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지훈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온준용을 바닥에 내리치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짜증 나. 시끄러워 죽겠네. 일단 입부터 찢어.”그러자 여럿이 우르르 몰려들었다.한바탕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온준용의 목소리는 점차 조용해졌다.이 정도면 괜찮겠다싶었던 염지훈은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됐어, 때려죽이지는 마.”그의 명령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손을 뗐다.온준용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숨을 헐떡였다.“너... 너 누구야? 유강후가 보낸 사람이 아니지?”염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고작 그런 인간이 날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너 이거 납치야. 불법이라고.”염지훈은 한 걸음 한 걸음 온준용에게 다가가더니 지그시 그의 손을 밟았다.“불법? 너 같은 인간의 입에서 불법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참 신기하네.”“악.”온준용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아파. 이거 놔.”“아파?”염지훈은 더욱 세게 짓밟았다.“고작 이걸로 아프다고? 예전에 온다연을 때릴 땐 이런 생각을 못 했나 봐? 다연이가 얼마나 아플지 생각해 봤어?”온준용은 겁을 질린 채로 발악했다.“온다연이 계획한 일이야? 자기 엄마대신 복수하려고 날 죽이려는 거네.”‘온다연 엄마?’염지훈은 다른 발로 온준용을 짓밟으며 생각에 잠겼다.“너 같은 구제 불능 쓰레기는 이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지.”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곧이어 재킷을 벗었다.“며칠 동안 교수 노릇하며 성질 좀 죽였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네. 역시 나는 이런 일이 제일 짜릿해.”염지훈은 벗은 재킷을 옆으로 던지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온준용에게 주먹을 날렸다.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던 온준용은 주먹 한 방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부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렸다.“도련님, 살살하세요. 괜히 여기서 죽으면 일이 복잡해집니다.”염지훈은 발로 온준용의 가슴을 짓밟으며 명령했다.“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려. 이대로 죽어버리면 내가 많이 아쉽지.”한차례의 주먹질과 발
학교에 도착한 온다연은 부랴부랴 활주로 입구로 달려갔고 마침내 헬기가 굉음을 내며 착륙했다.곧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서둘러 내려왔다.제일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유강후다.헬기를 탈 때 얼마나 조급했는지 유강후는 외투조차 챙겨입지 않았고 오늘 아침 온다연이 골라준 검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걸어왔다.유강후는 입구에 서 있는 온다연의 작은 그림자를 보고서야 긴장하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뚫어져라 온다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유강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사실 그는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온다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호원의 연락을 받았다.본능적으로 킬러의 표적이 됐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손에 든 계약서를 집어 던지고 무작정 학교로 달려오며 온다연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 번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연락 두절된 일분일초가 유강후에게는 고통이었다.온다연이 겁을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강후는 그녀가 지하 암살 조직의 타깃이 됐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모른다고 해서 위험이 곁에 없는 건 아니다.게다가 최근에 로운은 임무를 받은 킬러 몇 명이 경원에 도착했다고 전했다.비록 그 중 세명은 로운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었지만 남은 두 명에 대해서는 아는 정보가 없다.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온다연이 연락두절됐다.헬기에서 유강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른다.유강후의 걱정을 알 리가 없었던 온다연은 활주로 입구에 서서 순진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유강후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다연을 혼내고 싶었다.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온다연은 재빨리 달려가 그의 팔을 껴안았다.“갑자기 왜 왔어요?”유강후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핸드폰은 왜 꺼놨어?”그 질문을 들으니 온다연은 그가 연락되지 않아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다.설령 그렇다 한들 헬기까지 동원해서 찾으러 오는 건 솔직히 오바다.
유강후는 차갑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염지훈이 교수로 나타나서 네 곁을 맴도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걔는 처음부터 좋은 의도가 없었어.”온다연은 안색이 변했다.“그 사람은 원래 두 학교의 교수님이었어요.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내가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이 보는 앞에서 지도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휴학을 신청했다.온다연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뒤돌아 뛰쳐나갔다.유강후는 도망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명령했다.“따라가서 집으로 데려가.”“알겠습니다. 대표님.”이때 이권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도련님, 사실대로 다연 씨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유강후의 눈에 어둠이 번쩍였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안돼. 이다 하루코의 일이 다연이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영향을 끼쳤는지 알지? 마음을 다잡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푼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이제 막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착잡함이 드러났다.“권아, 넌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잘 알잖아. 다연이가 마음을 여는데 1년이 걸렸어.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사실대로 얘기하겠니.”이권이 말했다.“하지만 이럴수록 도련님에 대한 오해가 깊어질 겁니다.”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옆에서 많이 달래주면 돼. 모든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면 솔직하게 얘기할 거야.”이권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로운이었다.“대표님, 킬러 두 명이 더 나타났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두 사람과 합류했습니다.”“사모님과 진시현 씨가 있는 한옥을 노리고 있습니다. 워낙 치밀한 녀석들이라 위치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옥에 있는 사람을 노리는건 확실합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정체가 노출된 것 같습니다.”진시현은 온다연과 매우 닮은 이권의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한 온다연은 문이 열리기도 전에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다.나은별과 소이섭이 입구에 함께 나타난 것이다.나은별은 방금 운 것처럼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소이섭은 그녀의 어깨를 감싼 안은 채 안쓰러운 표정으로 위로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온다연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온다연도 이런 곳에서 그들과 마주친 게 뜻밖이었지만 엮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왔고 온다연이 들어가려고 하자 누군가 문을 막았다.고개를 들어보니 소이섭이 밖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막고 있었다.그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훑어봤다.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온다연은 진작에 산산조각 났을 정도다.그는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다.“다연 씨, 잠깐 얘기 좀 할까?”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경호원이 말을 가로챘다.“저희 사모님은 당신들과 할 얘기가 없습니다.”“사모님?”나은별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발끈하더니 안색이 돌변했다.“이 여자가 언제부터 사모님이 됐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지 않나?”사사건건 설명하기 귀찮았던 온다연은 손을 내저으며 반박하려던 경호원을 막았다.그녀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소이섭을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이 뭐죠?”온다연의 말투에서는 더 이상 소심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자신감과 당당함이 가득 담겨있었다.소이섭은 저도 모르게 온다연을 훑어봤다.심플한 다크 블루 원피스는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강조했고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높게 묶은 포니테일은 발랄하고 청순한 느낌을 주었다.가장 중요한 건 온다연의 분위기가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잔뜩 주눅이 든 채로 눈치만 살피던 온다연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여리여리한 겉모습은 전과 다를 바가 없지만 눈빛에서 풍기는 결단력과 차분함은 유강후과 비슷했다.온다연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차분하
나은별은 표정이 굳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온다연은 손에 낀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결혼하면 경제적인 부분은 제가 직접 관리할 거예요. 전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 거머리가 평생 내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시원하게 원하는 금액 불러요.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면 얼마든지 들어줄게요. 물론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다면 무시하겠습니다.”“온다연!”이때 화가 난 소이섭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다연에게 손가락질했다.“네가 뭔데 이렇게 당당해? 은별이랑 강후 사이를 네가 갈라놓을 수 있을 것 같아? 강후는 얘한테 빚을 졌어. 평생 갚아도 모자랄 목숨 빚이라고.”온다연은 피식 웃고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왜 이렇게 은별 씨를 감싸는 거죠? 설마 좋아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소씨 가문은 재력이든 권력이든 내세울 만한 게 없잖아요. 유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동의를 얻기 전에 은별 씨한테 바로 차이겠는데요? 그러니까 일찌감치 단념해요.”소이섭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온다연, 강후가 옆에 있으니까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언제까지 이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고작 너 때문에 강후가 형이랑 연을 끊었어. 어르신이 지금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한 건 알고 있지? 유씨 가문에서 널 며느리로 받아들일 것 같아?”그는 온다연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너만 아니었으면 은별이는 진작에 강후랑 결혼했어.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온다연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그래요? 그동안 여자에 눈이 먼 사람을 많이 봐왔는데 이섭 씨 같은 분은 처음이네요. 본인의 신세가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소이섭은 분을 못 이겨 온다연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옆에 있던 나은별이 그를 막아섰다.“그만해요. 여기 CCTV 있어요.”온다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은별 씨, 날로 발전하네요. CCTV 때문에 한 번 당해봐서 그런지 나름 똑똑해졌
온다연은 나은별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기뻐해야 하지 않나요? 왜 은별 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죠?”온다연은 유강후가 설명해 줬던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평소 안전하기로 소문난 바다였는데 왜 갑자기 상어가 나타나 인간을 공격했을까?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은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살아있는 걸 원하지 않나 봐요? 아니면 그 죽음이 은별 씨와 연관이 있는 건가?”사실 모든 건 온다연의 추측에 불과했는데 나은별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이더니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온다연은 단번에 팔을 뻗어 나은별의 손목을 잡았고 동시에 따귀를 날렸다.뺨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룸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나은별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재민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그 죽음이 저랑 연결됐다고 얘기할 수가 있죠? 심보가 고약하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마음 좀 곱게 먹으세요.”온다연은 피식 보고선 태연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그 타이밍에 강후 씨와 결혼하려고 발악했을까요?”“처음부터 은별 씨는 한재민을 좋아한 게 아니잖아요. 단지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그럴듯한 아빠를 찾아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온다연은 말하면서 무심코 소이섭을 쳐다봤다.그런데 뜻밖에도 소이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 또 헛소리하면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섭이 화를 내며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경호원이 다가와 소이섭의 손목을 잡으며 경고했다.“미리 충고드리는데 그쪽은 저한테 상대가 안 됩니다. 정말 사모님을 때리실 겁니까?”유강후의 경호원은 하나같이 특전사에 버금갔기에 소이섭은 본인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할 수 없이 그저 온다연을 째려보며 말했다.“은별이는 지금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
두 경호원은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그녀가 유강후의 목숨과도 다름없다는 사람인 걸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사모님.”집에 돌아와 보니 장화연도 있었다.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이곳으로 왔다.온다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최근에 공부하느라 바쁜 데다가 저녁에는 유강후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며칠 동안 아이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그녀와 아이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장화연은 한옥의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하는데 페인트 냄새가 아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잠깐 머무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비록 의심이 들었지만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어디에서 지내던 그녀에게는 똑같았다.온다연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놀아줬고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유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제멋대로 휴학 신청을 한 게 너무 화가 났다.염지훈이 교수로 온 게 온다연의 잘못도 아닌데 왜 갑자기 수업을 못 듣게 하냐는 말이다.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결정이다.그러다가 잠이 든 온다연은 잠결에 옆을 만졌고 텅 비어 있는 느낌에 공허함이 밀려와 괴로웠다.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유강후와의 카톡 대화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네 번째 시도를 했을 땐 통화가 연결됐으나 들려오는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환청이 들리는 건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누구세요?”그러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온다연은 굴하지 않고 다시 걸었지만 유강후는 받지 않았다.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잘못 들은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다시 한번 걸었을 때 통화가 연결됐고 이상한 기계음이 흘렀다.그러고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남자의 목소리는 유강후가 틀림없다.그들이 나눴던 사랑처럼 핸드폰 너머로는 서로에게 엉켜있는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공순하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대표님, 방금 전화가 여러 통 왔는데 이 비서님이랑 안에서 회의 중이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유강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고 그곳에는 온다연이 걸어온 부재중전화가 찍혀있었다.한 시간 전에 걸려 온 전화였다.유강후는 시간을 확인했고 지금은 새벽 3시 45분이다.이때 이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다연 씨가 도련님이 보고 싶은가 봐요.”줄곧 정색하던 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고 곧바로 온다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옷걸이에서 코트를 빼내더니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이때 이권이 말렸다.“도련님, 안 됩니다. 저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다연 씨 쪽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집사도 옆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우림 도련님도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도련님이 옆에 계시니 다연 씨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에 드러난 분노와 원망은 점점 더 짙어졌다.‘김원도,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유강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결코 발을 빼거나 물러선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김원도 때문에 피하는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아내와 아이의 목숨으로 위협하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죽여버릴 거야.’물론 김원도도 좋은 날만 보낸 건 아니다.불과 한 달 만에 미래그룹은 김씨 가문의 시장 점유율 70%를 먹어 치웠고 김신 그룹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있는 기업이라면 미래 그룹과 김신 그룹이 대치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아무도 섣불리 김신 그룹의 손을 잡지 않았다.김신 그룹의 주가는 한순간에 폭락하였고 보름도 채 안 되어 시가총액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그뿐만 아니라 동양국의 다른 가문에서는 김씨 가문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더불어 김원도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혼외 자식이 두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