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배건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동안 다짜고짜 꾸짖거나 누명을 씌웠을 때 아무리 억울해도 꾹 참고 변명해 본 적이 없었다.오늘 그녀를 모욕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물론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안하무인에 막무가내인 배지유를 보고 무슨 생각 할까 알고 싶었을 뿐이다.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소매를 정리하며 가까이 다가왔다.“지유가 술을 마셔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고작 이게 다인가?무려 새언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어미 없는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도 모자라 남동생은 남편 돈을 빼먹는 존재라고 하는데 제정신이 아닌 탓이라고 얼버무리다니?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의 약점만 쏙쏙 골라서 비꼬겠는가?비아냥거림과 경멸이 가득한 여자의 표정을 보자 배건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엄마가 이미 때렸으니까...”그러나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왜냐하면 주현정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다.방금 퇴원한 그녀는 다시 VIP 병동에 입원했다.아무리 신분이 존귀한 사람이라도 의사 앞에서는 한낱 환자에 불과했다. 주치의가 노발대발하며 호통쳤다.“환자분께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자꾸 자극합니까?”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고, 천생 귀공자답게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냈다.의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도아린에게 또다시 환자를 흥분하게 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진료실을 나서자 배건후는 도아린을 막아섰다.“엄마가 깨어나면 지유 얘기 잘 좀 해줘.”도아린은 화가 나서 되레 웃음이 터졌다.욕설을 퍼부은 사람을 용서할뿐더러 사정까지 하라니?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맞아요?”배건후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갔다.“어렸을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란 녀석이야. 부모님도 여태껏 혼내신 적이 없는데 오늘 너 때문에 엄마가 지유의 뺨을 때렸어.”“그래서?”배씨 가문의 귀한
하지만 검사 결과는 주현정이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아마도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기에 환자가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차라리 이대로 잊고 지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떠올려 속상해서 건강까지 해치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의사의 말에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더욱 당당하게 강요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기어코 지유랑 싸워서 병세를 악화하게 할 거야?”도아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골조차 보기 싫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문나연이었다.“통화 괜찮아?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그녀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끼어들었다.“지금 찾으러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이내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고집스러운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배건후는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배지유한테서 연락이 왔다.“오빠, 엄마 괜찮아요? 얼른 경호원 치워줘요. 엄마 보러 가야 하니까.”“집에서 반성해.”비록 병원은 금연이지만 배건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술집에서 술을 처먹고 외박까지 해? 간덩이가 부었어?”도아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늦게까지 놀다 온 것에 화가 난 듯한 오빠의 말투를 듣자 배지유는 금세 어깨가 으쓱했다.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분고분했다.“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좀 늦었어요.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나저나 엄마는 괜찮아요?”배건후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엄마 앞에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마.”대신 해결해줬다는 뜻인가? 역시 그녀를 가장 아끼는 건 오빠밖에 없었다.“알았어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에 마구 뒹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도아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나 뺨 맞게 한 것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워낙 잔꾀가 많아서 혹시 가는 길에 내 옷을 망가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겠지, 설마 어시한테 배상시키겠어?”손보미는 옷이 들어 있는 캐리어를 덥석 붙잡았다.도아린이 니들 케이스를 열자마자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닫았다.“개나 소나 아현 씨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수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만 가볼게.”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떠났다.하지만 손보미는 어디까지나 배짱부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어시스턴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이게 얼마짜리 드레스인지 알아? 네가 배씨 가문에 3년 동안 있다고 한들 소유하기 힘든 브랜드라고!”손보미는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문나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어떻게 도아린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게 할 수 있지? 아현 씨도 사람 보는 눈이 참 없군.”도아린의 뒤를 따르던 문나연이 입을 열었다.“지금 아현 씨가 눈이 멀었다고 저주한 거야? 토씨 하나 안 빼먹고 전해줄게.”결국 신발 커버를 벗고 나가려는 도아린을 보자 손보미는 이를 악물고 캐리어를 툭툭 쳤다.“농담이었으니까 확인해 봐.”그녀에게 옷을 무조건 수선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안 그래도 급이 낮다고 브랜드사에서 마지못해 대여해줬는데, 더욱이 다른 연예인이 출연 예정인 예능 프로그램 의상으로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다시 말해서 배상만 한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연예계는 워낙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곳이라 설령 드레스를 실수로 망가뜨렸다고 할지언정 기자들이 한술 더 떠서 누군가를 겨냥하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보도될 가능성이 컸다.물론 잘나가는 쩐주가 당사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배건후와 결혼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상대방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연예계 생활이 마냥 순탄치 않을지도 모른다.“글쎄, 우리가 농담할 정도로 친했더라?”도아린이 돌아왔다.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다.손보미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괜히 더 망가뜨리
그녀는 허리를 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건후 씨 카드 긁으려고? 우리 아직 부부 사이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수속하기 전까지 보미 씨는 내연녀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달고 살 텐데?”손보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묵묵히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도아린은 드레스의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배건후가 수선비를 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비싸게 불렀을 텐데.결국 드레스를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고 사인할 계약서를 꺼내서 전해주었다.손보미는 종이를 넘기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연성대학교의 간판스타 도아린, 다재다능은 물론 졸업하기도 전에 디자인 대상을 받더니 고작 가정부 신세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건가? 3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 자존심도 이미 바닥났을 테고,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다만 타격이 1도 없는 상대방을 보자 마지못해 펜을 들고 사인했다.도아린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문나연도 발견했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그동안 도아린은 소유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같은 동네에 방을 따로 구했다.치마 겉감의 수선을 마치고 도아린은 몸이 뻐근한 나머지 일어나서 스트레칭했다.이때, 소유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살려줘.”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군가 그녀를 허위사실 유포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고 말했다.도아린은 서둘러 경찰서로 달려갔다.소유정을 발견하는 순간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비록 그녀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인으로 경찰서에 들락이는 모습이 찍힌 이상 추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무슨 일인데?”“내가 업로드한 게시물 때문에 뭐라고 하잖아!”도아린의 손을 붙잡은 소유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친구 대신 분풀이하려고 손보미의 흑역사
키가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사내가 겁먹을 일이 뭐 있겠는가?심지어 그는 배건후이지 않은가?다른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면 몰라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남을 패가망신시킬 사람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겁이 나다니?도아린은 경찰의 얼굴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습격범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내가 건후 씨 아내가 맞아요?”도아린은 분노를 억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남자의 그윽한 눈동자는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이내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당연하죠. 건후 씨 아내는 나뿐이라면서?”도아린은 이를 악물고 말을 마쳤다.“지금 한 말 꼭 기억해.”배건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자 도아린은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경찰은 왠지 모르게 이용당한 느낌에 기분이 찝찝했다.그리고 긴 시간의 해명 끝에 도아린은 비로소 수속을 마치고 소유정을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소유정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도아린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됐어, 이제 그만 화 풀어. 괜히 몸 상하면 본인만 손해야.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나 바쁜 사람이야.”남자는 차 문 옆에 서서 재촉했다.소유정의 집에 도착하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그녀를 먼저 올려보냈다.우정윤은 눈치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이내 내부에 여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내가 삐딱하게 나왔다고 해서 친구한테 복수한 거예요?”배건후는 가슴을 두드리는 여자의 주먹을 덥석 붙잡고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자업자득이야.”“유정은 사실만 얘기했거든요?”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레 남을 비난하는 남자를 보자 도아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소유정만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밖에서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라요.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어요. 괜히 무고한 사람 연루시키지 말고!”“증거가 있는데 계속 사실이라고 우길 거야?”배건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대시보드를
배건후는 흠칫 놀랐다.항상 얌전하고 조신했던 여자가 이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반짝거리던 커다란 눈동자로 환심을 사려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오로지 혐오와 증오만 남아 있었다.배건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도아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문이 철컥 잠겼다.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죠?!”“혹시 몰라 경고하는데.”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금 경찰서에서 한 말은 기록에 남거든? 만약 번복이라도 한다면 네 친구는 법적인 책임을 물을 거야.”이런 치사한 개자식 같으니라고!도아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용기를 내어 뺨을 날리려는 순간 차 문이 다시 열렸다.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내일 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거야.”쿵!도아린은 문을 세게 닫고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 올라갔다.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방금 무슨 연회라고 했지? 육씨 가문이라니? 설마 육민재가 돌아왔나?그럴 리가! 내일은 나영옥의 팔순 잔치이지 않은가?어쨌거나 지난 3년 동안 육민재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우정윤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왜 대표님 덕분에 손보미 에이전트에서 그냥 넘어갔다고 해명하지 않으세요?”“어차피 말해줘도 안 믿을 거야.”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위층에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다.그동안 우정윤은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고집에 불과했다.시도해보지도 않고 어찌 믿을지 말지 안다는 말인가?사모님이 부잣집 여사님들 사이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회의까지 미루고 도와주러 갔으면서 굳이 멍청하다는 둥, 영유아나 할 법한 낚시 놀이 장난감 같은 게임마저 진다는 둥 비웃기 바빴다.또한 손보미가 소유
배지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손주를 얼마나 바라왔는지 알아요? 만약 언니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절대로 배씨 가문 핏줄을 밖에서 떠돌아다니게 놔두실 분이 아니라서 무조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할 거예요.”손보미는 아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임신할 계획은 없었다.반면, 배건후는 고작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아린과 결혼할 만큼 책임감이 넘치는 남자였다.하지만 그녀는 도아린과 달리 배건후와 연결고리가 있다.거기다 관계까지 가지면 결코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으리라 믿었다.“지유야, 물론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절대로 네 오빠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마. 진짜 화가 나면 아무도 감당 못 할 테니까.”“나한테 맡겨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을 구했다.비록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에 불과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게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결제하려는 순간 그제야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게 다 빌어먹을 도아린의 탓이었다.아침에 엄마와 오빠 앞에서 심통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한 게 분명했다.결국 외출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되다니!‘나쁜 년, 앞으로 너랑 전쟁을 선포한다!’...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소유정은 아침 댓바람부터 도아린을 끌고 연성에서 제일 유명한 드레스 숍으로 향했다.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 두 명이 들어서자 점원이 잽싸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혹시 드레스를 찾고 계시나요? 어제 신상품이 막 도착했거든요.”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양쪽에 줄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장에 진열된 의상은 훨씬 더 고급져 보였다.즉, 한 마디로 아주 사치스러웠다.그중에서 도아린은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한 드레스에 시선이 빼앗겼다.실버 머메이드 드레스는 마치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물결처럼 은은한 빛을 띠었고, 한쪽 어깨가 노
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