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박규형은 덩치 큰 체구로 차 문을 가로막으며 도아린을 간절히 쳐다봤다.“어제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사모님께 그런 실례를 범하다니. 제발 저 한 번만 용서하시고 대표님께 잘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앞으로 더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이때 맞은편에서 또 한 명이 불현듯 나타나더니 박규형과 나란히 서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저희 아트 캠퍼니에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사모님 같은 분을 초대 가수로 모시다니,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이런 분을 몰라뵙고 어제는 너무 어리석게 실례를 범했어요.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설쳐댔습니다. 사모님의 은혜는 평생 간직하고 어제 일도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연예 기획사 매니저도 처참한 몰골로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뺨을 내리쳤다.옆에 있던 두 명의 벨보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눈치채더니 들어가서 지배인께 알렸다.“건후 씨가 두 사람한테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받을 마음 전혀 없습니다. 어제 일은 반드시 끝까지 추궁할 거예요.”도아린이 왼쪽으로 걸어가자 두 사람도 곧바로 따라오며 어떻게든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건후 씨 금방 나올 텐데 계속 내 앞길 막으면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두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녀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기사님, 얼른 출발해요!”차가 떠나간 후에야 둘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미친 듯이 쫓아갔다.“사모님, 천사 같은 마음으로 부디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제발 우릴 살려달라고요!”“제발요. 사모님 말 한마디면 저희도 금방 풀려날 거예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이때 교차로에 갑자기 차 한 대가 뛰쳐나와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연예 기획사 매니저는 숨을 헐떡이며 박규형에게 말했다.“대표님, 저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이참에 우리 그냥 배 대표님 찾아갈까요?”“멍청한 놈!”박규형은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씩씩거리며 대답했다.“배건후가 우릴 만나줬다면 굳이 쟤한테
“네 남동생 죽었어?”“아직, 하지만 별반 차이 없어.”도유준은 종업원을 불러 식당에서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술도 한 병 더 시켰다.“다들 마음껏 마셔! 이따가 가게에 내려가서 먹고 싶은 디저트 있으면 편하게 가져가고.”“도울 디저트 도련님께서 이미 허락하셨으니 사양하지 않을게.”곧이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녀석들과 등을 대고 앉은 소유정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양아들 주제에 가산을 물려받을 생각 하다니?”도아린이 콧방귀를 뀌었다.“저놈이 왜 도 씨인지 알아?”양아들인지 아닌지는 도정국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다.식사를 마칠 때쯤 도아린은 주현정의 연락을 받고 먼저 가봐야 한다고 일어났고, 소유정도 입을 닦고는 가려고 했다.도아린은 입만 벙긋거리며 계산하러 간다고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볼캡을 가리켰다.비록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소유정은 나름 얼굴이 알려진 가수였다. 게다가 아침에 병원에서 나와 안색도 창백하고, 화장도 안 했는지라 조금이라도 가리는 게 나았다.두 여자가 떠난 뒤 도유준과 친구들은 흥이 나서 술을 더 시켰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술판을 벌였다.도유준은 잘난 척하려고 일부러 종업원을 불러서 계산했다.종업원이 계산서와 카드 단말기를 건네주자 그는 비밀번호를 눌렀고, 이내 잔액 부족이 떴다.나머지 세 친구는 가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매달 생활비가 고작 40만 원에 불과했다. 한 끼 식사에 족히 60만 원이 나왔으니 더치페이하기 싫어서 갖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카드 단말기가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 신발 샀을 때만 하더라도 잔액이 200만 원 넘었는데?”종업원은 그가 산 신발 따위 관심이 없었고, 다른 카드 단말기로 결제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계단 입구에 숨어서 기웃거리는 친구들을 보자 도유준은 점점 짜증이 났다.어렸을 적부터 출신 때문에 예민하고 의심이 많아진지라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면 마치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는 듯한 환청이
주현정의 병실에 들어선 도아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듯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밝은 색상의 명품 스타일 투피스를 입고 거실에서 친구를 접대했다.“아린아, 이리 와. 소개해줄게.”주현정이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내 절친이자 최고의 여배우인 함예진이야. 여긴 내 며느리 도아린이고.”함예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도아린을 위아래로 훑었고,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생얼이지만 외모가 출중했고, 몸에 별다른 사치품을 지니지 않았으나 결코 눈길을 사로잡는 아우라를 풍겼다.이런 부류의 사람은 액세서리 따위 안중에 없거나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이모라고 부르면 돼.”“안녕하세요, 이모.”함예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낀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 했네. 귀한 건 아니라서 편하게 하고 다녀.”귀한 게 아니라니?영화계 거물은 몇십 억이 넘는 액세서리도 우습게 보는 건가?도아린은 반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3개의 깃털이 뿔 모양을 이룬 반지는 일명 유니콘 링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함예진이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핸드메이드 자수 드레스와 매치한 클래식 아이템이었다.“저한테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서 받을 수가 없어요.”“줄 때 가져.”주현정이 반지를 건네받아 도아린의 손에 끼워주었다.“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달라고 하는 작품만 아니었다면 연성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오색찬란한 반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모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식사 자리에서 도아린은 함예진이 연성을 찾은 진짜 목적에 대해 전해 들었다. 바로 이번 송민혁 감독의 새 작품에서 유능한 왕후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정상급에 속했지만 조연이라고 해서 출연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우선순위로 두고 대본을 선택했다.“아린아, 가서 이모랑 내가 마실 주스
함예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주현정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생선 드세요. 이 부분은 가시가 없거든요. 이모도 많이 드세요.”“역시 날 챙겨주는 건 며느리뿐이네.”함예진도 웃으면서 접시를 건넸다.“고마워.”아무도 입구에 있는 손보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더니 다시 배건후의 이름을 불렀다.배건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외식하면 가장 먼저 냅킨을 깔고 필요 없는 식기를 치워주곤 했는데 오늘은 마치 공기 취급했다.머릿속으로 어젯밤 그녀의 행세를 되뇌며 오늘 아침 결판을 내기도 전에 잽싸게 도망친 일이 떠올라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이리 와서 앉아.”배건후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자 손보미는 활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어머님, 선생님. 아린 씨, 오랜만이야.”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말투로 인사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방금 화장실에서 보지 않았나?”도아린은 반찬을 한 입 집어 먹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손보미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표정이 어찌나 억울한지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싶었다.함예진은 온갖 대상을 휩쓴 배우답게 진심인지 연기인지 한눈에 간파했다.이내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개 안 해줘?”“저는 손보미라고 하고, 이번 송민혁 감독님의 새 작품에서 ‘예원’ 역을 맡았어요. 왕후 역할이 다름 아닌 함예진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건후 씨한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손보미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함예진은 못 들은 척 배건후만 쳐다보았다.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손보미라고 합니다.”“아,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경미한 교통사고에도 구급차를 부르는 바람에 결국 임산부를 유산하게 한 그 무명 배우?”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인정사정없는 말을 내뱉을 줄이야.손보미의 얼굴이
뭐지?뒤에서 몰래 수작 부리는 게 성에 안 차서 이제는 대놓고 유혹하는 건가?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제 그렇게 위험천만한 순간에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더니 도와주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기 바 빴다.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물밀듯이 밀려왔다.역시 남자 따위는 필요 없었고, 솔로가 최고였다.“이모가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아요?”“물론이지. 넌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고 이해력도 뛰어나잖아.”함예진은 팔꿈치로 주현정을 슬쩍 찌르며 말했다.“아직 하녀 역할이 남았는데 아린을 추천해볼까?”주현정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흘겨보는 배건후 때문에 손보미는 허공에 뻗은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아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도아린의 말을 듣고 나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바보 같은 년, 주현정의 시중을 3년이나 들었는데 연예계에 종사하는 며느리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챘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일찌감치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주현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이때, 손보미가 끼어들었다.“하긴, 이번 기회에 도전해 봐. 나도 같은 제작팀이거든? 함예진 선생님께서 잘 이끌어주실 테니까 열심히 배우면 앞으로 연기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야.”도아린이 합류하게 된다면 제 발로 찾아와 괴롭힘을 자처하는 꼴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주현정에게 바짝 다가간 도아린은 넌지시 물었다.“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주현정이 착잡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연기해보고 싶어?”“어머님의 의견에 따를게요.”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럼 해 봐.”이내 함예진을 바라보았다.“우리 며느리를 믿고 맡기는 거니까 혹시라도 괴롭히는 사람이 생긴다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당연하지.”주현정, 함예진, 도아린은 주스로 건배했다.배건후는 꿈쩍도 안 했고, 손보미는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한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끼얹었다고?”남자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손보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불꽃놀이도 해주기로 약속했잖아? 도아린이 손찌검만 하지 않는 이상 욕한다고 한들 참을 수 있어.”배건후는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손보미가 위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저녁에 뭐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나도 마침 배가 고프네. 근처에 비건 레스토랑이 있는데 같이 갈래?”배건후는 담뱃재를 툭툭 털면서 조수현 앞으로 걸어갔다.“집까지 데려다줘.”손보미는 마지못해 차에 탔고, 문이 닫히자마자 못마땅한 듯 눈빛이 험악하게 번뜩였다.이내 고개를 숙여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사장님, 혹시 대역은 찾으셨나요?]...주현정을 부축해서 걸어가던 도아린의 등 뒤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재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운수가 사납기 마련이네.”소매를 붙잡고 있는 함예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문에 삐쭉 튀어나온 못 때문에 소매가 걸려서 찢어졌는데 몇백만 원이 넘는 옷을 버리게 생겼다.도아린이 다가가 힐긋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수선해드릴게요.”“옷 수선도 할 줄 알아?”놀라움이 담긴 말투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무덤덤하기만 했다.병실로 돌아간 다음 주현정은 함예진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찾아주었고, 이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한편, 도아린은 휴게실에서 옷을 수선하고 있었다.30분 뒤, 그녀는 옷을 들고나와서 말했다.“제가 손재주가 별로 없어서 혹시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함예진이 건네받는 순간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찢어진 부분에는 같은 색상의 실로 장미꽃이 수 놓여 있었는데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게다가 티가 전혀 나지 않을뿐더러 화룡점정의 효과까지 추가되었다.이내 주현정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요즘 바느질할 줄 아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이런 보물 같은 며느리를 얻다니.”주현
소유정은 도아린을 소파에 앉히고 과일 차를 건넸다.“너 대신 분풀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사회가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줄이야!”대역은 십중팔구 정해진 일이었지만 손보미 그년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송민혁에게 조연이라도 좋으니 도아린을 추천하려고 했다.만약 자수 놓는 신만 있다면 손보미가 찾은 ‘대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거로 확신했다.그러나 남한테 어렵게 부탁해서 끼워 넣은 프로필이 단지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1차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만약 내가 톱 가수였다면 조연 정도 추천해주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이게 다 무능한 내 잘못이야.”“아니야.”도아린은 소유정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감독님께서 오디션 받아보라고 하셨어.”“정말?!”소유정이 벌떡 일어나 소파에 서서 도아린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연락이 왔어? 어떤 역할이래?”“오디션 하러 가봐야 알 것 같아.”다음 날.주현정은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은 며칠 더 기다려야 하니까 우선 킹캐슬부터 다녀오라고 말했다.이제 곧 그녀의 명의가 될 예정이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라는 의도였다.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도착하면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라고 당부까지 했다.킹캐슬은 산을 등지고 호수를 마주하고 있어 많은 사람의 인생샷 명소로 유명했다.특히 신혼부부나 커플들이 오래된 성을 연상케 하는 별장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첫 번째로 풍경이 아름다워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고, 두 번째로 이는 사랑의 증표와 같은 건물로서 자신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별장에 정기적으로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기에 먼지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면 대청소를 한 번 해야만 했다.도아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가 되었고, 남향 방 하나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근처에서 장을 보고 저녁에 소유정과 맛있는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주현정의 말에 의하면 지하실에 자전거가 있지만
그녀는 바로 손보미였다.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여자는 두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났다.이때, 댓글 창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떴다.[네가 나오는 드라마는 안 볼 거야. 연기도 못하는 게!]상대방은 곧바로 강퇴당했다.[포토샵 전문 여배우 주제에 눈꼴 사납게 하지 말고 얼른 은퇴해.]또 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축하 메시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정적인 내용은 전부 차단되었다.도아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예계는 역시나 복잡했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칭찬과 욕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손보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비하하는 댓글 창은 애써 무시하고 김지민이 사전에 준비한 멘트를 달달 외워서 읊어댔다.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라이브를 시청하는 인원수는 천 명대에서 금세 만 명을 넘어섰다.그러나 부정적인 내용도 갈수록 많아졌다.[뻔뻔스럽게 공공 자원이나 무단 점용하고!][길 걸을 때 잘 보고 다녀. 고작 발목 삐끗했다고 구급차 부르지 말고. 아리산은 안 그래도 진입하기 힘든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다 나았을지도 모르니까.]도아린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아리산?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이지 않은가?곧이어 테라스로 나가자 저 멀리 모닥불과 촬영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부정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 얼른 배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김지민은 이어폰을 통해 손보미에게 알렸다.“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미스터리 게스트에게 전화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볼게요.”손보미는 휴대폰을 꺼내면서 말했다.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일 끝났어?”“왜?”그녀는 남자의 쌀쌀맞은 말투는 가뿐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지금 생일 축하해주는 팬들이 엄청 많아서 너무 행복해. 항상 잘 챙겨줘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배건후는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카메라에 못마땅한 표정이 잡히지 않도록 손보미는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섰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