급히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보는 척했다.“이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소독한 후 박스에 넣어 밀봉하여 다락방에 올려놓아 주세요. 바꿀 물건들은 제가 챙길 테니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네, 사모님.”아줌마가 간 후 온다연은 다시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수건이든 컵이든 전부 전에 그녀가 사용했던 것이었고 욕조 옆에 놓인 빈 바디워시병조차도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온다연은 아직도 그 병을 기억하고 있었다.그것은 전에 온다연이 인터넷에서 구매한 상큼한 향의 바디워시였다.온다연은 그 바디워시병을 코끝에 대고 향기를 맡아보더니 역시 그 향기가 틀림없었다.그녀는 욕실에 잠깐 머무르다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서 직접 홍차를 끓였다.아줌마가 주방으로 들어오면서 곰돌이의 얼굴이 그려진 물컵을 건네주었는데 위에 페인트는 반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것을 본 온다연이 어리둥절해하자 아줌마가 재빨리 말했다.“이 컵은 대표님이 제일 아끼시는 컵이에요. 지금 3년째 쓰고 계시고 바꾸지도 못하게 해요.”온다연은 다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결국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 컵은 이제 사용할 수 없어요. 욕실에 있던 물건이랑 함께 소독하여 넣고 다른 컵을 가지고 오세요.”아줌마는 대답을 건네고 다시 돌아갔다.차를 다 끓인 후 온다연은 찻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찻잔을 책상 위에 놓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