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의 여지를 주지 않은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감당할 수 없는 직전까지 몰아붙였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늦었다. 유강후는 가는 길에 잠든 온다연을 침실까지 안아갔다.그녀는 아주 고된 밤을 보냈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열부터 끓어올랐다. 유강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주성원은 별다른 말 없이 해열제를 처방했다. 그 외에 보탠 것이라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아침이 되니 열이 내렸다. 그러나 아프고 일어난 온다연은 축 처져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오후까지 자고 나서야 무기력감이 조금 가셨다.유강후는 이 시간에 보통 집에 없었다. 온다연은 그가 거뒀던 물건이 떠올라서 슬금슬금 서재에 가서 한참 어슬렁거렸다.‘대체 금고는 어디에 있는 거야?’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는 슬슬 집 구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금고는 찾아내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중요한 물건이 금고에 있다. 찾기 어렵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구석구석 샅샅이 뒤졌는데도 금고는 끝내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닌 온다연은 장화연을 찾아가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유강후의 취미나 습관 같은 것을 말이다. 그의 습관만 알아도 금고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었다.장화연은 냉랭한 얼굴로 묻는 것만 대답했다. 유용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다연은 급한 마음을 티 내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후 5시쯤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창가에 서서 눈을 구경했다.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니트 세트를 입고 있었다. 크림색은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썹도 유난히 돋보였다.기온은 하루가 멀다 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몸이 약했기에 장화연이 미리 집안 온도를 높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케이프를 걸쳐줬다.부드러운 양털 케이프는 한눈에 봐도 비쌌다. 그만큼 따듯
온다연은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나갔다. 유민준의 차는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그는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버린 담배꽁초만 봐도 한참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유민준은 얼굴만 유강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취향도 닮았다. 온다연이 이런 착장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눈빛에는 빠르게 빛이 돌았다.“다연아, 난 네가 나올 줄 알았어.”온다연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거리를 유지했다.“무슨 일로 왔어요?”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유민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리감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났다. 그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소유욕과 패배감이 샘솟았던 그는 다소 충동적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했다.“밖에 추워. 차에서 말하자.”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됐어요. 여기서 얘기해요. 오빠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오해할 소지를 만들면 안 된다고, 아저씨가 그랬어요.”나른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유민준은 대문을 지키는 장화연을 힐끗 봤다. 답답하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네 이모를 만나고 왔어. 아이를 잃고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아.”온다연은 심장이 아프면서 답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오빠한테는 좋은 일이겠어요.”“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네 이모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크게 관심도 없어. 그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나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아. 그 아이는 평생 서자로 살 수밖에 없어. 내가 손을 쓸 가치는 없다는 말이야.”익숙한 말이다. 얼마 전 유강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유씨 가문은 출신을 많이 따진다. 온다연도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유씨 집안사람다운 말이네요.”“다연아, 그러지 마. 내가 전에 기분 나쁘게 했던 일은 전부 보상할게. 나 별장도 사놨어. 이제 가구만 들이면 되니까 네가
마음이 급해진 유민준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난 할 만큼 했어. 벌써 며칠째 효진이 연락을 씹고 있다고. 내가 뭘 더 해야 할까?”말을 마친 그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보여줬다.“이거 봐. 전화 한 통 받지 않았어.”온다연은 마지못해 보는 척 시선을 돌려서 전화번호를 빠르게 외웠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유민준은 속으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다연아, 난 걔한테 전혀 관심 없어. 내 마음속에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내. 작은아버지가 약혼하면 그 핑계로 나랑 같이 나가서 살자.”온다연은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아저씨 언제 약혼해요?”빨리 자신과 함께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유민준은 헤벌쭉해서 대답했다.“몇 달 안 지나서 약혼할 거야. 집안에서 벌써 상견례 준비를 시작했거든. 작은아버지 약혼은 나랑 달리 엄청 화려할 거야. 유명한 사람도 초대할 거라고 들었어.”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그러고 보니 작은아버지 지금 나은별 씨랑 같이 영운산에 있을걸? 나은별 씨한테 별장을 사준대. 별 볼 수 있게 천장 뚫린 그런 거 있잖아. 몸이 안 좋은 나은별 씨가 지내기는 딱 좋지. 장 집사만 입 다물면 작은아버지는 내가 온 줄도 모를 거야.”온다연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나은별 씨한테 참 잘해주네요.”유민준은 그녀가 부러워하는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천장 뚫린 집이 뭐라고. 갖고 싶으면 내가 얼마든지 사줄게.”“아뇨. 그냥 아저씨가 나은별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아무래도 그렇겠지? 오랜 친구인 데다가 출신이 훌륭하잖아. 두 사람은 그냥 결혼할 운명인 것 같아. 나은별 씨한테 약간 문제가 생겼던 것만 아니었어도 애까지 낳고 살았을걸?”온다연은 침묵에 잠겼다.그새로 눈은 더욱 크게 내렸다. 차가워진 손과 함께 마음도 너무 시렸다.“좋네요... 소진수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은데, 셋이 친구인 거예
온다연은 말없이 손을 빼냈다.“오빠 이만 돌아가요. 그리고 요즘은 찾아오지 마요. 아저씨가 보면 기분 나빠 할 거예요. 오빠한테 안 좋아요.”유민준은 아쉬운 듯 또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역시 날 걱정하는 건 너밖에 없어. 안 그래도 작은아버지가 투자를 전부 빼갔어. 근데 괜찮을 거야. 남도 아닌 친조카한테 모질어 봤자 1년 못 넘겨. 내가 일 처리를 끝내고 금방 데리러 올게.”온다연은 유민준의 손을 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집에 들어간 온다연은 손부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유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먼저 전화를 건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연결되었고, 늘 그랬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 있어?”온다연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저녁에 아저씨가 좋아하는 반찬을 했어요. 돌아와서 먹을 수 있어요?”“안 돼. 할 일 있어.”“...그럼 남겨줄까요?”“됐어. 나 저녁에 못 들어가. 너 혼자 밥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어. 잠이 안 오면 나한테 전화하고.”온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밖에 눈이 엄청 내려요. 유리 지붕 집에서 눈 구경하면 예쁠 것 같아요.”유강후는 진짜 바쁜 듯 황급히 대답했다.“눈 보고 싶으면 내일 온천 호텔에 가자. 오늘은 안 돼.”이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강후 취향 죽이네. 여기 시야 제대로야. 마음에 드는 애 끌어안고 있으면 장난 아니겠어.”“야, 빨리 전화 꺼. 은별이 위에서 기다리잖아. 이러다 술이 다 깨겠어.”온다연은 핸드폰을 꽉 잡았다.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났다.유강후가 몇 마디 더 당부했지만,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는 꽃방으로 걸어갔다.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잠시 그림에 집중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꽃방은 아주 따듯했다. 그런데도 창가에서 눈을 구경하려면 약간 쌀쌀했
탁 소리와 함께 온다연의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이 시간에 남자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야. 강후가 드디어 결혼한다는데 좀 도와줘야지.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전해줄게. 급한 일이 아니면 그냥 참고. 방해하는 건 아니다.”남자는 술을 적지 않게 마신 모양이다. 그는 ‘유하령’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가득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남자의 목소리는 화살이 되어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단단히 상처받은 그녀는 핸드폰을 주워들 힘도 없었다.그대로 한참이나 얼빠져 있던 그녀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이때 핸드폰이 마침 울리기 시작했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전화 안 받으면, 우리 일 유강후한테 전부 말한다고 했지.”온다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은 덜덜 떨렸다.“눈 구경하고 싶어요. 지금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상대는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이건 데이트 신청인가?”온다연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준 채 되물었다.“맞다면요?”“나 이제 유하령 남자친구 아니야? 전에 유하령의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우리 결혼도 할 사인데?”“그래서 올 거예요? 말 거예요?”염지훈은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지. 나야 갈 수 있는데, 유강후가 널 내보내겠어?”“그건 신경 쓰지 마요. 올 수 있는지만 대답하면 돼요.”“쯧, 좋아. 내가 무슨 수로 널 이기겠어. 30분 후 도착이야.”대답을 들은 온다연은 전화를 끊고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직접 가져온 가방을 뒤져 봤다. 다행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전에 지내던 집 열쇠까지 있는 걸 보면 말이다.간단하게 정리한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그것도 견딜 수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유강후와 나은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
차 안에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다. 추운 곳에서 따듯한 곳에 들어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우유를 건네줬다.“뜨거운 거야.”그녀가 우유를 받아서 들기 바쁘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왜 이 시간에 줄까지 서서 우유를 산다고 했어.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뒷좌석에는 한눈에 봐도 화려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새빨간 입술을 제외하고는 염지훈과 아주 비슷한 인상의 여자였다.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여자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귀여워! 볼도 탱글탱글해!”온다연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피했다. 우유도 자칫 떨어뜨릴 뻔했다.여자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 더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염지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염지훈이 정말 힘을 줬는지, 염지현은 아프다고 아우성쳤다.“아파! 아파! 이거 놔! 염지훈, 누나한테 이러기야?”“내 차에서 내려.”염지현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말했다.“앞에 사거리에서 내려줘. 그러면 알아서 돌아갈게.”“안 돼. 당장 내려. 그러게 누가 애 볼을 꼬집으래?”염지현은 조수석 의자를 툭툭 치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이름이 다연이라고 했죠? 이 자식 3일 밤을 새웠어요. 어디 나무에 들이받지 않게 조수석 역할 잘해요.”온다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불편하면... 그냥 저 혼자 갈게요.”염지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염지현은 재빨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어휴, 험한 말 하지 마. 네가 떠나면 난 오빠한테 죽었어. 저 자식이 다 꼰질러 버릴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았다. 염지훈은 빠르게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얇은 외투 한 장만 걸친 염지현을 바라봤다.“저 사람 지훈 씨 누나예요?”“응.”“이 시간에 혼자 길거리에서 위험하지 않을까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위험
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염지훈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말을 길게 늘어놓기 불편했다. 그녀는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밤에 마시면 살찔까 봐서요.”“뭐? 얼굴이 내 손바닥보다도 작으면서, 유강후 씨 참 사람 보살필 줄 모르네. 나였으면 적어도 70kg은 만들었을 거야.”“70kg요? 그러면 저 정방형 되는 거 아니에요?”“하하, 건강하면 됐지.”염지훈은 우유를 빼앗아 들더니 직접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한 입만 마셔봐. 달콤해서 맛있을 거야.”온다연은 속는 셈 치고 조금만 마셔봤다. 그러고는 금방 눈을 반짝이며 한 모금 더 마셨다. 상상하던 우유 맛과 달리 훨씬 고소하고 달콤했다.이때 염지훈이 컵을 다시 가져가서 온다연이 썼던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괜찮네. 다들 좋아할 만해.”말을 마친 그는 다시 우유를 온다연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서 들지 않았다.그는 불쾌한 듯 말했다.“왜, 내가 입 댄 거라 싫어?”“조금요.”“입 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만약 버리면 너도 같이 버릴 줄 알아.”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빨대를 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그 채로 마셨다.“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우유를 어떻게 버리겠어요.”그녀는 우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홀짝대는 걸 보니, 이런 우유는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염지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 혀끝으로 스쳤다.“이렇게 하면 더 맛있지.”온다연은 귀 끝이 빨개졌다. 그녀는 컵을 꽉 잡으며 말했다.“마시고 싶으면 가져가서 마셔요. 왜 이러는 거예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처음 마셔보는 것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염지훈이 보기에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이런 우유가 처음이긴 해요.”“유강후가 이런 것도 안 먹여? 설마 몸에 안 좋다고?”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컵을 꽉
낯설고도 가벼운 감정이지만, 염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온다연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말이다.이 연약해 보이는 소녀는 재벌가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겪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너 혹시 유씨 집안에서 구박받았어?”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관찰력이 뛰어난 염지훈은 그녀의 작은 몸짓과 표정 변화를 전부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정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유강후는 꽤 잘해주는 것 같던데? 네가 사는 그 집도 아끼는 곳이라며. 평소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어. 널 그곳에 머물게 한 걸 보면 신경 쓴다는 뜻 아닐까?”유강후가 언급되자, 온다연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차 안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고 난방도 빵빵한 데 한기가 느껴져서 몸을 떨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산에 가서 눈을 볼 수 있을까요?”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가방에 신경이 쏠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온다연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마음이 아픈 불쌍함이었다.그는 그녀가 유씨 집안에서 이토록 힘들게 살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괜히 간식을 담은 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편의점에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야. 먹거리랑 손난로는 꼭 챙겨. 필요할 거야.”말을 마친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물었다.“영운산 정상에 별 보이는 지붕이 있는 별장이 있나요?”염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이제 막 지어진 그 집? 아직 공식적으로 판매되지 않았을걸? 하지만 팔리기 시작해도 쉽게 살 수 없을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