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땀이 이내 캐미솔과 이마를 적셨고 복부에서 간헐적으로 경련이 일었다.마치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며칠 동안 없었던 태동이 갑자기 나타났다.배 속의 태아가 초조한 듯 심하게 움직였다.통증은 온다연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른 채 한 손으로 메일과 컴퓨터를 닫았다.허둥지둥하다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지며 밖에 있던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온다연이 흥건히 식은땀을 흘린 것을 보고 즉시 이상함을 감지했다.“온다연 씨, 어디 불편하세요?”온다연은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끈적끈적한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간호사는 깜짝 놀라 황급히 뛰쳐나갔고, 잠시 후 온다연은 응급실로 옮겨졌다.유강후는 응급실 문이 닫힌 후에야 도착했다.그는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를 붙잡고 화를 냈다.“어떻게 된 거예요?”그는 겨우 30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온다연도 계속 침대에 가만히 있었는데 왜 갑자기 유산한다는 거지?그 간호사는 마침 온다연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유강후가 화를 내자, 해고되는 줄 알고 놀라서 벌벌 떨며 말했다.“저, 저도 몰라요. 제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때, 온다연 씨는 줄곧 안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져서 제가 들어가니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이때 또 다른 의사 두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갔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강후는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몸도 조금씩 차가워지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천천히 확산해 하나하나의 뼈마디 사이로 파고들었다.그는 전에 없던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천성적으로 침착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연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병실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응급실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권은 그의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지만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용기가 없었다. 이때 유강후의 비서가 다가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유 대표님이 사인해야 할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습니다!”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지금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잠시 기다려야 해요!” 이권은 유강후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기에 그의 말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 서류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계속 재촉했지만 비서는 이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서는 평소에 당당한 모습으로 회사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유강후가 지금은 응급실 문 앞에 서서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유강후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모든 이들이 의지하던 그가 지금은 심한 고통에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아파하고 있었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비서는 잠시 지켜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대표님을 계속 지켜봐 주세요. 저는 다시 회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중에 유대표 님께 급히 서명이 필요한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알려 주세요.” 시간이 일분일초 지나갈수록 마치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 마침내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온다연이 침대에 실려 나왔다. 유강후의 마음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그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아는 일단 무사해요. 잘 돌보셔야 해요. 더 이상 자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온 아가씨가 너무 큰 감정적 충격을 받아 갑작스러운 심장 리듬 이상이 생겨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 겁니다...” 유강후의 마음은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마치 물 밖으로 튕겨 나갔던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온 듯 그는 정상적으로 숨
유강후의 손이 잠시 멈추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미 구월이가 있잖아. 왜 아직도 그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때, 온다연의 손이 갑자기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옷을 꽉 잡았다. 마치 악몽에 갇힌 사람처럼 몸이 경직된 채로 하니만 애타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불안과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녀의 꿈속에서 하니는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애틋하게 헤어진 누군가인 것처럼 느껴졌다. 유강후는 미간을 더욱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에 입 맞추며 낮게 말했다. “다연아, 그 고양이가 그렇게 중요해? 네 꿈속에 나도 있어?” 하니가 그냥 고양이여서 다행이었지 만약 그게 사람이었다면 온다연이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유강후는 몰랐다. 온다연은 그 순간 악몽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주한이 죽을 때의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검 붉은색의 피가 그녀의 꿈속 하늘을 뒤덮었고 온다연은 붉은 하늘 아래서 그의 부서진 몸이 서서히 사라지며 작은 거품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려가 그 사라지는 거품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 없었고 잡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반복되는 악몽은 그녀를 점점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연아.”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그 꿈에서 천천히 끌어냈다. 그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고 그녀에게 안전한 느낌을 주었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그녀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었다. 진정제가 그녀를 깊이 잠들게 했고 그녀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거대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낯선 복도의 앞에 서 있었다. 복도의 끝에는 조그마한 아이가
말을 마친 아이는 온다연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나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 “저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해요. 엄마, 아빠랑 꼭 빨리 저를 데리러 오셔야 해요.” 온다연은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학교? 가지 마!” “그냥 유치원이요. 엄마를 떠난 아이들은 모두 그곳에서 학교를 다녀요. 엄마, 아빠가 다시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는 꼭 저를 일찍 데리러 오셔야 해요. 거긴 너무 춥고 전혀 좋지 않아요. 어떤 친구는 엄마가 그곳에 두고 5년이 지나도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엄마도 저를 5년 동안 거기 두면 저 엄마 안 좋아할 거예요!” 그 말을 마치고 아이는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아이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깨달았다. 자신에게 정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급하게 그 아이를 쫓아가려 했지만 아이는 금방 멀리 달려가더니 작은 별빛이 되어 사라졌다. 온다연은 그 자리에 서서 울며 외쳤다. “아가야, 돌아와!” “아가야!” “다연아!” “온다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온다연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인 것은 확대된 유강후의 얼굴이었다.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꿈속의 아이와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온다연은 여전히 꿈속에서의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고 손을 들어 유강후의 얼굴을 만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기가 없어졌어...”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후 그녀의 손을 그녀의 배 위에 얹었다. “만져봐, 여전히 있어.” 불룩하게 나온 배가 온다연에게 잠깐의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갑자기 유강후를 꽉 껴안았다. “꿈을 꿨어요. 아기가 사라지는 꿈을.” “너무 불쌍했어요. 신발도 안 신었고 너무 추웠어요...” 꿈속 장면을 떠올리자 그녀는 다시 슬퍼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게 진짜면 어떡해요...” 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뭔가 아부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한 번 열어봐.”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보석은 필요 없어요. 가져가서 다른 사람에게 줘요.” 유강후는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보석이 아니야. 열어보면 알아. 네가 좋아할 거야.” 온다연은 더 이상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컴퓨터 화면에서 보고 있던 드라마를 계속 봤다. 그 드라마는 주혜성이 출연한 새로운 캠퍼스 아이돌 드라마였는데 서브 남주로 등장한 주혜성의 분량이 남자 주인공보다도 많았다. 주혜성의 청초한 얼굴이 화면을 채우자마자 댓글 창에는 팬들의 주접이 폭주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자신을 무시하고 주혜성의 영상을 보고만 있는 것을 보자 눈 속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번뜩였다. 분노가 가득한 감정이 잠시 그의 표정에 드러났지만 곧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깊은 어둠과 달콤한 애정이 채웠다. 그는 상자를 열며 말했다. “이거 봐, 네가 좋아할 거야.” 상자 안에는 유명한 중화TV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 초대장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시간은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온다연은 그를 바라봤고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바로는 일반 방송국이 유강후를 섭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이런 예능 프로그램에 그를 초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강후는 초대장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저녁 하는 이 예능은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야. 많은 인기 스타들이 초대되었고 네가 좋아하는 주혜성도 나와.” 온다연은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가 자신이 주희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그런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주희의 커리어에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의 활동을 꽤 지켜보는 편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그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그 작은 음식점에서였으니까. 온다연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는 초대장을 집어 들고 살펴보며 조용히 말했다. “가면 오래 있어야 해요
온다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마음이 좀 놓인 듯 계속 말했다. “남 씨 가문이랑 나 친해. 남하윤 그 아이도 너 본 적 있잖아. 네가 정말로 그 주혜성을 좋아하면 남하윤에게 부탁해서 너랑 친구 되게 해줄 수 있어. 어때?” 온다연은 마침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 지금 무슨 말 하려는 거예요?” 유강후의 눈빛에 그녀를 향한 애정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온다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작은 연예인일 뿐이야. 네가 좋아하면 친구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 온다연은 더 이상 이 주제를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아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주희를 한 번 보고 싶었다. 멀리서 한 번 보기만 하면 충분했다. 아마도 이것이 주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저녁에 유강후는 온다연을 데리고 약속대로 방송 녹화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시야가 탁월한 VIP 구역이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TV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이었다. 유강후의 등장은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평소 지나치게 조용히 행동하던 유 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러 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이 황태자의 태도는 매우 냉정했다. 인사를 건넨 사람들은 고작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반응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옆에 앉은 작은 여인에게는 다정하게 신경을 썼다. 사람을 불러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쥐여주어 손을 녹이고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무릎에 덮어주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를 보석처럼 다루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잘못될 가봐 노심초사했다. 누군가 눈치 없이 그 여자아이를 몇 번이라도 더 쳐다보면 그의 시선이 바로 쏘아지곤 했다. 그 시선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란 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주희 얘가 정말 제대로 미친 걸까?만약 유강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남하윤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주희야, 함부로 말하지 좀 마. 내가 여기 있는데, 이런 말은 밖에서 하면 안 되지.”그 말에 주희도 낮게 웃음을 흘리며 비웃기라도 하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래, 누나.”그러면서도 주희의 눈빛은 온다연을 스치듯 훑었다.“하지만 누나가 너무 보고 싶은걸요.”남하윤은 주희의 옷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찌푸렸다.“너 오늘 왜 이래?”주희는 시선을 돌려 유강후를 바라보더니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유 대표님께서 이런 시시한 곳에는 왜 오신 걸까요? 여긴 경제 프로그램도 아닌데.”유강후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채 주희를 바라보았다.방금 주희가 한 말이 남하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온다연을 향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유강후는 냉랭한 눈빛으로 주희를 노려보았다. 그 살벌하고도 차가운 기운에 주위 사람들 모두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남하윤도 주희가 갑자기 유강후를 이런 식으로 도발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남하윤은 서둘러 주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더 이상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그러면서 유강후에게는 사과의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대표님,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이윽고 그녀는 송지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시장님께서도 오셨네요. 오늘 프로그램이 정말 대단하긴 한가 봐요. 이렇게 엄청난 분들까지 직접 오시다니.”송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희의 시선은 여전히 유강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송지원은 티 안 나게 표정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남하윤, 네 남자 친구 관리 똑바로 해. 말 함부로 하게 하지 말고, 시선 처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철저히 하라고. 너희 같은 어린 애들이 함부로 건드려서
그래도 대인배였던 남하윤은 곧바로 미소를 되찾고 대답했다.“대표님의 충고,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저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이윽고 그녀는 유강후의 곁에 있는 온다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이분이 바로 다연 씨죠? 저희 만난 적 있잖아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쁘신 것 같은데요.”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하윤 씨.”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희의 눈빛에는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온다연은 그 눈빛에 미세하게 표정을 찡그리며 유강후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낮게 말했다.“아저씨,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저 조금 피곤해요.”하지만 유강후는 덤덤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고 가자. 결혼식에 쓸 피아노 연주곡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보고 괜찮으면 우리 결혼식에 쓰지, 뭐.”그 말에 주희가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온다연의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급히 유강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이런 얘기는 밖에서 하지 말라고요, 제발.”남하윤은 유강후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깊은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다연 씨, 유 대표님이랑 결혼하시는군요. 정말 축하드려요. 제가 선물 엄청난 거 준비해드릴게요.”하지만 유강후는 계속해서 주희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이 주혜성과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 유강후는 몰랐다. 하지만 주혜성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확실히 온다연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니 유강후는 자연스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주혜성을 온다연의 과거 동창으로, 온다연을 탐냈던 그 남자로 여겼다.잠시 후, 시선을 돌린 유강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땐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데리고 와.”온다연을 이끌고 자리에 앉은 그는 더 이상 남하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남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