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윤슬을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슬은 그 모습에 피식, 입꼬리를 비튼 웃음을 흘렸다.
‘말 안 해도 알아. 이런 상황에선 늘 말 못 했으니까.’
‘아니, 하고 싶지 않겠지.’
법적으로는 그녀가 아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윤슬이야말로 외부인이 된 기분이었다.
‘도대체 누가 부부고, 누가 애인인 건지.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네.’
강현이 앞서 걷고, 신아는 그 옆에서 다정히 걸음을 맞췄다.
윤슬은 신아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현실은 또렷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신아는 또다시 다정한 척을 시작했다.
“윤슬아, 정말 미안해. 강연이는... 내 커리어를 생각해서 나를 먼저 병원에 데려다준 거야.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하진 마.”
‘이 상황에서도 자기합리화는 여전하네. 커리어 타이틀을 내세우는 것도.’
윤슬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아니야, 강현이한테 네가 제일 중요하잖아. 그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뭐.”
이는 사실이었지만, 강현의 귀에 이 말투가 곱게 들릴 리 없었다.
“그게 무슨 말투야? 신아가 실수한 건 맞지만, 넌 뚜껑도 안 제대로 닫았잖아. 책임은 반반이지.”
윤슬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뭐든 다 내 탓이지. 네 눈에 나는 말 한마디만 해도 문제인 사람이니까.’
그저 고개를 들어 강현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강현은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묘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운 눈을 하게 된 거지? 소윤슬...’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자 신아가 곧장 분위기를 전환하며 웃었다.
“강현아, 그만해! 난 정말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그리고 윤슬이도 다쳤는데, 너무 몰아가지 마.”
그 말에 윤슬은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그래, 난 다친 걸로도 모자라, 지금은 누명을 쓴 가해자까지 됐어.’
‘그리고 넌 늘 그렇듯 남을 ‘이해하는’ 대단한 사람인 척하는 거지.’
‘참... 연기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다음부턴 좀 조심해.”
강현은 끝내 윤슬에게 그렇게 말했다.
“다음?”
윤슬은 웃음을 흘렸지만, 그 웃음은 싸늘했다.
‘다음은 없어. 그딴 기회, 더 이상 너한텐 주지 않을 거야.’
...
길가에 도착하던 찰나, 뒤에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아야!”
강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한 손으로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신아야!”
강현은 다급하게 불렀다.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윤슬을 안고 있던 팔을 갑자기 풀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던 윤슬은 몸이 그대로 앞으로 쏠리며 바닥에 강하게 부딪혔다.
“하...!!!”
날카로운 통증에 윤슬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강현은 이미 뒷일을 보지도 않은 채, 신아 쪽으로 달려가 있었다.
“많이 아파? 발목 접질린 거 같아? 괜찮아?”
신아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아파... 나... 나 모레 런웨이인데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치료받게 해줄게.”
강현은 이 말을 끝으로 신아를 안아 들고 병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걸음쯤 간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곳엔 윤슬이 있었다.
바닥에 앉은 채, 팔을 짚으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채로.
‘저 눈빛...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신아의 흐느낌이 곧 귀를 자극했다.
강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더는 망설이지 않고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
...
사람이 떠난 자리.
윤슬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허리도, 다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또 이런 식이야. 항상 그래.’
그녀는 말없이 손을 들어 택시 한 대를 세웠다.
차에 오르자 발끝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방금 넘어진 충격으로 돌 틈에 발가락이 찍힌 듯 피가 맺혀 있었고, 팔꿈치는 거칠게 긁혀 피딱지가 이미 올라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꼬리뼈는 찌릿하게 쑤셨다.
택시 안, 윤슬은 휴지로 피와 흙을 닦아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흘렀지만, 입술은 끝까지 다물려 있었다.
‘마지막 한 달... 딱, 한 달만 더 버티면 돼.’
‘그럼... 진짜 끝이야.’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메시지가 떠 있었다.
[미안해, 윤슬아. 강현이가 날 데려다주느라 또 널 두고 갔네. 나랑 조금 더 있어 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윤슬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핸드폰을 뒤집어 두었다.
‘응, 괜찮아. 이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
강현과 신아가 떨어져 지낸 지 벌써 2년.
하지만 강현은 여전히 신아만을 바라봤다.
신아가 강현의 눈앞에 서 있기만 하면,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택했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한테만 있는 감정이구나.’
윤슬은 핸드폰을 내려 두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른 앱을 열었다.
어제, 대학교 선배인 주경안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
[언제 들어와?]
경안은 윤슬이 해외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윤슬은 자신이 결혼한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줄곧 S시에 있었다.
S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
부강현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건 처음부터 강현이 원한 조건이었다.
“노출되지 마. 내 아내라는 타이틀은 필요하지만, 그 이름이 드러나선 안 돼.”
그렇게, 윤슬은 2년 동안 강현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집과 마트, 병원과 주방.
오롯이 ‘아내의 역할’만을 수행하며, 세상과는 단절된 삶이었다.
[아마 한 달 뒤쯤 여기를 정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에요.]
윤슬은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정리한다’는 말 안에 담긴 의미는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정리는... 부강현과의 모든 걸, 끝내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안의 답장이 도착했다.
[그럼 들어오는 대로 우리 회사로 와. 바로 기획팀 팀장 자리를 맡도록 해.]
윤슬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제안을 수락하진 않았다.
[그 자리가 아깝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예전의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결혼 후, 윤슬은 집안일과 강현의 스케줄에만 매달려 졸업하자마자 ‘전업주부’란 이름으로 살아왔다.
실상은, 전업 ‘아줌마’였다.
고학점과 상장, 그 많던 팀플 발표 자료들은 전부 책장 속에 먼지만 쌓인 채 잊혔다.
[그 자리, 오히려 너한텐 부족할걸? 너 그때 기억 안 나? 전공 장학금 자리에는 네 이름이 박혀 있었고, 2학년 땐 창업 경진대회에서 금상까지 따냈잖아. 진짜 대단했어, 윤슬아.]
윤슬은 그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
‘그랬지. 한때는... 누구보다 가능성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다시 손에 쥔 핸드폰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이젠 다시 시작해야 해.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나 자신으로.’
윤슬은 경안의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안에 적힌 ‘대단하다’라는 단어에 시선이 멈췄다.
‘내가 정말 대단했을까...? 그래, 한때는 정말로 그랬지.’
당시 윤슬은 학과 내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였다.
프레젠테이션이면 프레젠테이션, 리더십이면 리더십, 팀플이면 팀플대로 결과가 남았고, 그 시절 경안과 함께 창업 아이템으로 수상까지 휩쓸었다.
굳이 경안의 스타트업을 돕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윤슬은 대기업 전략팀에서
팀장 타이틀을 달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 분명히 기회는 있었는데... 내가 다 놓아버린 거야.’
지난 2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윤슬의 선택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길이 되었다.
모든 걸 포기했다.
자존심도, 커리어도.
강현이 고개 한 번 돌려주는 게 하루의 전부가 되었고, 작은 관심 하나에 숨을 참고 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내가 나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게.’
경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윤슬은 손에 쥔 핸드폰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금이 간 액정, 깜빡이는 배터리.
그 모든 게 지금의 그녀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전원을 껐다.
더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윤슬은 시트에 깊게 파고들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아주 잠시만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어.’
하지만, 머릿속은 잠시 하얘졌다가 부태기 회장을 투자 미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때로 화면이 전환됐다.
그때, 경안과 함께 창업을 준비하던 윤슬은 투자받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부씨 가문의 정점, 부태기 회장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미팅이 잡혔고, 부태기는 제안했다.
“투자는 하도록 하지.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내 손자가 한신아 같은 여자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그러니까 윤슬 학생이 내 손자와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 순간 윤슬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결혼? 부강현이랑?’
그 제안은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달콤했다.
‘이게 뭐야... 기회야? 아니면... 운명?’
고등학교 때부터 윤슬은 강현을 좋아해 왔다.
조용히, 혼자만 알고 있는 마음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 강현이 신아와 사귀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강현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기회.
투자까지 따라오는 ‘조건’.
그건 당시의 윤슬에게 말 그대로 ‘일석이조’였다.
투자도 받고, 사랑도 얻는다니... 그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윤슬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망설임도, 계산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기회가 아닌 덫이었다.
‘그땐 너무 욕심냈어. 아, 욕심이 아닌...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둘 다였겠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현실 앞에 너무도 무력했고,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윤슬은 점점 사라졌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건... 사실... 나 혼자 만든 환상이었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었지. 그건 선물이 아니라 묵은 쓰레기였는데...’
‘난 그걸 진심으로 안았지만,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상처뿐이었어.’
그리고 지금, 윤슬은 그 손에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인생을 쥐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