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야생성을 띠는 맹수처럼 재빠르게 낡은 골목길로 들어갔다.어두운 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 속에 사람의 비명 소리도 섞여 있었다.차는 여전히 질주하고 있었다. 진영천이 공손한 태도로 마중을 나왔다.“도련님,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련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온다연을 품에 안은 유강후는 진영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수고했어요.”진영천은 그가 품에 안은 온다연에게 눈길을 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도련님을 위해 일하는 건 제겐 영광이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진영천은 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본채와 3개의 별채로 이루어진 전원주택이었다. 비록 유강후의 주택보단 크지 않았지만, 건축물과 인테리어는 더 고풍스러웠고 아름다웠다.빠르게 진영천은 유강후를 다소 어두운 방으로 데리고 왔다.안에는 침향목과 고풍스러운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벽에는 어두운색의 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커튼이 스르륵 열리며 커다란 유리 벽이 나타났다.유리 벽 뒤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그곳엔 각종 기이한 고문 도구가 있었고 파충류 케이지가 벽을 가득 채웠다.온다연은 그 공간을 보았다.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몸이 굳어버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곤 자신의 허벅지에 앉히며 나직하게 물었다.“무서워? 소리라도 들어볼래?”온다연은 그 방을 빤히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유강후의 옷을 꽉 잡고 있었다.“네, 들을래요.”유강후는 문 쪽에 서 있던 사람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했다.“소리 들리게 해요. 너무 높게는 말고요.”그 사람은 아주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도련님.”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방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세 명의 젊은 남자가 갇혀 있었다.온다연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안색도 창백해졌다.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동물이 인간에 대한 반서기도 했다.인간이 동물의 자유를
진영천은 유강후가 품에 안고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조금 전 유강후가 떠나기 전에 힐끗 품에 있던 여자를 보았었다.차갑고, 냉정하고, 인간미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청순하게 생긴 그녀의 외모와 정반대 분위기였다.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순간 자신이 오랜 시간 단련해 온 안목이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온다연은 더는 고열에 시달리지 않았다.그녀는 잠을 자지 않고 그렇게 꽃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먼저 오후에 그리다가 만 그림부터 완성한 뒤 이번엔 동물과 연관된 그림을 그렸다.드넓은 초원 위에 세 마리의 사자가 한 소녀를 쫓고 있는 다소 처참한 상황의 그림이었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세 마리의 사자 머리는 해골이었다. 소녀도 공포에 휩싸인 표정이 아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그저 묵묵히 서재에 쌓아둔 일거리를 꽃방으로 가져와 곁에 있어 주었다.두 사람은 낮처럼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온다연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림 한 장을 유강후 앞에 내밀었다.행여나 자신의 행동으로 일하고 있는 유강후를 방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다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저씨, 업무는 다 마치신 거예요?”유강후는 그림을 들고 내민 그녀의 손을 보았다. 하얀 손에 빨간 물감이 묻어있는 그녀의 손을 본 그는 이상하게도 유혹적인 기분을 느꼈다.그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얼른 손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날이 밝아오고 있어요. 이젠 들어가서 쉬어야죠.”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지만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더는 낮처럼 영혼이 사라진 듯한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왠지 끌리는 목소리기도 했다.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노트북을 닫은 뒤 바로 온다연을 휙 끌어안아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이 그림은 나한테 주려고 그린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보여주었다.“보세요.”청량감이 느껴지는 그림이었
집사가 우유를 들고 꽃방으로 오고 있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문이 꽉 닫히지 않았던지라 벌어진 문틈으로 꽃방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온다연의 몸은 작은 쪽배가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가느다란 목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고통스러워 보였고 파도 같은 그를 감당하기 벅차 보였다.흐느끼는 소리와 애원하는 소리가 섞여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듣는 사람마저 마음 아프게 말이다.집사는 일관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곤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유강후는 자신의 옷으로 온다연을 꽁꽁 감싼 뒤 안아 올려 안방으로 갔다.끝내 끓어오르는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고 심하게 대해버린 것이다.지난번에 방문했었던 의사가 온다연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난번에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조심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왜 또 이런 상태가 된 거죠?”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보았다.“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절제할 줄 알아야죠. 온다연 씨 몸이 이렇게나 허약한데 번마다 과하게 이러시면 매일 통증을 달고 살지 않겠어요?”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앞으론 조심하죠.”이 말을 끝으로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연고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연고를 발라주려 할 때 온다연은 거칠게 반항했다. 아마 다시 그가 두려워진 듯했다.하지만 이번에 유강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를 제압한 뒤 강제로 약을 발라주었다.빨갛게 부어버린 그곳과 온몸 가득한 키스 마크에 유강후는 다소 후회되었다.그러나 그 후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사라지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그녀는 반드시 그에게 적응해야 한다. 그에겐 매일 자신을 피하는 그녀를 기다려줄 인내심이 없으니까.약을 바른 뒤 그는 온다연을 살살 달래며 알약과 우유를 마시게 한 뒤 재웠다. 그는 그제야 안방에서 나와 서재로 왔다.서
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고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나은별 씨 것을 빼앗을 생각해 본 적 없어. 내 목적만 이루면 알아서 떠날 거야.”임혜린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유강후가 널 놓아줄 것 같아?”온다연이 말했다.“응, 놓아줄 거야. 내가 질리면 당연히 버릴 거야. 나은별 씨와 아저씨는 서로 운명의 상대니까 무조건 결혼할 거고.”이 말을 꺼냈을 때 온다연은 가슴이 저리면서 답답해졌다.그녀는 꼭 혼잣말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아저씨는 그냥 내가 재밌으니까, 궁금하니까 호기심 때문에 날 곁에 두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날 버리게 될 거야.”임혜린은 미련이 가득 남은 그녀의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뭐가 어찌 되었든 나은별을 조심해. 그 여자는 지금 유강후가 그저 널 데려다 키우는 거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아직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거야. 그 여자가 만약 너랑 유강후 사이를 알게 된다면 그땐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그녀는 이내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다연아, 난 네가 너무 걱정돼. 차라리 여기서 벗어나. 내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줄게. 다연아, 주한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주한을 괴롭혔던 사람 전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복수할 거야!”그녀의 모습에 임혜린은 자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어휴, 원한이 가득하네. 유강후가 네가 주한의 복수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가 되면 유강후가 널 죽일까 봐 무섭단 말이야!”온다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시선을 내리깔며 나직하게 말했다.“괜찮아, 난 상관 안 해.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아저씨가 날 죽여도 괜찮아.”두 사람을 침묵했다.한참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혜린아, 나 대신 주희를 잘 챙겨줘. 난 앞으로 주희를 챙겨줄 수 없을 것 같으니까.”임혜린이 말했다.“알았어.”온다연은 뭔가 떠오른
한이준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기에 유강후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심사가 조금이라도 뒤틀린다면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그가 서재에 발을 들인 뒤로 유강후의 손에선 담배가 끊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한이준도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곤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말해 봐, 무슨 일인데. 왜 네 손에서 담배가 끊이지 않는 거지?”유강후의 표정은 아주 담담해 속을 알 수 없었다.“그냥 사소한 일이야.”한이준은 그의 소매를 보았다.소매 사이로 전에 온다연이 깨물었던 흔적이 보였다.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는 듯했지만 유강후는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듯 대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한이준은 이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놀려댔다.“온다연 성격이 만만치 않은가 보네. 네 팔을 흉이 날 때까지 깨물다니 말이야. 혼내기는 했어?”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모금 빨고 나니 담배는 어느새 꽁초만 남아 버렸다.꽁초를 재떨이에 버린 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랑 임혜린 체격 차이가 아주 크던데. 궁합이 맞긴 하냐?”한이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예전부터 과묵하고 남녀 사이의 일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던 냉담한 친구가 지금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으니 말이다.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그는 꾹 참았다.“꽤 괜찮아. 왜, 너랑 온다연은 궁합이 잘 안 맞나 봐?”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방금보다 더 싸늘해졌고 또 담배를 꺼내 피워댔다.한이준은 특수 부대에서 그와 함께 훈련하던 때가 떠올랐다. 유강후와 함께 샤워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것을 본 적이 있었다.그때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유씨 가문의 셋째 아들은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몸도 아주 훌륭했다.그의 시선은 어느새 유강후의 바지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한이준은 웃으며 말했
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혜린을 보았다.그는 매일 도망만 치는 임혜린이 온다연의 곁에 오래 붙어 있으면 온다연에게 안 좋은 것을 알려주리라 생각했다.온다연의 친구이지 않았다면, 한이준의 여자친구이지 않았다면 임혜린을 이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한이준, 네 여자나 잘 관리해.”한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하려던 순간 온다연이 왔다.온다연은 임혜린의 팔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혜린아, 이러지 마. 난 괜찮아. 아저씨는 나한테 아주 잘해줘.”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임혜린은 그녀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온다연의 팔을 뿌리치며 바로 서재 안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두어 걸음 만에 바닥에 넘어진 온다연을 발견했다. 온다연은 어딘가에 부딪힌 듯 이마를 붙잡고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얼른 성큼성큼 다다다 온다연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물었다.“부딪혔어?”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확인했다.온다연의 하얀 이마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조금 까진 것 같기도 했다.그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서서히 고개를 돌려 임혜린을 보았다.한기가 느껴지는 유강후의 시선을 받은 임혜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며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속 가득 들어찬 공포를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발을 뻗은 순간 한이준이 그녀를 붙잡았다.“가자, 집에.”임혜린은 유강후를 노려보았다.“왜 다연이를 그렇게 대하는 건데! 왜 범죄자 취급하면서 집안에 가둬두느냐고! 넌 꼭 천벌을 받을 거야!”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의 눈동자엔 한기가 서려 있었다.한이준은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친구의 모습에 얼른 임혜린은 둘러업고 나가버렸다.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업은 한이준을 때렸지만 건장한 한이준에게 그녀의 주먹은 그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온다연은 임혜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다시 고개를 돌려 유
온다연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살짝 떨렸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두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가려버렸다.유강후의 옷을 꽉 잡고 있던 그녀는 다소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피곤해요. 몸도 아프고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작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오늘은 너무 무서웠다고요!”다소 서러움이 묻어난 그녀의 목소리에 유강후의 마음이 누그러졌다.아침에 그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끓어오르는 욕구대로 그녀를 다뤘기에 결국 다치게 했다. 그 탓에 그는 지금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게다가 자꾸만 두 사람의 궁합이 좋지 않다는 의사에 말이 떠올라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하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참아야 했다.특히 온다연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다주었다. 무엇을 원하든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산처럼 쌓아주면서 선물했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온다연은 아니었다. 온다연은 원해도 가질 수 없었고 잡아먹으려고 해도 잡아먹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고 겨우 그녀를 잡아먹었건마는 결국 다치게 하고 말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다행히 그녀는 얌전했다. 아프면 그에게 찾아와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어투도 다소 부드러워졌다.“앞으로 임혜린과는 친하게 지내지 마. 임혜린은 널 나쁘게 물들일 거야.”온다연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긋하게 말했다.“가끔 만나는 것도 안 돼요? 혼자 집에 있으면 엄청 답답하다고요.”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매일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거야?”온다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하지만 저한테 친구도 필요한걸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구월이가 있잖아. 구월이로 부족하면 한 마리 더 키워도 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틀어 가버리려 했
꼭 맹수가 자신의 영역에 영역 표시를 하는 것처럼 낙인만 찍으면 그가 좋아하는 것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가 버리기 전까지 절대 다른 사람의 손을 타서도 안 되었다.그랬기에 온다연의 말은 유강후의 역린을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는 온다연의 턱을 꽉 잡으며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했다.“날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당장 네가 방금 한 말 취소해!”온다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손은 이미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마침 손바닥에 있던 상처를 자극하게 되어 피가 새어 나왔다.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모습에 목에 핏대를 세울 정도로 화가 났다.그는 이미 화를 참고 있었다. 최대한 그녀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말이다.가느다란 그녀의 목은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한 글자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방금 한 말을 취소하라고 했어.”온다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입술에 이가 박힐 정도로 앙다물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보아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이때 온다연이 작게 말했다.“아저씨는 약속을 안 지키잖아요. 안 아프게 할 거라면서 아프게 하고, 친구도 못 만나게 하고. 그럴 거면 아저씨랑 안 사귈 거예요! 우리 헤어져요!”작고 나른한 목소리엔 뾰족뾰족한 가시도 있었다.기죽은 목소리지만 온다연의 고집은 아주 셌다.유강후는 핏대를 세우며 눈을 가늘게 접은 채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확 잡더니 어깨에 대롱대롱 둘러업었다.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해줬더니 아주 그냥 기어오를 생각만 하지?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온다연은 그의 어깨에서 부단히 발버둥을 쳤다.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