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맨발에 약간 헐렁한 홈웨어를 입고 있어 보기에 매우 여리여리해 보였다. 방은 따뜻했지만, 복도에는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더욱 조용하고 착한 모습으로 비쳤다. 그녀는 여기서 강해숙을 만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강해숙이 이곳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녀와 함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했다. 유강후가 다가오자, 온다연은 정신을 차렸다. 유강후는 장화연이 건네준 분홍색 플리스 슬리퍼를 받아 반쯤 쪼그려 앉아 온다연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겨 주면서 말했다. “왜 또 신발을 안 신었어? 맨발로 있으면 추워지잖아.”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창가를 쳐다보았다. 강해숙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에게 작게 말했다. “아저씨, 강 이사님 우리와 함께 살 건가요?” 유강후는 대답했다. “내 어머닌데 당연하지.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거야.” 온다연은 강해숙이 본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유강후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신분 때문에 어떻게 장기적으로 함께 지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긴장이 더욱 커졌다. “저, 아저씨 어머니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유강후가 일어나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시어머니와 어떻게 지낼지 모르겠다는 거야?” 온다연은 얼굴이 더 붉어졌고 말까지 더듬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강해숙 앞에 다가갔다. “어머니, 온다연이랑 이야기해요. 너무 공식적으로 굴지 말고, 다연이가 겁이 많아요.” 강해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조금 알고 지냈어.” 그녀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임신했는데, 왜 전에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니?” 온다연은 당황스러워졌다. 강해숙은 정말 우아했고 말투도 부드러웠지만,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서 지내다 보니 그녀의 신분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
동시에 유강후는 온다연을 위해 더 좋은 한의사를 찾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후, 유강후는 서재에서 일하고 있었고, 온다연은 그의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엎드려 그가 전화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최근 그녀는 점점 더 졸린 상태였고,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이 반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입덧도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대다수의 임산부는 세 달이 지나면 입덧 증상이 점차 사라지지만, 온다연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 심하게 구토를 하고 있었다. 식사는 항상 조심스럽게 조절하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너무 마르고 처참해 보였다.유강후는 회의 도중 그녀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자 회의를 중단했다. 그녀를 안아 올리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저씨 곁에서 자고 싶어요. 너무 멀리 있으면 잘 못 자요.” 유강후는 앉아 그녀를 무릎에 올리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곁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아?” 비록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온다연은 이렇게 직설적인 사랑 고백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작게 말했다. “구역질 날 때 아저씨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좀 더 나아져요.” 그러면서 그녀는 조그마한 이마를 찡그렸다. “책에선 세 달이 지나면 구역질이 덜 한다고 했는데, 왜 저는 더 심해진 거죠?”유강후의 눈빛 속에는 슬픔이 스쳤고, 가슴속의 아픔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너의 몸이 좀 약하니까, 며칠 더 구토하는 건 정상이야.” 사실 의사는 여러 번 그에게 이미 경고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다연에게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지고, 구토도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이는 모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임신을 종료하려는 과정이었다.초기에는 한약으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 후기로
유강후는 그녀의 뾰로통한 모습이 귀여워 볼을 살짝 꼬집었다.“나쁜 짓을 하려고?”온다연은 그의 손을 쳐버렸다.“가슴 아파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강후를 뿌리치고 일어나려고 했다.유강후는 두 팔로 그녀를 휘감고 내려가지 못하게 하더니 손을 그녀의 아랫배에 올려놓았다.“내게 아이를 낳아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가슴 아파해?”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고 손등을 물었다.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났는데도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언짢아하며 말했다.“그럼 낳아달라고 하지 그래요? 죽마고우라 잘 상의하면 될 텐데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게 했다.“너 이렇게 질투가 심한 걸 전에는 왜 몰랐지?”유강후를 쳐다보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정리한 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저한테 죽마고우가 있다면 어떡하게 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있어? 왜 난 모르지?”온다연이 열 살 때 유씨 가문에 왔으니 죽마고우라 할 만한 사람은 유민준밖에 없다.하지만 유민준은 아닌 게 분명하다.온다연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유하령이 그때 정말 깨끗이 처리한 모양이다.주한에 관한 모든 것이 흔적조차 없이 지워졌으니 유강후가 그녀의 과거를 조사할 때 주한에 관한 정보를 전혀 찾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그녀는 당시 의문이 들어 임정아를 통해 자료를 조회해 보았는데, 주한에 관한 모든 정보가 없어졌고 학교 생활 기록까지 깨끗이 지워졌다.이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주한 사건이 벌써 5년 전 일인데, 유씨 가문의 능력으로 4-5년 사이에 한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그러면 유강후가 수집한 정보에 이 사람이 빠졌던 것도 말이 된다.하지만 모든 사람이 주한을 잊어도 그녀는 잊을 수 없다.주한은 그녀에게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랑보다 백배 천배 중요한 보살핌과 따뜻함이었다.어린 시절부터 외로웠던 그녀에게 사랑보다는 추운 날의 뜨끈한 국
화를 내는데 목소리가 낮고 가냘프니 어리광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유강후는 그녀를 꼭 껴안고 손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눌렀다.“이렇게 질투가 심해?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일 뿐 애정 같은 건 없어. 한재민이 좋아하는 여자야.”“하지만 다연아, 너는 죽마고우가 없잖아. 그러니 더 이상 이런 말로 나를 화나게 하지 마. 정말 화가 난단 말이야. 너의 모든 것은 내 거야.”‘넌 내 거야!’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강탈했다.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지 오래됐다. 보기만 하고 먹을 수 없는 건 너무 괴롭다.특히 얼마 전 그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체험한 후, 지금 억지로 참으려 하니 그야말로 고통스럽다.하지만 그녀의 현재 몸 상태를 고려하면 참을 수밖에 없다.어찌나 키스를 퍼부어 대는지 온다연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그녀는 유강후가 통제력을 잃고 함부로 할까 봐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유강후처럼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그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할 리 있겠는가?그 일은 못 해도 다른 건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깨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는 참지 못할 것 같아.”온다연은 놀라서 울상이 되었다.“안 돼, 안 돼요. 놔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내가 이전에 가르쳐 준 것처럼...”그렇게 끈적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됐다.유강후가 온다연을 안고 나왔을 때, 장화연이 해바라기꽃을 한 아름 들고 와서 꽃병에 꽂고 있었다.현관, 테이블, 창턱이 온통 눈부신 해바라기 꽃으로 장식돼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약간의 따뜻함을 더했다.방금 만족을 얻어 기분 좋은 유강후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머리에 키스했다.“잔꾀가 진짜 많아.”피곤해서 움직이기도 싫은 온다연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졸려요. 자고 싶어요.”“그래, 곧 잘 수 있어.”유강후는 그녀를 조심스레 침실로
문이 열리자, 나은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이 입은 옷을 본 그녀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온다연은 그녀와 거의 같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문어귀에 서 있었는데, 불빛 아래서 피부가 희다 못해 빛이 났다.나은별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게다가 온다연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소녀미는 그녀가 비싼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온다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온다연의 눈에서 분노를 읽었다.이때 유강후가 온다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깼어? 이리 와.”온다연은 시선을 거두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그녀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유강후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뒤이어 그는 컴퓨터를 끄고 온다연을 자기 다리 위에 앉힌 후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나은별은 창백한 얼굴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쳐들고 천진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이러지 말아요. 사람이 있는데.”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새끼손가락을 몰래 유강후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빨간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마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그녀의 이런 잔꾀를 이내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잔꾀가 진짜 많아.”온다연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은별 씨가 있는데...”그녀는 말하면서 곁눈질로 나은별을 슬쩍 보았다.나은별은 화가 나서 얼굴까지 일그러졌다.온다연이 속으로 코웃음을 치다가 입을 열려는데, 나은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강후 씨, 두 사람...”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극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보다시피 우리 사귀어.”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우리 사귄 지 오래됐어. 은별 씨가 생각하는 대로야.”나은별은 유강후가 그 자리에서 인정할 줄은 몰랐다.그녀의 눈에 온다연
유강후가 어리둥절해하며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나은별이 소리를 질렀다.“이게 고양이 간식이야?”온다연은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박였다.“네, 구월이 간식이에요. 장 집사님이 직접 구월이를 위해 만든 과자인데, 구월이가 좋아하는 벌레도 들어있어요.”나은별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강후 씨,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유강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단지 혼내는 의미로 온다연의 종아리를 꼬집었다.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회의 중이라 네가 뭘 먹는지 몰랐어. 그런데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사람도 먹을 수 있어. 죽지 않아.”나은별은 안색이 변하더니 목을 잡고 구역질했다.이때 온다연이 또 입을 열었다.“은별 씨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지 않아요? 아침에 고양이 세 마리가 그 의자에서 잠을 잤었는데, 간지럽지 않으세요?”마침내 나은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나은별이 나가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몸에서 내려왔다.그녀는 뾰로통해서 나은별이 앉았던 의자 앞으로 가서 양털 쿠션을 바닥에 던지고 남은 간식도 쓰레기통에 버렸다.유강후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잔뜩 화가 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쏘아보았다.“왜 그 여자를 내 의자에 앉혔어요?”유강후는 앙탈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귀엽고 웃겼다.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제 마음대로 뛰어 들어왔어.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디 앉았는지 어떻게 알아?”그가 이 일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 온다연은 더욱 화가 났다.동그랗게 뜬 그녀의 예쁜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그리고 왜 그 여자에게 제 간식을 먹였어요? 장 집사님이 직접 저를 위해 만든 것인데 왜 그 여자에게 줬냐고요?”유강후는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구월이 간식이라며? 왜 또 네 간식이 된 거지?”온다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제 거예요. 장 집사님이
그렇게 한참 동안 끈적한 분위기가 지속됐다.결국 강해숙이 직접 가서 식사하라고 문을 두드려서야 유강후는 겨우 온다연을 놓아주었다.과격한 키스 때문에 온다연은 입술이 빨개지고 일부분 피부가 벗겨졌다. 그녀는 까진 부분이 아파서 줄곧 숨을 들이마셨다.“아파요. 다음에는 좀 살살해 줄래요?”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말소리도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게다가 살짝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밖에서 다른 사람을 이런 눈으로 보면 안 돼. 알았어?”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발목을 만지며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여기도 까질 것 같네요. 왜 자꾸 여기를 잡아요? 아파 죽겠네.”유강후는 빨개진 그녀의 발목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여려?”그는 단지 발목을 살짝 잡았을 뿐 별로 힘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가 통제력을 잃고 너무 힘을 쓴 것이 아니라 그녀가 너무 여리다는 것이다.유강후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 그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은 주식시장을 조작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그는 허리를 굽히고 신발을 주워 신겨주었다.“나은별 때문에 화내지 마. 그럴 가치가 없어.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야.”온다연은 콧방귀를 뀌며 나지막이 말했다.“그 여자가 자꾸 저를 건드리잖아요?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그 여자가 아저씨를 좋아해서 생기는 일이라고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이전에는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걸 왜 몰랐지?”그러더니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온다연은 얼른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강 대표님도 계시는데, 이러지 말아요.”유강후는 그녀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일부러 놀렸다.“아직도 강 대표님이라고 불러? 곧 결혼할 텐데, 결혼 후에도 강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야?”온다연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누가 당신이랑 결혼한대요?”그녀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라 멘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식사 시간 내내 그녀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면서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고 강해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식사가 끝난 후, 강해숙은 다실에서 차를 끓였다.온다연은 차향을 맡으니 속이 좀 편해져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나은별은 오늘 말이 특별히 많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화제만 골라 가며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었다.강해숙도 예의상 얘기를 이어갔지만 사실 이미 싫증이 난 것 같았다.그동안 강해숙과 지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강해숙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나은별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십중팔구는 아들의 체면을 봐서일 것이다.온다연은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나은별의 모습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잠시 후, 장화연이 들어와서 강해숙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잠깐 실례한다고 말하고 일어나서 나갔다.강해숙이 나가자 나은별은 즉시 표정이 바뀌더니 일어나서 온다연 쪽으로 걸어왔다.온다연도 이 순간을 기다리다가 인내심을 거의 잃을 뻔했다.그녀는 조용히 나은별을 바라보며 그녀가 다가오기 전에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은 은별 씨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했어요?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나은별은 온다연 앞에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적어도 제가 왔다고 신경 쓰셨잖아요? 왜냐하면 저는 나씨 가문의 아가씨니까. 하지만 다연 씨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예요. 강 대표님의 눈에는 지금 안고 있는 고양이보다도 못한 존재죠.”온다연은 품속의 구월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코웃음을 쳤다.“그래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강 대표님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유강후만 저를 인정하면 되니까요.”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쳐다보았다.“은별 씨, 저를 상대할 힘이 있으면 어떻게 유강후한테서 더 많은 실익을 챙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거예요. 어쨌든 유강후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