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7화. 지옥(1)

Author: 유소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13:36:14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

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

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

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준비 다 되셨을까요?”

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죠. 가자, 유연아.”

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

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 좋아요! 조금 더 웃으시고~”

사진작가의 호응과 함께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와, 저 딸은 진짜 놀랄 정도로 예쁘네. 나중에 연예인으로 데뷔하려나?”

“그니까. 돈도 많은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하고. 쟤는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부럽다 부러워.”

사진작가의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탄성과 환호성이 끊이지 않는 거실 위층에서, 홀로 계단에 숨어 이 모습을 지켜보던 채원은 고개를 숙여 치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족사진 촬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기대감에 들떠 옷장에서 꺼낸 옷이었다. 비록 유연이 입던 옷이라 조금 낡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깨끗한 옷이었다.

채원에게는 조금 컸지만, 소매를 두 번 접으니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그래도 그녀는 좋았다. 이 옷을 입고 언니의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계단에 앉아 있던 그때였다.

다음 컷을 위해 짐을 정리하던 보조 스태프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 꼬마야, 여기서 뭐 해?”

그의 물음에 채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절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당황한 그녀가 우물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애꿎은 치마만 꽉 쥐는 그녀에, 스태프는 의아해하더니 고개를 돌려 사진 촬영이 한창인 현장을 바라봤다.

“촬영 인원은 세 명이라고 들었는데……? 너도 혹시 오늘 촬영하니?”

스태프의 질문에 채원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자신은 촬영이 없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불쑥 튀어나오는 욕심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이 사람에게 부탁하면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 저…….”

결국 기대감을 품고 스태프를 부르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뭐 하니?”

잠시 촬영을 끊은 백재연이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 채원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아…… 그게…….”

채원이 손을 덜덜 떨며 그녀를 바라봤다. 겁먹은 눈망울이 일렁거리고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이러면 엄마가 더 화내실 텐데.’

얼른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두려움에 잠식된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스태프가 난처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무슨 일이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진작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스태프는 난처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며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 애가 혼자 있길래……. 그래서 말을 걸었는데, 낯선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좀 놀랐나 봐요. 죄송합니다.”

스태프의 말에 사진작가의 시선이 채원에게 향했다.

저택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홀로 오래된 원피스와 혼자서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부스스한 머리.

채원을 훑어본 사진작가는 고개를 돌려 백재연을 바라봤다.

“혹시 이 아이는……?”

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족사진 촬영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비즈니스였다. 보는 눈들이 많은 만큼, 뭐 하나라도 걸리면 언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채원에게도 오늘은 방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었다.

골치 아픈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가, 표정을 풀고 사진작가를 바라봤다.

“아, 이 아이는 촬영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니?”

사진작가가 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채원을 바라보는 눈이 좋은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빛났다.

“작가님, 이 애는-”

백재연이 둘러대며 상황을 얼른 정리하려던 그때, 머리를 고치던 유연이 다가왔다.

“죄송해요. 제 친구 동생인데, 전부터 저희 집 놀러 오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거든요. 그래서 촬영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라고 얘기했었는데, 못 참고 일찍 왔나 봐요.”

유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자연스럽고 태연한 말투에 곤란한 듯 미소 짓는 얼굴까지 완벽했다.

“아, 친구 동생.”

유연의 말을 들은 사진작가는 채원을 다시 바라봤다.

그녀를 다시 훑어보던 그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다르더라.”

별다른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채원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촬영 때문에 잠깐 제 방에 있으라고 했는데. 미안, 심심해서 내려왔구나?”

유연이 채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표정이며 말투며 모든 게 온화했다. 이 모습을 보는 다른 이들은 됨됨이까지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채원은 이 말이 단순한 질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죄송해요…….”

치맛자락을 꽉 잡은 채원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사진작가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뭐. 애들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 거 보면 유연 양은 참 의젓해요? 어른스럽고.”

“저희의 자랑이죠.”

사진작가의 칭찬에 백재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다시 유연에게로 화제가 돌아가자, 사진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다.

“뭐, 어쨌든. 조금 쉬셨으면 다시 촬영 이어서 할까요?”

“네, 그러죠.”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가 다시 촬영 장소로 돌아갔다.

어느새 채원은 잊은 두 사람에, 백재연은 그들을 바라보다 싸늘한 눈으로 채원을 바라봤다.

“윤채원.”

차가운 목소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분명히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푹 숙인 채원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백재연은 채원을 내려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네 방으로 들어가.”

주변의 시선 탓에 언성을 높이지 못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재연은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은 듯 혀를 한 번 차고 거실로 이동했다.

“유연아, 가자.”

“네, 엄마.”

유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재연의 뒤를 따르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채원을 바라봤다. 모두의 앞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졌다.

“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채원을 불렀다.

채원이 울상의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유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제발 주제 파악이라는 걸 좀 해. 눈치 없게 이런 날에도 굳이 기어 나와서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야겠어?”

“…… 미안해…….”

“너 때문에 엄마가 곤란해질 뻔했어. 나 아니었으면 네가 그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겠어? 나한테 고마워해.”

“…… 응, 고마워.”

멍청한 계집애. 유연은 제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는 채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런 애가 자신의 동생일 수 있는 건지. 채원의 존재는 부모는 물론 유연에게도 수치였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네 방으로 꺼져.”

“…… 응.”

“아, 참.”

계단을 올라가려던 채원을 유연이 다시 불러 세웠다.

채원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자, 유연의 시선이 그녀가 입고 있던 원피스로 향했다.

“그 옷. 내가 입던 거지?”

유연의 물음에 채원은 말없이 원피스를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뺏길까 걱정하는 듯한 모습에 유연은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시 돌려준다고 해도 더러워져서 안 입어. 너는 내가 뭘 했다고 맨날 겁부터 먹어?”

“…… 미안…….”

“내가 버린 옷 다시 주워 입는 재활용 정신. 뭐, 나쁘지는 않은데, 내 앞에서는 웬만하면 입지 마. 기분 나빠.”

미간을 찌푸리며 위아래로 훑던 그녀가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은 유연은 거실로 걸어가 머리 수정을 다시 이어받았다.

채원은 멍하니 거실 쪽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바라봤다.

채원은 자기 옷이 없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은 전부 유연이 입다가 버린 옷들뿐이었다. 그런데 제 앞에서는 입지 말라니. 이건 그냥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이었다. 입술을 꾹 물며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다, 순간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채원이 다급하게 계단 위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거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채원의 방은 이층 맨 안쪽에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어둠과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창고였던 그녀의 방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오래된 전등불 하나가 이 방의 유일한 불빛이었다.

구석에는 낡은 옷장과 그 옆에 오래된 나무 책상이 있었다. 책상은 한쪽 다리가 짧은 탓에 두꺼운 종이를 아래 받쳐 놓았다. 벽에 바짝 붙어 있는 좁은 침대는 그녀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모든 것이 유연이 어릴 때 쓰던 것들이지만, 채원은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여기에 원래부터 네 것은 없어. 채원이 말을 알아듣기도 전부터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말이었다.

화려한 저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좁고 어두운 낡은 방.

멍하니 방을 바라보던 채원은 문득 자신은 왜 언니처럼 넓고 좋은 방을 쓰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려한 드레스와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반짝거리는 고운 화장. 그에 비해 부스스한 머리와 조금 큰 낡은 원피스, 잔뜩 움츠러든 어깨. 

누가 봐도 유연은 이 저택에 어울리는 주인공이었고, 채원은 전혀 걸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다르더라.’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던 사진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채원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꾹 깨물며 조용히 옷을 벗었다.

언니가 입던 옷을 입고, 언니처럼 얌전히 웃고, 언니처럼 공부도 잘하면. 그러면 나도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미 낡은 옷이지만 혹시라도 주름이 갈까, 작은 손은 조심스럽게 옷을 접고 꾹꾹 눌렀다. 혹시라도 옷 위로 떨어지면 지저분해질까,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옷을 정리하고 나니 촬영이 끝났는지 웃음과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돌아가면 엄마가 자신을 부를지도 몰랐다. 왜 내려왔느냐고 다시 혼낼 수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순간이 그것뿐이라도 괜찮았다. 채원은 혹시라도 문 너머의 소리를 놓칠까, 숨소리마저 죽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이 되어도, 채원을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8화. 지옥(2)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7화. 지옥(1)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6화. 균열(4)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5화. 균열(3)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4화. 균열(2)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13화. 균열(1)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