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인 온다연은 착잡한 눈빛이었다.곧이어 장화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큰 도련님이 어젯밤부터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단 올라오지 못하게 저희가 경호원을 대동해 막았습니다.”온다연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절대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요. 아저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화연이 답했다.“알겠어요.”잠시 후 온다연은 아이 방으로 향했다.아이는 이미 7개월이 넘은 상태였고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인큐베이터에 있었다.아이는 온다연의 소리에 반응한 듯 손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고 뽀뽀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림아, 엄마 왔어.”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큰다지만 상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는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이제는 정상적인 피부로 돌아왔고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래도 아이를 지켜냈다는 현실에 온다연은 이미 매우 만족했다.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우림아, 우리 며칠만 더 있다가 집으로 가자.”“앞으로 우림이는 엄마랑 같이 지내는 거야. 알겠지?”...방에서 나온 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냈다.영상을 올린 이후로 핸드폰을 만지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어제 오후와 저녁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기에 분명히 반응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자마자 엄청난 양의 게시물과 댓글이 쏟아져 나왔다.게다가 어제 올린 영상은 백만 번이나 리트윗되었다.하지만 실검에는 오르지 못했다.분명히 누군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다른 수단을 동원한 게 틀림없다.모든 영상에는 수백만 개의 좋아요와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렸고 하룻밤 사이에 새 계정의 팔로워가 300만에 달했다.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뜨거웠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고 댓글 창을 눌렀다.[세상에나. 가해자가 피해자로 된 거네? 이게 실화
온다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내려가서 상황 좀 볼게요.”온다연이 손해 볼까 봐 걱정됐던 장화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경호원 수십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절대 여기까지 못 올라올 거예요.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요.”장화연이 누굴 욕하는 걸 처음 들은 온다연은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하면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분노에 찬 강해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유강후는 내 손자야. 손자 보러 왔는데 너희들이 뭔데 허락하나 마나야.”“당장 비켜.”“어르신, 대표님께서 유씨 가문은 아무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저희도 이게 직업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르신이 들어가는 순간 저희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릅니다.”“강후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분명히 그 미친 X이 옆에서 시켰을 거야. 우리 강후가 지금 저렇게 된 게 다 걔때문이잖아.”...온다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말했다.“욕쟁이 할머니가 따로 없네요. 입 안 아파요?”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과 조롱이 배어 있었다.강해숙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어제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무례한 말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오늘은 경호원들에게 저지당해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으니 이번 생에 가장 면목 없는 순간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강해숙은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온다연이 아니었다면 유하령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민준도 갑자기 사생아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들과 동등한 가문의 아가씨들은 감히 아무도 유씨 가문에 시집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오자마자 새엄마가 되는 신세인데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강해숙은 온다연이 유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에 앉으려고 유강후를 꼬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유강후가 가족들과 멀어진 가장 큰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유
온다연은 말 한마디로 심미진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심미진은 발끈하며 화를 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나는 네 이모야. 내가 없었다면 넌 진작에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운명이었어.”온다연은 어이가 없었다.“참 고맙네요. 덕분에 유씨 가문에서 10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거든요. 유하령한테 잘 보이려고 날 욕하고 괴롭히며 모욕하던 사람이 그쪽 아닌가? 날 방패로 삼았던 모든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증스러운 가면은 이제 벗어던지시죠?”심미진은 표정이 돌변하더니 비통한 심정으로 말했다.“다연아, 다 너를 위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니? 하령이가 성격이 제멋대로인 건 맞지만 절대 나쁜 아이는 아니야. 욕 몇 마디하고 때렸다해서 네가 죽은 건 아니잖아.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그때의 일을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그리고 민준이는 네 오빠야. 어떻게 오빠를 꼬실 수가 있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강후한테 손을 댄 거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심미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그렇게 착하던 애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온다연은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절대 당신들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계속 소란 피우시면 경호원에게 쫓아내라고 부탁할 겁니다.”강해숙은 호통을 쳤다.“여긴 강후 명의로 된 병원이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아들 하나 낳았다고 유씨 가문에서 널 인정해 줄 것 같아?”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단호하게 말했다.“똑바로 들으세요. 제 아들의 이름은 강우림이에요. 유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인정 따윈 필요 없겠죠? 강씨 가문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아이예요. 그러니까 제발 신경 끄세요.”온다연이 또박또박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강해숙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강씨 가문과 비하면 그쪽 집안
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강후 씨한테 약을 주사할 때는 걱정이 안 됐나 봐요?”“형제라는 핑계로 감성팔이 하지 마요. 어차피 나한테는 그런 게 안 먹히니까.”이때 아주 미세한 ‘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너무 경미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유자성에게 다가가 혐오스러운 말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당신은 내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 가장 역겹고 가증스러운 인간이야.”“회장님한테는 당신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게 제일 큰 오점이야.”“물론 당신 딸과 아들도 마찬가지야. 똑같이 역겹고 이기적이거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법까지 어겼으니 유씨 가문이 무너지게 된다면 가장 큰 원인이 그쪽일지도?”“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래. 능력 있는 강후 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신세잖아? 게다가 철없고 멍청한 자식들까지 있으니 말 다 했지. 당신 자식들은 강후 씨 돈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온다연은 의도적으로 유자성의 화를 불러일으켰다.그 결과는 성공했다.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해왔던 유자성은 온다연의 말에 분노가 타올랐다.결국 온다연의 뺨을 때렸고 온다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싸가지 없는 천박한 X.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너 같은 건 바로 죽여버려.”온다연이 내뱉은 말은 그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아버지인 유재성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최고의 인재 중 한 명이다.동생인 유강후는 아버지 유재성을 능가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고 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중간에 끼어 볼품없는 신세가 됐다.정치적 안목이 탁월하고 전략을 잘 세우는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뒤떨어졌고 금융 천재인 동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못 들은 척 웃어넘겼다.그런데 하필이면 보잘 것 없는 온다연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으니 바로 뚜껑이 열렸고 오늘 온다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
유강후가 답했다.“일어나면 좋은 거 아니야?”그는 온다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눈물 흘릴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왜 울어. 울지 말고 뒤에 가만히 있어.”유강후는 그녀가 심미진 때문에 울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매번 이런 상황이니 심미진이 유독 눈에 거슬렸고 싸늘한 눈빛으로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억울한 심미진은 섬뜩한 유강후의 시선에 두피가 저릿해졌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유자성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심하게 말했다.“자성 씨, 우리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요?”그 말을 들은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사람 건드려놓고 이대로 간다고요?”유자성은 그의 뒤에 드러난 작은 그림자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야, 정말 모르겠어?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의도적으로 꾸민 일이잖아.”유강후는 차가웠다.“날 쓰러뜨리고 약물을 주사하고 모르는 여자랑 방에 가둔 것까지 다 다연이가 꾸민 일이에요?”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유자성은 여전히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 아주 당당했다.“강후야, 넌 지금 쟤한테 완전히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이렇게 해야만 네가 마음을 돌릴 수 있다니까?”“닥쳐.”유강후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다.“날 위한 일이라고? 너처럼 무능력한 인간이 내 형이라는 게 참 부끄럽네. 이제부터 우리는 형제가 아니야.”“그리고 이 일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 예전에 당신들이 다연이한테 했던 짓도 내가 끝까지 조사할 생각이고.”“또한 지난 몇 년 동안 형네 자식들한테 투자했던 모든 돈을 돌려받을 거야.”“3일 줄 테니까 한 푼도 빠짐없이 전부 원상복구 시켜놔. 안 그러면 미래 그룹과 우주 그룹의 법무팀 총동원해서 유하령, 유민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거니까.”유자성의 얼굴은 극도로 추악해졌다.“강후야, 그제 무슨 말이니?”유강후는 또박또박 냉혹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었다.“듣는 그대로야. 오늘부터 우린 형제가
유강후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온다연의 손을 놓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좁은 공간에는 숨 막힐듯한 정적만이 가득했다.온다연은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아저씨...”유강후는 지금 화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하지만 이제 유씨 가문과 사이가 틀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유강후가 화났다 한들 자신의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겉보기에는 현명하고 단호해 보이지만 이런 일에는 속이 매우 좁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유강후의 화를 풀어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할 때까지 유강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를 나오고선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온다연은 서러운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아저씨...”유강후는 그녀가 따라오지 못한 걸 의식하고선 흠칫하더니 걸음을 늦췄다.이를 본 온다연은 재빨리 달려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왜 대답 안 해요?”유강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그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온다연이 미우면서도 걱정되었다.안 그래도 여린 사람이 혼자서 유씨 가문과 맞서 싸우려고 했으니 제 발로 호랑이굴에 걸어가는 셈이나 다름없다.유강후도 그들을 상대할 땐 정신을 바짝 차리는데 온다연처럼 연약한 사람이 그것도 혼자서 덤볐다가는 뼈조차 남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그녀의 무모한 행동을 생각하니 표정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병실로 걸어갔다.이 방법이 먹히지 않자 온다연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장화연은 차례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한 명은 냉담한 표정이고 한 명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마냥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그 모습을 본 장화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도련님, 계속 주무세요. 그러면 몸이 더 빨리 회복될 거예요.”그 말을 들은 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제가 옷 갈아입혀 줄게요.”그렇게
“우리 아빠 병원에서, 그 사람들이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약물을 바로 주사했어. 1~2초 만에 정신을 잃었지.”“그 사람들이 나한테도 이럴 정도라면, 너한테는 더 가차 없을 거야. 다연아, 아까 장 집사가 네가 혼자 내려갔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온다연은 유자성이 그렇게 대담할 줄 몰랐다. 유재성이 머물고 있는 병원은 최고급 관료들이 지내는 곳이다. 경비가 삼엄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유자성이 유강후에게 약물을 주사하다니.게다가 유강후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냉혹하고 수법이 교묘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온다연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다연아, 걱정 마. 이번에는 과거의 모든 빚을 깨끗이 청산할 거야!”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정말로 유씨 집안과 결별할 생각이에요?”사실 그녀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유씨 집안의 일원이었다. 유씨 집안은 그녀에게는 끔찍한 짓을 했어도, 유강후에게는 아무런 빚이 없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복잡한 감정이 담긴 깊은 눈빛을 띠었다.“결별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앞으로 우리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하나뿐일 거야. 만약 아버지가 형을 선택한다면, 나는 유씨 집안에서 발을 뺄 거야.”그는 잠시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내가 지금까지 유씨 집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바쳤는지 알잖아. 내 몫은 모두 가져갈 거야. 그리고 너를 괴롭힌 사람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야!”온다연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댄 채, 조용히 그 힘찬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말했다.“회장님은 당신의 친아버지이고 당신과 유자성 씨는 둘 다 그분의 아들인데, 그분도 괴로워하시겠죠.”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말했다.“아버지께서 형에게 충분히 잘해 주셨지. 형 스
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그 당시 상황을 대충 설명해 줬어요. 집사님 생각엔, 한재민이 죽고 나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장화연은 온다연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은 한재민과 한때 관계가 있었잖아요. 아이는 끝내 태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한씨 집안의 배려를 받았겠죠. 그리고 한재민은 아저씨를 구하려다 죽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까지 잃게 됐으니 아저씨는 자연히 나은별에게 큰 빚을 진 셈이죠.”“그야말로 평생 갚을 수 없는 큰 빚이에요.”“나은별의 계산은 아주 치밀했어요. 아저씨가 죄책감에 자기와 결혼하면, 나은별은 유씨 집안과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재벌로 살아갈 수 있고, 나씨 집안도 덩달아 번창할 테니까요. 만약 아저씨가 결혼하지 않는다 해도, 아저씨는 나씨 집안의 부를 유지시켜 줄 겁니다.”장화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 씨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하시군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아저씨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며칠 전에도 나씨 집안이 재정 문제가 생기자 몇백 억을 지원해 줬더라고요. 그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아저씨는 누구보다 힘들게 일하고, 아파도, 피곤해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요. 나는 아저씨가 더 이상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장화연은 잠든 유강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그녀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 그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그녀는 다 지켜봐 왔다.“도련님은 한재민 씨와 형제처럼 가까웠어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면서 누구보다 돈독했죠. 아마 형제가 좋아했던 여자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게다가 나은별 씨도 도련님과 함께 자란 사람이잖아요. 도련님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가장 정이 깊은 사람이에요.”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 모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