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순간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하지만 난간에는 정말 그녀가 아무리 찾아도 소식조차 없었던 율이가 서 있었다.그새 율이는 키가 많이 자랐고 얼굴도 건강해 보였다.한정판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울코트를 걸치고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숱이 적고 색도 노랗게 빛났지만 바닷바람에 흩날려 부드럽게 실처럼 퍼졌다.얼굴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며 고개를 돌리던 율이는 도아린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뜀박질하며 손을 흔들었다.“아린 언니! 여기요!”바닷바람에 율이의 외침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기쁨은 그대로였다.율이도 도아린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돌봐주는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잘 듣고 치료를 잘 받아서 몸이 회복되고 나서야 도아린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그래서 율이는 여러 번의 조직 검사와 고통스러운 치료도 이를 악물고 참아왔었다.배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반가움도 잠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이 시점에서 율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육하경 씨, 무슨 꿍꿍인가요?”“아린 씨 생각은요?”육하경이 도아린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도아린은 굳어져서 그의 품에 의지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지희를 가지고 협박하는 걸로 모자라 이제는 율이까지 이용해 나를 압박하려는 걸까?’“지희는 보육원으로 돌아갔어요?”도아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들을 보육원에 데려다주라고 했어요.”육하경이 부드럽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그 사람들이 다시 보육원을 떠날지는 모르겠지만요.”“당신!”도아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달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두 배가 아주 가까워지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율이의 뒤로 다가갔다.육하경은 손을 흔들며 그에게 신호를 보냈고 검은 옷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율이에게 다가갔다.“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아린 언니랑 아직 할 얘
“아, 그날요? 아직 언니한테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네요!”지희는 매우 기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육 대표님 덕분에 우리 별님의 집도 TV에 나와 홍보할 수 있었어요. 아린 언니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TV에서 언니한테 감사드린다고 얘기했어요!”“원래는 워크샵 가기로 했었는데,녹화를 마친 후에 너무 늦기도 하고 모두 피곤해서 그냥 레스토랑에 가서 뷔페를 먹었어요! 내가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에 아린 언니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혹시 나한테 화났나요?”“아니.”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혹시 내가 하경 씨를 오해한 걸까?’그녀는 뒤를 돌아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혹시 그 사람들이 호텔에 강제로 남게 하거나 보육원 사람들의 휴대폰을 압수한 적 있어?”도아린은 육하경과 상관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런 적 없어요! 우리 보육원 사람들을 누가 감히 강제로 붙잡겠어요!”지희가 웃으며 말했다.“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식사할 때 게임도 같이했는데 그때는 모두 휴대폰을 꺼놨어요.”도아린은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다.이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별님의 집 사람들 중에도 육하경의 사람이 있다는 걸 그녀는 단번에 깨달았다.그 사람은 게임을 핑계 삼아 휴대폰을 끄게 해서 보육원 사람들이 외부와의 연락을 끊게 만들었다.그 때문에 도아린은 보육원 사람들이 모두 육하경에게 납치된 것처럼 보였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배에 오르게 된 것이다!“아린 언니, 사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요, 육 대표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아린 언니의 이름으로 보육원을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하셨어요. 하지만 아린 언니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했거든요.”“아이들이 만든 작은 수공예품을 시장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아줬고요, 그 돈은 모두 보육원 계좌에 들어가고 ‘아린 희망 재단’까지 생겼어요! 정말 그분을 언니의 반쪽으로 고려해 볼만하다니까요!”도아린은 흩어진 머리카락을 잡아 뒤로
“말해 보세요.”“건후 씨 말이에요. 뇌사 판정을 받고 사망을 선고받았었잖아요. 설마 하경 씨가 시켜서...”도아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기 힘들어했다. 도아린은 고개를 돌리고 몰래 살을 세게 꼬집어 눈물을 짜냈다.그리고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육하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하경 씨, 대은이 아버지한테 이식된 장기 말이에요. 건후 씨 건가요?”육하경의 부드러운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건후가 안쓰러워서 그러세요?”“일단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맞아요?”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도아린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계속 자기 앞에 나타나는 배건후와 똑 닮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건후 씨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내 반응을 떠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만약 도아린이 먼저 알아본다면 배건후가 병원에 누있다는 건 거짓말이라는 의미였고 만약 그녀가 무시해 버린다면 배건후가 이미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병원에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기에 모건 그룹의 주가를 폭락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이제 도아린은 육하경이 장기 밀매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도 분명 배건후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하지만 그럼에도 배건후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는 건 육하경 곁에도 배건후의 편이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육하경이 입을 열었다.도아린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그녀는 육하경을 도발하려 했다. 그가 진실을 말할 때까지...“여긴 우리 둘뿐인데 아직도 부정할 필요가 있나요?”육하경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제가 건후의 장기를 이식했다고요? 상상력이 참 대단하시군요. 아린 씨 차갑게 대하는 건후가 못마땅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건
그녀를 본 자상훈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하경 씨는 어디 있나요?”“방에서 쉬고 있습니다.”자상훈이 뒤쪽에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도아린은 곧장 가서 문을 두드렸다.“하경 씨.”“들어와요.”방 안에서 낮고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상훈의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도아린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소파 옆에 선 육하경은 막 셔츠를 입던 참이었다. 단추를 채우기도 전이라 근육이 조금씩 배인 그의 탄탄한 가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도아린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죄송해요!”육하경은 옷을 입으면 슬림해 보이지만 벗으면 생각보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몸매는 운동으로 다져진 게 분명했다.그는 도아린의 반응에 흡족해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무슨 일이시죠?”“저, 율이를 보러 가고 싶어요.”도아린이 시선을 내리깔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니면, 사람을 시켜서 데려와도 괜찮고요.”육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하게 단추를 채웠다.“좋아요.”그는 이렇게 말하며 도아린 앞으로 다가갔다.육하경의 가슴 근육을 얼핏 쳐다본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를 율이한테로 데려다줄 건가요, 아니면 율이를 데려오실 건가요?”육하경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마치 화려한 공작새처럼 으스댔다.“만족스러우세요?”“뭐라고요?”도아린이 홱 돌아서 버렸다.“겉만 잘나서 무슨 소용 있겠어요?”“비록 아린 씨 말도 틀린 건 없지만 건후는 다 잘났어요. 오랫동안 안 좋은 위를 방치한 게 문제지만요.”“내제가 말한 건 그쪽이에요!”그녀는 못 참고 육하경을 노려보았다.그는 단추를 두 개 더 닫고 고개를 들었다.“그럼 제가 잘났다는 건가요?”도아린은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육하경은 웃으며 문을 열었다. 등을 돌리자 그가 입은 하얀 셔츠에는 왼쪽 어깨 쪽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다쳤어요?”도아린이 놀라서 물었다.육하경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덤덤
자상훈이 식당으로 들어와 육하경 옆으로 가더니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몇 마디 속삭였다.그의 부드러운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육하경은 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며 말했다.“율이랑 천천히 식사하세요. 안쪽에 멀티룸이 있으니까 영화 보셔도 돼요. 저는 볼일 좀 보고 올게요.”그가 나가고 난 후, 도아린은 율이와 함께 손을 씻고 복도 끝 방으로 갔다.“율이 어떤 영화 보고 싶어?”“아린 언니가 보는 거면 전 다 좋아요.”율이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기다렸고 도아린은 ‘해리 포터’를 찾아서 틀었다.방 안의 불을 끄자 작은 영화관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아린 언니, 해리 포터도 부모님 없이 살잖아요.”율이가 도아린의 손가락을 꼭 잡으며 말했다.“저도 그 애처럼 커서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율이는 이미 대단해.”도아린이 율이의 어깨를 감싸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아니에요. 저 하나도 안 대단해요.”율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린 언니를 지켜주지도 못했고 게다가 보미 언니 때문에”율이는 비록 손보미가 자신의 엄마라는 걸 알지만 보미 언니라고 부르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보미 언니는 아린 언니의 남편을 빼앗았어요. 나쁜 사람이에요.”율이는 도아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제 몸속에는 보미 언니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도 크면 그 나쁜 사람으로 될까요? 그럴까 봐 겁나요.”“아니야. 절대 그럴 일 없어.”도아린은 율이를 품에 꼭 안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어떻게 된 거죠?”육하경이 서재로 들어서며 차갑게 물었다.그는 담뱃갑을 집어 들더니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탁자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자상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자상훈은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육청아 씨 부모님이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갈 만한 곳은 전부 찾아봤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육하경은 라이터를 켜려다 잠시 멈칫했다. 그는 담배에 붙이고 깊게 한 모금
“율이는 이제 돌아가야 돼요.”육하경이 방에 불을 켰다.“꼭 데려가야 해요?”도아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육하경이 다가와 율이의 손을 잡았다.“저쪽 배에 의료 장비가 있어서 거기가 더 안전해요.”율이는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면서 아쉬운 눈길로 도아린을 바라봤다.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언제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도아린이 황급히 따라붙었다.“그럼 제가 같이 갈게요.”“안 돼요.”“하경 씨, 율이는 아직 어린애예요.”도아린이 육하경의 손을 잡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그럼 거래를 합시다. 하경 씨가 원하는 거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율이를 보내지 말든지 아니면 제가 같이 갈게요.”육하경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아린은 굳이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대표님, 배가 도착했습니다.”자상훈이 내려와서 보고했다.육하경은 시선을 거두고 율이를 데리고 갑판으로 향했다. 도아린은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쫓아갔다.작은 보트 한 척이 커다란 배에 닿아 있었는데 누군가가 밧줄을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다.육하경은 율이를 그 사람에게 넘겼다. 그 남자는 율이를 안아 보트에 태운 뒤 다시 배로 옮겼다.“율아, 내일 또 놀러 와!”도아린이 율이를 향해 외쳤고 율이는 손을 흔들며 배 안으로 사라졌다.“하경 씨, 전에도 지희를 해치지 않았으니까 율이도 해치지 않을 거죠?”그녀는 육하경의 손을 잡고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도아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엔 다를 수도 있어요.”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율이를 인질 삼아 절 협박하려는 거예요?”“제가 만약 정말 강제로 아린 씨를 원했다면 반항이 소용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육하경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만약 육하경이 그녀의 생사를 개의치 않는다면 협박은 오히려 그의 분노를 자극하는 도화선이 될 뿐이었다.“그럼... 율이는 왜 데려왔어요?”육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배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도아린이 뒤를 돌아보자 어떤 더
“헛소리하지 마세요!”도아린이 육하경의 손을 거칠게 밀쳐내며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율이도 살아갈 권리가 있어요!”육하경은 그녀를 비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그래도 율이는 부모에게 버려져서 보육원에 맡겨진 데다가 선천적인 질병까지 있잖아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얘기예요.”그는 손목을 들어 올려 도아린이 움켜쥐었던 팔에 난 흔적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덧붙였다.“장기를 사는 사람은 예진이 뿐이 아니에요. 저 배에는 다른 아이들도 있어요. 장기들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 말이죠. 율이가 여러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데 좋은 거 아닌가요? 이득이 되는 거래잖아요.”도아린은 망연자실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니까... 보육원 아이들에게 건강 검진을 받게 한 이유 말이에요. 정말 건강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필요한 장기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건가요?”“맞는 말이긴 하지만 틀린 부분도 있어요.”육하경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저는 더 가치 있는 걸 골랐을 뿐이에요.”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어떻게 해야 율이를 놔줄 거예요?”육하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거래를 멈출 수 없었다.눈물이 도아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제가 이러면 돼요? 아니면...”도아린이 속옷을 잡아당기는 순간, 육하경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아린 씨도 알잖아요. 제가 원하는 게 이런 게 아니라는 걸...”“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도아린이 육하경의 옷깃을 거칠게 붙잡고 흔들었다.“제가 어떻게 하면 율이를 놔주실 건가요? 대답해 봐요!”육하경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도아린은 저항하려 했지만 금세 체념한 듯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육하경은
구현성의 비서가 먼저 도아린을 보고 구현성의 팔을 가볍게 쳤다.도아린을 본 구현성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비서를 데리고 선실로 들어갔다.그가 막 들어가자, 한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는 웃으며 딸을 업었고 딸은 기뻐하며 손을 들어 공중에 걸린 깃발을 잡으려 했다.두 사람 모두 밝게 웃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더 이상 병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새 삶을 얻는 순간, 누군가는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도아린은 그들의 웃음이 눈부시게 느껴졌다.그녀는 맞은편 큰 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보고 싶어서 난간을 따라 걸었다.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도아린은 이 거래를 막고 싶었다.순간,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을 향했다.이미 시선을 돌렸던 도아린은 반사적으로 다시 선실 안을 바라보았다.창가 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예술가 같은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덥수룩한 수염에 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그는 한 손에 잡지를 들고 있었는데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앞에는 컵이 놓여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도아린의 시선을 감지한 그는 이쪽을 힐끗 보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스푼 하나를 들었다. 그 병의 포장은 도아린이 평소에 자주 사던 꿀 유자차와 비슷해 보였다.도아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아닐 거야! 겉모습이 전혀 다르잖아.’배건후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도아린은 그의 헤어스타일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스크를 쓴 채 키스했을 때, 배건후의 까칠까칠한 수염이 얼굴에 닿았던 기억은 있었다.겉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굳이 배건후와 연관을 찾자면 저 꿀 유자차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보려던 순간, 배 뒤쪽에서 육하경이 걸어왔다.그의 뒤에는 두 명의 남자가 따라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