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손이 온다연의 얼굴을 쓰다듬기 전까지,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그 손을 잡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하니!”그런데 바로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주한일 수 있겠는가.이 사람은 유강후이다.온다연은 순간 놀라서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강후의 손을 떼고 몸을 뒤로 움츠렸다.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아… 아저씨…”유강후는 온다연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온다연의 눈물이 유강후를 마음 약해지게 한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그녀의 당황하고 초점 잃은 눈빛을 보고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입술을 맞췄다.유강후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다시는 그런 억울한 일 없게 해줄게.”온다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표정도 없었다. 그저 유강후에게 자신을 맡겼다.유강후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온다연을 놓아주고, 선홍빛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구월이 있잖아. 왜 아직도 하니를 찾아.”하니라는 두 글자를 들은 온다연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유강후의 옷을 움켜쥐었다. 기대고 싶은 마음에 다급하게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유강후의 몸에 기댈 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불렀다.“하니.”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유강후는 잘 들렸다. 마치 벌을 주는 듯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렸다.“난 그 하니가 아니거든. 구월이도 있으니까, 하니 좀 그만 찾아.”온다연은 대답하고 유강후의 어깨에 기대어 몸을 비비었다. 그리고 머리를 유강후의 팔 안으로 파묻고, 또 소리 없이 조용히 말했다.“하니.”유강후는 온다연이 이렇게 자신에게 기대는 것을 즐겼고, 아예 그녀를 자신의 다리에 앉아 품에 안겼다.온다연은 손을 유강후의 목을 감싸고 그를 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온다연이 유강후의 다정하고 사랑하는 연인 같았다.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온다연이 움직이더니 머리를 들고 유강후의 옷을 만지작거렸다.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화장실 가고
온다연은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손을 만지작거리며 이어 말했다.“아저씨.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바로 옆에 있어야 해요.”잠시 후. 온다연은 볼 일 다 보고 스스로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이날 땀을 많이 흘려서 온다연은 자기 머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온몸이 쉰내가 나는 것 같아 생각하다가 옆에 있는 욕실로 더듬어 갔다.막 두 걸음 가는데, 꽃병 같은 것에 부딪혀서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만지려고 했다.그때, 문이 열리고 유강후가 들어왔다. 온다연이 주저앉아 깨진 꽃병을 만지고 있는 걸 보았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끌어올렸다.“왜 나 안 불렀어.”온다연은 깨진 유리 조각에 찔려 얼른 손을 뒤로 숨겼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아저씨. 저 이런 모습 보기 귀찮죠? 하찮고.”온다연은 어려서부터 조금만 잘못해도 온갖 미움을 받고 심하면 매를 맞기도 했었다. 이번에 꽃병을 깨뜨리자 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온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꽃병을 깨뜨려서 벌을 줄 거예요?”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잡고 보기 시작했다. 작고 하얀 손에 작은 상처가 났고, 피가 줄줄 흘렀다.유강후는 손을 입술에 대고 뽀뽀를 하며 물었다.“아파?”온다연은 황급히 손을 움츠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더러워요. 입에 대지 마요.”유강후는 강제로 온다연의 손을 다시 끌어당겨 핏물을 빨았다.“온다연. 앞으로 꽃병 하나 깨뜨려서 이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너만 좋다면 이 병원을 팔아도 돼.”온다연은 멈칫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벌은… 안 줘요?”온다연의 소심하고 두려운 모습이 유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유강후가 말하려 하자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더 받는 줄 알았어요…”온다연은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하령 그들은 잘못
“아저씨. 화났어요?”온다연이 잡고 있던 손을 떼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몇 년 전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온다연은 유강후가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두려웠다.온다연은 보이지 않았고, 유강후가 이때 온다연을 버리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했는지도 모른다.온다연은 창백해서 입술까지 파르르 떨렸다.“아저씨. 제 눈이 좋아질 때까지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그렇다고 해서 유강후가 간다고 해서 온다연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잘못했는데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유하령은 유씨 가문의 아가씨로 모두의 보살핌을 받는 공주인데 당연히 잘못을 저질렀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그날처럼 유하령이 온다연의 고양이 다리를 부러뜨려도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하령을 내보냈다.만약 온다연이 그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인지 모른다.온다연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유하령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유강후가 자기를 버리고 갈 것으로 생각하는 찰나, 유강후가 온다연을 안고 침대로 돌아갔다.또 반창고를 찾아 유리에 찔린 온다연의 손가락에 붙였다.반창고를 붙이면서 침착하게 얘기했다.“온다연. 그 누구든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해. 유하령도 마찬가지야.”유강후는 진지하게 얘기했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비록 유강후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온다연은 지금 유강후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차갑고 침착했을 것이다.유강후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침착하고 점잖고, 말하기 전에 심사숙고하고 내뱉는다. 유씨 가문에 십 년간 있었는데 온다연도 잘 안다.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유강후의 옷을 잡고 머리를 어깨에 기댔다.유강후에게 많이 의지하는 모양이다.유강후도 확실히 온다연의 이런 모습을 좋아한다. 착하고, 온순하고,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샤워하고 싶어요.”온다연은 자기가 냄새에 찌들어있는 것만 같았는데, 유강후
하지만 온다연은 예전처럼 버티지 못하고 손을 떼고 더듬더듬 단추를 움켜쥐었다.온다연은 환자복을 입지 않고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재질도 엄청 좋고, 단추마저 진주로 만들었다.진주를 쥐고 있는 온다연의 손가락은 사랑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약간 매력적이기까지 했다.의도적인지 모르게 눈을 감고 하나씩 천천히 단추를 풀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움직임에 따라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온다연이 유강후 앞에서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움직였다. 동작은 매우 서툴지만, 아무 느낌 있었다.마지막 단추가 풀리고 하늘색 잠옷이 땅에 떨어졌다.그리고 옅은 파란색의 작은 나시를 입고 있었다. 온다연은 몸을 떨며 자신을 둘러싸고,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아저씨. 저 추워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유강후는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을 맞추었다. 손은 온다연의 허리를 감싸고 힘껏 끌어안았다.유강후는 목소리가 심하게 쉬었다.“온다연. 네가 지금 나를 꼬셔?”온다연과 유강후 사이에 옷이 있었지만 온다연은 유강후의 생리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온다연은 유강후처럼 차가운 사람이 이렇게 쉽게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분명히 온다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온다연이 유강휴를 꼬셨다고 말했다.유강후같은 신분이면 손가락만 까닥해도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다.그런데 왜 온다연을 붙잡고 놓지 않는가?하지만 이번이 온다연에게 마지막 유일한 기회인 것 같았다.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천천히 유강후의 옷으로 들어갔다.부드럽고 여린 손이 유강후의 몸에 대자 유강후는 거칠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다연아. 일부러 이러는 거지!”온다연의 이런 생소한 모습이 유강후를 미치게 만든다. 최고의 집중력으로 자제해야만 온다연의 몸에 손을 대는 걸 참을 수 있다.온다연은 사실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온다연은 떨면서 유강후의 마른 허리를 감싸며 손을 내밀었다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고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만졌다.“아무도 내 사람을 괴롭힐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널 돕는 게 아니야. 알았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깔았다.당연히 알고 있었다. 유강후가 아직 온다연에게 관심이 있어서 당연히 누군가가 온다연을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유강후가 온다연에게 관심이 사라진다면 하루코와 같은 결말이다.유강후는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람에게 관심을 준다.모든 것은 유강후의 기분에 달려 있다.유씨 가문에 있는 요 몇 년 동안, 온다연은 너무나도 많은 걸 보고 경험했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주먹을 꽉 쥐었다.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반드시 나은별과 결혼하기 전에 유강후를 가져야 한다.온다연은 힘을 너무 많이 들였는지 입술이 파래졌다. 유강후는 그걸 보고 온다연의 입술을 만졌다.“말했잖아. 입술 깨물지 말라고.”유강후는 온다연의 입술을 벌리고 입술 안에 새빨간 혀가 살짝 드러나면서 유혹적이었다.유강후는 한 눈 보았을 뿐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온다연이 시도 때도 없이 유강후를 꼬시고 있다.그녀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바로 온다연과 뜨밤을 보냈을 거다.유강후는 온다연이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언제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입술을 깨물었다.입술이 혀를 휘감고, 온다연의 입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온다연을 삼킬 것만 같았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주는 걸 느꼈다.그녀는 긴장해서 몸을 떨고 있었지만, 손은 그의 목을 조르고, 유강후에게 바짝 달라붙었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토끼를 잡았다.온다연은 몸집이 작고 전체적으로 앙증맞아 보이지만 몸매는 아주 훌륭하다.온다연의 몸매에 유강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분위기도 다시 달아올랐다. 온다연을 자기 몸에 올려놓은 탓에 온다연 전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유강후의 손은 온다연의 허리를 따라 점점
유강후는 헤어드라이어를 가지고 와서 천천히 온다연의 머리를 말려주었다.온다연의 머리카락은 검고 윤기가 났다. 머릿결이 좋아서 손가락은 매끄럽게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다녔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다만, 온다연의 귀 뒤쪽, 작게 뜯긴 곳을 말려줄 때 유강후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유강후는 손가락으로 그곳의 피부를 살짝 눌러 보았다.온다연은 그의 손길이 간지러워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아저씨, 간지러워요. 아직 안 됐어요?”유강후는 냉랭하게 대답했다.“아직 덜 말랐어. 머리가 젖은 채 잠들면 두통이 올 수 있어.”온다연은 작은 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고는 손을 담요에서 꺼내 몰래 유강후의 소매를 감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귀 끝을 살짝 붉히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아저씨...”유강후는 헤어드라이어를 거두고는 온다연을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힌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할 말 있어? 한 글자라도 함부로 말했다가는 혼날 각오해.”온다연의 귀 끝은 더욱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기 조금만... 조금만 자제해 주시면 안 돼요...”시간이 너무 길었다. 매번 온다연이 손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수줍어하면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일부러 물었다.“뭘 자제해?”온다연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하필 아무것도 안 보였고 얼굴을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지도 몰라 그저 머리를 유강후의 가슴에 대고 뽀얀 손을 주물럭거리다가 한참 후에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조금 전과 같은 시간을 살짝 자제해 주세요...”유강후의 눈 밑에는 일말의 웃음기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방금과 같은 시간이 뭔데? 제대로 얘기해 줘야지.”온다연의 귀 끝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이
온다연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빨개졌다. 손바닥에도 땀이 가득 고였다.새로운 인식이고 뭐고 감히 말할 수 없었지만, 온다연은 그저 지금 유강후가 하는 행동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예전에 그의 행동이 아무리 지나쳐도 다 은밀한 공간에서 했었기에 그녀는 그나마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큰 병실에 있는 데다가 가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 들어오곤 했다. 이렇게 대놓고 막 나가는 유강후 때문에 온다연은 초조하고 화가 났지만,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초조함 때문에 흘린 땀은 그녀 이마의 자잘한 머리카락을 흠뻑 젖혔다.한편, 온다연은 손을 빼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유강후가 꽉 잡고 있어서 결국 실패했다. 다른 한편, 그녀는 갑자기 사람이 들이닥칠까 봐 겁이 나서,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고 간절하게 부탁했다.“사람,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어요... 아저씨, 하지 마세요...”유강후는 온다연이 확실히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 또 그녀의 손에 땀이 가득 찬 것을 보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유강후도 사실 이곳에서 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녀의 이런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는 그 사람의 눈동자를 떼버릴지도 모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다시 침대 위에 올려놓고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머리카락을 넘길 때 몇 가닥의 머릿결을 건드려 은은한 장미 향이 풍겼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뽀뽀하고는 여전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이 샴푸는 집에서 키운 백장미의 원액을 추출해서 만든 거야. 어때, 맘에 들어?”백장미 얘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몸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눈을 드리운 채, 촘촘한 눈초리를 가볍게 떨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겨울에도 백장미가 있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일년내내 백장미를 키울 수 있는 온실을 하나 만들었어. 네가 좋아한다니 다행이야.”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초점 없는 눈길
유강후는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이 사건 진술은 무조건 해야 하는 거야. 오늘 안 한다 해도 내일에 해야 하는 거라 어쩔 수 없어.”온다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그녀는 경찰서에 가서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전에 경찰서에 가서 진술을 두 번 했었는데 한 번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고 다른 한 번은 주한의 죽음 때문이었다.온다연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죽음을 모두 목격하였는데 하필 두 사람의 사인도 똑같았다. 안 그래도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그녀는 경찰관의 핍박 하에 그들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진술해야 했었다.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더군다나 상처를 다시 한번 들추어내어 꼭두각시처럼 가장 중요한 사람의 죽음을 진술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그녀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또 진술을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다연은 기나긴 침묵에 빠졌다.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온다연의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그녀를 재워보기도 했다.유강후는 원래 과묵한 사람이었고 냉철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사람이었다.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에서, 줄곧 다른 사람이 유강후에게 애원하고 그를 달래주었다. 유강후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의 눈앞에 가져다 바쳤다. 지금처럼 유강후가 인내심을 갖고 한 사람 곁을 지키는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 난생처음이었다.또한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한 번이기도 했다.게다가, 유강후가 볼 때, 한 사람 곁을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비록 온다연은 진술이 그토록 싫었지만, 저녁이 되어서 전서후는 여전히 찾아왔다.경찰복을 입은 전서후는 동료 두 명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휴게실의 의자에 앉아 느리지만 엄숙한 말투로 진술을 땄다. 마치 맞은 쪽에 앉아 있는 여자애의 반응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해온 듯했다.온다연은 거의 절반 동안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