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규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남하윤이 수십 명의 팬들에게 둘러싸여 쓰레기를 맞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당장 차로 들이받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다행히 경비들이 즉시 달려와 광기에 휩싸인 팬들을 쫓아냈다.하지만 강민규는 속을 다스리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고 그 순간 남하윤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하지 마. 이건 제가 받을 벌이야.”강민규의 분노가 폭발했다.“무슨 헛소리야. 저 사람들은 미친놈들이야. 덕질한다는 이유로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해? 한 번은 반드시 제재해야 해. 그래야 법이 뭔지 알지. 설령 너랑 주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건 사적인 문제야. 저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간섭하냐고?”남하윤은 낮게 지쳐버린 목소리로 말했다.“강민규, 나... 조금 지쳤어. 혹시 남는 방 있어?”강민규가 잠시 멈칫했다.“뭐라고?”남하윤은 힘없이 웃으며 속삭였다.“나 정말 지쳤어. 쉬고 싶어. 남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지금 있는 곳도 싫어. 하지만 갈 데가 없어. 강민규 제발 부탁이야.”그녀는 너무나 처참했다. 마음은 이미 마비돼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여러 번 예상했던 일이었다.주희와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어떤 일이 닥칠지 팬들에게 공격받는 건 가장 단순한 형태일 뿐이라고 스스로 수없이 되뇌었었다.그러나 그 단순한 벌조차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이 길을 이어가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은 이제 지킬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몇 걸음 앞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가며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강민규, 나 데려가 줘.”강민규는 차에서 수건을 꺼내 그녀 몸에 달라붙은 쓰레기들을 털어내고 그녀를 차에 태워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차는 앞으로 질주했다.마치 운명이 조롱하듯 신호등마다 주희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그는 이제 정말로 유명해져 누구나 아는 스타가 되어 있었고 중앙 광장을 지나자 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광경이 보였다.
온다연을 보자 주희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온다연은 원래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임정아에게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는 주희와 함께 휴게실로 들어갔다.휴게실에서 온다연이 물었다.“정말 은퇴하려는 거야?”주희가 대답했다.“네. 누나 작품 촬영 끝나면 은퇴할 거예요. 유강후랑 얘기했던 것도 검토해 봤고요. 누나가 하는 학교에 지분을 넣을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제 옷 브랜드랑 화장품 브랜드도 같이 운영하려 해요. 업계에서 오래 있으면서 관련 자원도 좀 모아 놨거든요. 그냥 버릴 순 없잖아요.”어른스러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강후 씨께 가장 믿을 만한 전문 경영인을 붙여 달라고 할게.”주희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동안 가슴속을 짓눌렀던 감정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온다연에 대한 마음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지금 그가 걱정하는 건 남하윤이었다.“누나,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온다연이 경계하듯 물었다.“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주희가 말했다.“남하윤이 지금 곤경에 처했어요. 아버지랑 친동생이 그 사람을 몰아붙이고 있어요. 난 그 사람들 손에 있는 남씨 가문 지분을 모두 사들여 남하윤에게 주고 싶어요.”온다연이 대답했다.“그건 강후 씨와 상의해야 할 문제야. 그리고 강후 씨가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 설득이 될지는 네 태도에 달렸어. 다만 남씨 가문 지분을 인수하는 데 필요한 돈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 외는 네 몫이야.”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누나. 난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나 돈은 안 받을 거예요.”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휴게실을 나섰다.복도 끝에 앉아 있던 남하윤은 주희 얼굴에 번진 여유로운 미소와 밝은 눈빛을 보았다. 그 순간 가슴속에 맺혀 있던 답답함이 어느새 무감각으로 바뀌어 가는 걸 느꼈다.그녀는 평소처럼 온다연에게 인사
주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유강후, 네가 키운 애가 정말 너랑 똑같네. 예의도 없고 못되게 굴고.”유강후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내가 널 내다 버릴 수도 있어.”주희는 물론 믿었지만 원래 그는 그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원래라면 한 마디 더 쏘아붙일 생각이었지만 남하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떠올리며 참고 말았다.막 떠나려는 순간 유강후가 덧붙였다.“돈이 모자라서인지 아직 유명해지고 싶어서인지 왜 하필 그런 예능에 나가서 커플을 만들어 이슈를 만들려는 거야? 저 여자 처음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닌 게 보여. 멀리해.”주희가 냉정하게 말했다.“내 일이야. 신경 쓰실 필요 없어.”유강후는 무표정하게 조언했다.“주한이 없었으면 넌 이미 길거리에서 죽어도 난 신경 안 썼을 거야. 연예계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나와서 너만의 일을 해. 아시아에서의 엔터 산업은 아무도 한이준을 능가할 수 없으니 포기해. 연예 쪽 투자 따위 생각하지 마. 네 누나가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어. 지방 몇 개 도시에서 예술 학교에 투자했지. 사립 고급 국제학교 코스야. 국내에서는 아직 시도한 사람이 거의 없는 미래가 유망한 프로젝트야. 이미 조금씩 윤곽이 잡히고 있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야.”주희는 담담히 말했다.“생각해 볼게.”그가 단번에 받아들이자 유강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하지만 그의 생각까지 연구할 기분은 아니었다. 온다연에 대한 주희의 이야기를 마치고 유강후는 아이를 안고 떠났다.주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유강후를 더 이상 깊이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과거 그가 세 사람에게 가한 모든 죄를 주희가 뒤집어썼고 그를 보면 달려가 물고 싶은 심정까지 들었었다.그러나 온다연이 사라진 몇 년 동안 그는 그의 모든 것에 대해 깊이 미워했었지만 온다연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 그 미움은 하루하루 사라졌다.이제 그는 온다연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는 지금 온다연의 동반자이자 아이의
주희가 말했다.“그럼 너는 쉬어. 내가 나가서 사 올게.”주희가 나간 뒤 남하윤은 다시 침대에서 내려와 주희가 아까 서 있던 책장 앞으로 갔다.그녀는 책장에서 주희가 아까 보고 있던 책을 꺼냈다. 책을 열자 가운데 두 장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뜻밖에도 온다연의 사진이었다.한 장은 온다연이 이 방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온다연은 아직 어렸고 고등학생처럼 날씬했다.그럼에도 정교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 만큼 사랑스러웠다.다른 한 장은 온다연과 한 소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세탁으로 색이 바랜 교복을 입고 있어 학생 시절임이 분명했다.소년은 주희를 닮아 여섯 일곱 정도 닮아 보였다. 단 눈 밑에 눈물점이 있었고 웃을 때 더욱 온화한 표정이었으며 역시 날씬했다.해가 지는 시간 풋풋한 소년, 소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따뜻하고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사진은 플라스틱 코팅 처리되어 있었고 누군가 자주 만진 흔적이 역력했다. 모서리가 말려 있어 오래된 느낌을 주었다.남하윤은 사진을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말없이 있었다.밖에서 주희가 계단을 내려오고 마침 유강후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한 손에 작은 핑크빛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대여섯 살쯤 되는 남자아이를 잡고 있었다.작고 포동한 아기는 몸이 불편한 듯 울음소리가 쉬어 있었다.유강후는 급한 듯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고 남자아이는 작은 발걸음으로 뒤따랐다.주희가 발걸음을 멈추고 인사하려 하자 유강후는 곁을 스쳐 지나가며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주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뒤따라가기로 했다.사실 하필이면 다희가 실수로 물건을 깨뜨리고 유리 손잡이에 손을 찔린 것이었다.작고 하얀 손에는 두 군데 상처가 났고 유강후는 마음이 아팠다. 작은 상처였기에 의사는 소독만 했지만 그의 걱정은 컸다.“다희는 오래 울었는데 정말 괜찮아요?”의사는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척 말했다.“괜찮습니다, 대표님. 따님이 장난기가 많아 물건을
남지학이 잠시 멍해졌다.“그 녀석은 그냥 연예인일 뿐인데 당신 사모님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이권이 혀를 차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남씨 가문은 주희 씨를 건드려선 안 돼요. 감히 건드릴 수도 없고요.”남지학의 얼굴이 금세 붉었다가 이내 창백해졌다.남씨 가문이 유씨 가문보다 못하다고는 해도 그는 그래도 장로였고 예전에는 유강후가 그에게 제법 공손하게 대했었다.그런데 이제 조수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한순간에 체면이 구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맞받아칠 수도 없어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주희가 당신 사모님과 어떤 관계인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이 방금 제 아들을 때렸는데 이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하란 말입니까?”이권이 냉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남 대표님, 이건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귀댁의 그 젊은 총각이 연예계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겁니다. 보통은 아드님께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곤 하죠. 우리 집 작은 도련님께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드님이었답니다.”남지학이 버럭 소리쳤다.“그게 무슨 뜻이죠?”이권이 담담히 받아쳤다.“제가 알아본 바로는 아드님이 며칠 전에 한 번 끌려 들어갔었죠. 이유가 뭔지 남 대표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굳이 말씀드려야겠습니까?”남지학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주희가 초조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와 남하윤을 안아 들고는 응급실로 달려갔다.남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원래 있던 병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는 전보다 더 아팠고 심한 현기증도 몰려왔다.곁에는 주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깊은 걱정과 피로가 가득 서려 있었다.남하윤이 몸을 움직이자 주희가 즉시 일어나 물었다.“깨어났구나. 물 마실래?”남하윤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목말라.”주희가 물을 따라 빨대를 꽂아 건네주었다.조금 마신 뒤 남하윤은 기운
남하윤이 급히 말했다.“주희야,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 빨리 나가.”그러자 주희가 단호하게 말했다.“싫어. 네가 내 여자 친구인데 지금 널 버리고 가면 내가 무슨 남자야?”남하윤은 얼어붙었다.“뭐라고?”주희가 냉정하게 대꾸했다.“이미 이런 상황인데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야?”그는 남하윤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화를 걸었다.“이 비서, 어디까지 왔어? 지금 나 괴롭힘당하고 있어.”저쪽에서 이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작은 도련님, 저 지금 병원 문 앞에 도착했어요. 재촉하지 마세요. 여기 사람들 누가 작은 도련님이 우리 대표님이 챙기는 사람이라는 걸 함부로 알겠어요? 누가 감히 도련님을 괴롭히겠습니까?”주희가 말했다.“제발 빨리 와. 남하윤이 머리가 심하게 아파. 여기 의료진 상황이 좋지 않아서 빨리 우리 병원으로 옮기고 싶어.”“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그 사이 남지학 쪽 사람들이 도착했다. 두 명의 건장한 경호원이 문 앞에 서서 위압감을 풍겼다.남하윤의 얼굴이 굳어졌다.“사람이라도 때리려고 하는 거예요?”남지학이 냉담하게 말했다.“네가 자초한 일이야. 저놈을 끌어내서 한 대 제대로 때려.”남하윤이 크게 외쳤다.“누가 감히.”남지학이 손을 휘둘렀다.“끌어내서 제대로 때려줘.”경호원들이 거칠게 다가오려 하자 주희는 주저 없이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내리쳤다.그는 어릴 적부터 싸움 장면을 많이 봐왔고 온다연과도 여러 차례 몸싸움을 벌인 경험이 있어 싸울 때의 저돌적인 힘이 남달랐다.순식간에 두 경호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한편, 남서진은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 위의 물병을 집어 들어 주희를 향해 던지려 했다.남하윤은 깜짝 놀라 일어나 달려들었지만 물병은 그녀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고 남하윤은 소리도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남서진은 멍하니 서서 물병을 던져놓고 고함을 질렀다.“너 미쳤어? 누가 먼저 덤비라고 했어? 네가 내 누나다고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당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