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심고하의 손을 끌었다.“소문이 엄청난 것 같아. 임민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까?”하지만 포스터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두 사람은 실망한 채 자리를 떴다.온다연의 사무실로 가봤지만 자리에 있던 건 임민수뿐이었다.그를 보자 다희는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임수 오빠, 여기서 뭐 해요?”임민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온 교수님이 휴가를 내셔서 이것 좀 전해주러 왔어.”그는 편지봉투를 건넸고 다희는 그것을 받아 열어보았다.봉투 안에는 현금과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고 다희는 단번에 상황을 이해하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또 여행 가는 거였네요. 정말 너무해요. 지금 단오도 떠나고 온가희도 가고 엄마, 아빠는 매일 집을 비우고... 그 집엔 따뜻한 정이라는 게 전혀 없어요. 나는 그냥 쓸모없는 존재 같아요. 그런데 사실 엄마, 아빠가 집에 있어도 난 똑같이 쓸모없는 존재예요. 두 사람은 매일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며칠 전부터 엄마는 갑자기 역사에 관심을 보이더니 아빠는 엄마를 위해 묘지를 하나 사주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쯤이면 이 두 사람은 이집트로 날아갔을지도 몰라요. 아마도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해요.”임민수는 미소 지으며 다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부모님이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잖아. 왜 그런 걸로 불평을 해?”다희는 입술을 내밀며 툴툴거렸다.“엄마, 아빠는 진짜 사랑이에요. 저는 그저 그 사랑 속에 끼어 있는 장난감 같은 존재일 뿐이에요.”임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화내지 마. 맛있는 거 사줄게. 나가자.”세 사람은 곧 사무실을 나섰고 그 모습은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임민수는 다희보다 다섯 살 많았지만 말투와 행동이 차분하고 예술가적인 분위기가 있어 깨끗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다희와 심고하 역시 눈에 띄게 뛰어난 외모를 지녔는데 특히 다희는 작고 예쁜 얼굴 덕분에 쉽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그녀는 온다
“혈연관계도 없는데 뭐가 어때? 같은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 부대끼고 살면 더 정이 붙을 텐데.”“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계 같던 단오가 가희 언니 일에만 감정 기복이 크고, 언니 때문에 싸움도 했는데 넌 정말 눈치 못 챘어?”심고하의 말에 일리가 있어 다희는 반박조차 못 했다.그동안 가희만 엮였다 하면 포커페이스 단오가 폭주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해성대에 초대 강사로 초대받아 경제학 강연을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단오는 글로벌 탑3에 드는 경제학 교수였고 설립한 회사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귀찮은 건 질색인 편이라 학생들을 따로 챙기는 일은 절대 없었고 다희의 연락을 받아도 겨우 몇 글자만 대답하고 통화를 끊기 일수였다.그래서 다희는 같은 쌍둥이인 두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다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두 사람이 평생 사용할 언어량이 존재한다면 다희가 단오의 몫까지 가져간 건 아닌가 싶었다.그런데 해성대에 가서 강연을 했다니. 게다가 주 1회 강연은 정말 말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거의 손을 떼고 대부분 일을 단호에게 넘겼고, 단오가 스스로 관리해야 할 회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무료 강연을 해성대까지 가서 한다는 건 정말 가희 때문인 것 같았다.다희는 넘쳐나는 정보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또 갑자기 다른 누군가가 떠올랐다.다희와 어릴 때부터 함께였던, 그리고 10년 넘게 오빠라고 불렀던 그 사람. 다희는 양우림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비록 이 감정이 가족 사이에 정상적으로 생길 수 있는 감정인지, 아니면 정말 남녀 사이의 좋아하는 감정인지 제대로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이성적으로 이게 정상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자꾸 양우림을 떠올리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희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던 양우림이 자꾸 보고 싶었다.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양우림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건, 바로 3년 전 양우림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던
3년 뒤 경화대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다희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인 임민수를 만나게 되었다.다희는 임민수의 연주를 참 좋아했고 그동안 모든 공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1년 전엔 온다연의 인맥을 통해 임민수를 만나게 되고 둘은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임민수는 다희보다 5살이 많았고 음악적 재능이 넘쳐났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음악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공교롭게도 이번 학기부터는 다희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다.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다희는 친구 심고하를 끌고 온다연의 사무실로 향했는데 내내 입이 귀에 걸렸다.“고하야, 우리 드디어 지긋지긋한 고3 수험생에서 벗어난 거야. 난 가족들과 의논해서 기숙사에서 지내려고 하는데, 넌 부모님과 상의했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내가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는 건 위험하다고 엄마 친구 딸이랑 같이 지내라고 하네?”쉬지 않고 말하던 다희는 걸음을 뚝 멈추고 심고하를 바라봤다.“설마 엄마 친구 딸이 넌 아니지?”심고하는 심별하의 동생이자 심씨 가문의 둘째 딸이었다. 다희, 단오, 가희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컸던 각별한 사이라, 심고하와 함께라면 온다연과 유강후가 기숙사 생활을 허락할 법도 했다.그러나 다희의 질문에 심고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걸 지금 눈치챈 거야? 어젯밤, 너희 엄마랑 우리 엄마랑 거의 3시간 동안 통화했어.”“3시간 내내 우리 걱정만 하더라. 참 나, 우리가 뭐 애인가?”“오늘 아침부터 기숙사 청소해 줄 사람 구하고 필요한 물건 채워주겠다고 아주 난리였어. 간식만 수북이 담은 상자도 있다니까? 학교 규정이 없었다면 아예 우리 집 가구까지 옮겼을 거야.”“게다가 기숙사 조교님들 드릴 선물까지 준비했더라. 우리 잘 좀 챙겨달라고.”“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데 대체 왜 그렇게 걱정하시는 거지?”심고하는 아담한 키에 흰 피부, 동그란 두 눈을 가졌고 분위기 여신이었다. 하지만 다들 모르는 점이 하나 있다면 심고하는
집사는 의아해하며 앞으로 다가왔고 마침 양우림이 병풍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양우림의 뒤로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 함께 등장했고 여자는 같은 여자가 보아도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 보아도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다희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양우림은 다희에게 설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희는 갑자기 몸을 돌려 허겁지겁 시야에서 벗어났다.다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양우림과 시선조차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양우림은 모든 걸 눈치채고 다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계단까지 달려온 다희는 자신의 뒤를 쫓은 양우림을 발견하고, 몸을 휙 돌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꽥 소리 질렀다.“따라오지 마!”눈물 흘리는 다희에 양우림은 가슴이 찢겼고 얼른 품에 안고 달래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웠던 다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오는 양우림에, 아예 계단에서 뛰어내렸다.“다희야!”양우림은 질겁하며 손을 뻗었으나 옷깃조차 닿지 못했다. 다행히 계단은 그리 높지 않았고, 다희는 1층 바닥에서 살짝 넘어졌다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도망을 갔다.마치 양우림이 역병이라도 된 듯 기어코 그의 옆에서 도망가려 했다.양우림은 눈에 뵈는 게 없이 다희의 뒤를 쫓았고, 뒤쫓아 아래층까지 내려오자 유강후가 양우림을 붙잡았다.“체통 없게 뛰긴 왜 뛰어. 밖에 기다리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데, 얼른 가서 인사 전하지 않고 여기에 숨어 뭘 하는 거야?”유강후는 다희가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지만 온다연은 사건의 전말을 모두 목격했다.그리고 무슨 상황인지 대충 눈치를 챘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우림을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는 이 자리의 주인공이니 얼른 손님 맞이하러 가렴. 내가 다희한테 가볼게.”양우림은 다희가 모습을 감춘 곳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회장을 찾은 손님이 거의 빠져나갈 때까지도 양우림은 다시 다희를 만나지 못했다.사실 몇 번이고 다
다희는 연주를 마치고 고개를 돌려 양우림을 바라봤다.“널 위해 준비했어. 마음에 들어?”양우림은 다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럼 다희야, 혹시 ‘사랑의 결혼식’이라는 곡 다시 연주해 줄 수 있어?”“어려울 건 없지.”다희의 예쁜 손가락이 다시 건반 위를 가로지르고 방안에는 로맨틱한 선율이 감돌았다.연주가 끝나고 양우림이 다희를 안아 건반 위로 올렸다. 그리고 이마와 이마를 맞닿은 상태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넌 대체 언제면 다 클까?”다희는 양우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가까워진 거리에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쿵쿵거리고 있었고, 점점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고 손바닥도 축축해졌으며 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라 했다.어색해진 분위기에 다희는 양우림을 밀어내고 서재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양우림에게 건넸다. 양우림은 바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액세서리 세트와 넥타이가 들어있었다.“이것도 선물인데 내가 직접 만든 거야.”“내가 여사님한테 몇 달 동안 수업 들으면서 직접 만든 거야. 커프스랑 타이핀, 전부 내가 손으로 만든 거고... 넥타이도 내가 디자인해서 직접 만든 거야. 마음에 들어?”액세서리 디자인은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회청색 계열의 보석은 무게감 있으면서도 탁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은은하게 맑은 느낌을 풍겼다. 무채색 위주로 차려입는 양우림의 평소 스타일과도 잘 어울렸다.넥타이 역시 같은 컬러톤으로 맞춰져 있었고, 회청빛 원단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박힌 같은 계열의 미세한 보석들이 전반적으로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디테일에선 은근한 화려함이 묻어났다. 다희는 온다연의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았다.이 넥타이와 액세서리 세트는 디자이너 못지않은 완성도였고, 무엇보다 이건 다희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든 것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디자인부터 보석 고르기, 샘플, 마감까지 전부 다희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한
온다연은 유강후가 하루하루 커가는 자식을 보며 아쉬워하는 마음을 이해했고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이들이 나이가 몇이든, 우리의 자식이라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그리고 딸들은 나이가 들어도 애교가 많다던데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자식은 우리 인생의 조미료 같은 존재일 뿐이야. 난 너만 있으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유강후의 볼에 뽀뽀하고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돈해 줬다.“오늘 우림이가 주인공이라 하지만, 제일 정신 차려야 하는 사람은 여전히 아저씨라는 걸 알고 있죠? 여기 오는 대부분 사람이 아저씨와 강씨 가문을 노리고 온 거니까 조심해요. 그리고 우림이를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줘요.”유강후도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키스했다.“나도 잘 알고 있어.”온다연은 왠지 벅찬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우림이를 처음 만났을 때 고작 6개월 된 핏덩이였는데, 고작 몇 해가 지났다고 양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다니요...”“아저씨, 우림이 친부모를 아직도 못 찾았는데 혹시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햇수로만 20년 동안 찾았는데 전혀 소식이 없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해 친모는 약물 중독이고, 양준구는 우림이를 살리겠다고...”유강후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다연아, 넌 우리 다희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 같아?”온다연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에 한참 멍하니 생각하다가 말했다.“우리 다희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너무 이르지 않아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우리도 홀로 가자.”이 연회는 그야말로 호화롭고 성대했다. 참석한 이들은 하나같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물들이었고, 최상급 슈퍼카들이 줄지어 들어섰으며, 헬리패드 역시 수많은 헬리콥터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이번 연회는 강씨 가문, 진씨 가문, 그리고 양씨 가문이 손을 맞잡고 양우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