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멈추어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궁의 정원수에 손을 대느냐!”
날카로운 호령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초영황후의 화려한 가마 행렬이 냉궁의 정적을 깨며 도착해 있었다. 황후궁 상궁들은 우르르 달려와 청아의 앞을 막아섰다.
“황후마마를 뵙나이다!”
청아가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품에 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볼품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후는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냉궁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법도를 모르느냐? 폐하께서 다녀가셨다는 소문에 내 참담한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거늘, 기어이 사고를 치는구나. 태후마마께서 아끼시는 정원수를 꺾어다 이 비천한 곳에서 불이나 지피고 있었다니!”
“황후마마, 죽은 가지를 주운 것뿐이옵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닥치지 못할까! 당연히 지켜야 할 법도까지 망각한 주제에 무슨 반성을 하겠다는 게냐? 여봐라, 이것의 주인까지 끌어내어 당장 저 고약한 입들을 다스려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궁들이 안채로 들이닥쳐 침상에 누워있던 설아를 끌어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마마, 마마! 안 됩니다, 재인마마!”
설아를 감싸며 울부짖는 청아의 절규를 비웃듯 가혹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잔인한 비명이 냉궁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황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려 매질을 멈추게 했다.
“분수도 모르고 폐하를 유혹한 죄만으로도 평생 이곳에 갇혀야 마땅하거늘. 감히 병을 핑계로 폐하를 여기까지 걸음하게 해?”
소설아는 심한 매질로 인해 정신이 혼미했지만, 이를 악물며 기어코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표독스러운 황후의 표정에 기가 질릴 법도 했지만, 그저 이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할뿐이었다.
“입궁도, 폐하를 모시라던 것도 모두 태후마마의 명이셨습니다. 전 그저 곁에서 차를 올리는 차담시녀로 남고 싶었으나, 저를 폐하의 소침전에 들여 재인 첩지를 받게 하신 분이 바로 태후마마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폐하를 유혹했다 하십니까!”
피를 토하는 절규에도 황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냉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신다. 또다시 폐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발걸음하시는 일이 없도록, 황궁 온천이 있는 행궁으로 가서 몸을 추스르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마마의 은덕에 감사하거라.”
소설아는 깜짝 놀라며 황후에게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행궁이라뇨?”
“말 그대로다. 언제까지 병을 핑계로 폐하를 냉궁에 끌어들일 속셈이냐? 더는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고 거처를 옮기거라.”
“아, 안 됩니다! 폐하께서 저를 꺼내주신다 약조하셨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꼭 데려가마 하시고, 이 탕약도… 직접 주셨단 말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여봐라, 이것들을 당장 끌어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궁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무자비하게 밖으로 끌어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눌 새도 없이 냉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그들 앞에는 초라한 짐수레 한 대만이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조차 허락되지 않아 낡은 나무 수레 위로 내던져진 두 사람을 실은 채, 수레는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행궁으로 향하는 먼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먼지 날리는 길 위로 덜컹거리는 수레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설아는 멀어지는 황궁의 거대한 기와지붕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반나절을 꼬박 짐수레에 실려 온 설아를 맞이한 것은 뜻밖에도 행궁 시녀들의 따뜻한 환대였다. 냉궁에서 겪었던 멸시와 달리, 그들은 안쓰러운 눈길로 설아를 전각 안 욕탕으로 안내했다.
“재인 마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폐하께서 특별히 신경 쓰라 당부하셨으니, 우선 이 약욕으로 몸을 추스르시지요.”
“... 폐, 폐하께서?”
그 한마디에 설아의 심장이 다시금 요동쳤다. 감격에 겨워 비틀거리는 설아를 부축하던 시녀들은 욕탕 위로 향기로운 약초와 붉은 꽃잎들을 한가득 흩뿌렸다. 수면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꽃잎들은 이제 고통은 끝났다며 그녀를 축복해 주는 듯했다.
설아는 그 다정한 배려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탕 안으로 천천히 몸을 담갔다.
“마마, 제가 잠시 수건과 갈아입으실 옷을 챙겨올게요. 조금만 쉬고 계셔요.”
불안한 듯 곁을 지키던 청아가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욕실 안, 찰랑거리는 물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따뜻한 온기가 매질로 얼룩진 살결을 부드럽게 감싸 안자, 설아는 비로소 깊은 한숨과 함께 지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잔인한 착각이었다.
어느 순간, 손끝에서부터 기이한 마비가 시작되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지는 천근만근 무거워져 감각조차 희미해졌다.
향기롭던 약초와 꽃잎들은 어느새 검게 변해 악취를 내뿜었고, 맑았던 온천물은 치명적인 독기를 품은 채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굳어버린 사지는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시퍼런 독물이 입술을 지나 코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설아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설마… 폐하께서 내게 주신 그 탕약이?’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설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 가득 머물렀다. 당황하여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 그리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분홍빛으로 일렁이는 도톰한 입술. 그 여리여리한 빛깔이 사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사내는 한참만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왕부에.”“예……?”설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왕부라니. 이 도성에 왕부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사내의 분위기와 이 투박한 마차, 그리고 조금 전 보연방에서 보여준 그 압도적인 살기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당황한 소설아는 급히 창문의 가림막을 들어 올렸으나 낯선 장안의 풍경은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승평 시장에서 기다릴 청아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가는데도 사내는 도통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얼마 후, 말들의 길고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육중한 마차가 멈춰 섰다.“왕야, 돌아오셨습니까.”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숨 막히는 듯한 위압감에 설아가 숨을 들이켜는 사이, 사내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마차 밖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왕야라고? 저 무례한 남자가?’설아는 사람들이 사내를 부르는 호칭에 깜짝 놀랐다. 왕야라니. 정말로 저 사내가, 피도 눈물도 없다는 그 잔혹한 경무왕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왕부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홀로 마차에 남겨진 설아는 차마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느껴지는 삼엄한 기운과 낯선 병사들의 서슬 퍼런 시선. 설아는 거대한 함정 속에 빠진 듯한 두려움에 휩싸여 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아가씨, 마차에서 내리시지요.”두려움에 떨고 있던 설아에게 말을 건넨 이는 인상 좋은 중년의 부인이었다. 왕부의 삼엄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대체, 여기는 어딘가요?”소설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두려움이 묻어
사내는 품속에서 아까 꺼냈던 그 황금빛 명패를 다시 꺼내들었다. 손바닥만 한 명패의 테두리에는 상서로운 기린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경무왕부라는 네 글자가 중후한 글씨체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소설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보연방의 주인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노인은 마치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더해주었다. “이 명패가 사실이라고 한들, 어쩌라는 거죠?”“나와 같이 가줄 곳이 있다.”“싫어요. 납치는 사절이에요.”설아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나리. 아무래도 둘째 아가씨가 불안할 수 있으니, 시비라도 찾아서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내가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명분으로 요청하는 건데, 불안할 게 뭐가 있지? 이 황금 명패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금빛 명패에 새겨진 네 글자, 경무왕부(景武王府).설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사내가 정말로 그 경무왕이란 말인가.북방의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 돌아온 전쟁의 신.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 칭송받으면서도, 배신자라면 어린아이조차 용서치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황자의 귀한 신분임에도 도성의 어떤 가문도 선뜻 딸을 내주려 하지 않아, 혼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혼담 한 번 들어온 적 없다는 그 잔혹한 전쟁광.설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요.”“당연히 상관이 있지. 이 명패를 본 사람은 내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 소낭자의 시비를 알려주면 내 부하들이 찾아줄 거야.”“기어코 저를 납치하시려는 건가요?”“소낭자. 말은 바로 하지. 난 납치하려는 게 아니야. 협조를 요청하고 있네.”사내는 팔짱을 끼더니, 밖으로 나가자는 듯 가볍게 턱짓을 했다. “저, 나리. 후부에 사람이라도 보내 알려야 하지
“주인장, 혹시 이 예복이 황실에서 하사받은 비단으로 지은 옷인가요?”“그렇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이리 망가졌으니, 전 죽은 목숨입니다요!”황실에서 일일이 순찰을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황실의 하사품에 피가 뿌려졌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찌합니까, 나리! 아이고, 아가씨!”소설아는 울부짖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탁자 뒤로 돌아가 문을 열고 안에 있던 것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소설아는 대꾸하지 않고, 그 안에서 바늘과 실을 찾아내고는 명주솜을 꺼내어 예복으로 다가갔다. 피가 뿌려진 곳에 덧대어 더 이상 혈흔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한 뒤, 빠른 솜씨로 금빛 자수를 수놓기 시작했다. 울부짖던 노인도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소설아의 신들린 손놀림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설아는 마치 춤을 추듯, 아니 새가 날아다니듯 가볍게 금실을 수놓으며 점점이 번져있는 혈흔을 감싸기 시작했다. 설아의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가느다란 금사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고운 비단 위를 누볐다. 핏방울이 튄 자리를 중심으로 금빛 줄기가 정교하게 꼬이며 뻗어 나갔고, 그 끝에는 가늘고 긴 인동초 꽃봉오리들이 맺히기 시작했다.“이, 이럴 수가... 인동초로구나!”노인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듬성듬성 흉하게 튀어버린 핏자국들은 어느새 금빛 넝쿨의 매듭이 되었고, 넓게 번진 얼룩은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 아래의 그늘진 음영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사가 수천 번 교차하며 만들어낸 인동초 넝쿨은 마치 예복 자락을 타고 실제로 자라나는 듯한 생동감을 뿜어냈다. 붉은 혈흔은 이제 금사 사이에서 은은한 생기만을 더해줄 뿐, 그 어디에서도 죽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세상에... 이럴 수가, 정녕 이럴 수가!”노인은 돋보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예복 자락을 받쳐 들었다.“가린 것이 아니로구나. 아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어! 핏빛이 금사 사이로 은
“다 제가 박복한 탓이지요.”“그게 어찌 아가씨 탓입니까! 하늘의 뜻인 게지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원!”노인은 짐짓 눈시울을 훔치며 그녀의 마음에 들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장례도 치렀고, 저도 마음을 추슬러야지요. 그것보다 이 물건들을 좀 봐주십시오.”“아니, 이것은 아가씨의 자수 도안들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파시라고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더니만!”노인은 입을 떡 벌린 채, 보따리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도안과 자수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펼쳐보았다. “만화 백조도, 연화 불멸도, 화중군자와 천상화조백란까지! 특히나, 이 화조백란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직물공선에 출품해도 합격은 따놓은 당상일 겁니다! 어찌 이리 감사할 데가! 그렇잖아도 좋은 도안을 찾을 수 없어서 발을 구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노인은 품 안에서 수정으로 깎아 만든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설아의 도안과 자수품을 훑어내려 가던 그의 눈이 돋보기 너머로 기괴할 만큼 크게 일렁였다.“이, 이럴 수가... 한 올의 엉킴도 없구나. 이건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내려와 수를 놓았다고 해도 믿겠어! 아가씨,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건 제가 가진 은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뒷채에서 비상금을 더 챙겨올 테니, 절대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노인은 돋보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미친 사람처럼 뒷채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남긴 돋보기 위로, 설아가 수놓은 연꽃의 정교한 결이 비쳐 보였다.노인이 사라지고 전생의 비연각 만큼이나 고요한 정적이 감돌던 그때였다.콰창―!폭발하듯 터져 나간 보연방의 육중한 문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비명 지를 틈도 없이, 짙은 피 냄새와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가게 안을 집어삼켰다.“큭...!”먼지 구름을 뚫고 들이닥친 것은 검은 망토를 폭풍처럼 휘날리는 한 사내였다. 그의 뒤를 쫓던 자객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쇄도했지만, 사내의 반응은 그보다 반 박자 더 빨랐다.사내의 손에 쥔 검이 허공
설아는 떨리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체념한 듯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순종적인 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알겠습니다, 어머니. 후부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따라야겠지요.”뜻밖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후부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평소처럼 한차례 울며불며 고집을 피울 줄 알았던 딸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아니, 네가 그리 생각해 주니 다행이구나. 어차피 너는 진명후부로 가야만 해. 그게 네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편할 게다. 이만 물러가거라.”후부인은 조금 전과 달리 한풀 누그러진 태도로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설아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뒤를 돌았다.문밖으로 나서는 설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마치 후부인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것은 설아가 직접 선택한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운명이라니.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 당신들이 당연한 듯 나의 생을 저울질하는 사이, 나는 이 지옥 같은 후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줄 테니까.’“아, 잠깐.”후부인은 생각났다는 듯, 소설아를 불러 세웠다. “마침 이번에 황실에서 하사한 비단이 아주 귀한 것들이 많더구나. 그걸로 내 옷을 몇 벌 더 짓도록 해라. 빛깔이 워낙 고우니 그 위에 자수를 아주 화려하게 놓는 것이 좋겠어. 네 자수 솜씨야 장안에서 제일가기로 손꼽힐 만큼 뛰어나지 않느냐. 하사받은 비단에 네가 수를 놓은 옷을 입으면, 태후마마께서 한 번쯤 구경하자고 부르실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게 우리 가문에 얼마나 큰 영광이겠니?”잔뜩 꿈에 부푼 후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들이 궤짝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설아가 직접 혼례복을 짓는 것도 좋겠군요. 붉은 비단도 좋은 게 많아 보였습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황실에서 직접 내려주신 비단이야. 사사로이 축내면 안 된다.”사사로이 축을 내다니. 자식의 혼사에 쓰이는 것만큼 값진 쓰임이 따로 있으
“마님, 설아 아가씨께서 문안을 올리러 왔습니다.”청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려한 비단을 몸에 대보며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던 후부인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방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애가 벌써 일어났단 말이냐?”소진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부인은 서둘러 어깨에 걸쳤던 비단을 걷어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어색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자, 소설아가 들어서며 가벼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어머니,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소녀 설아,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더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래. 지금 이 후부에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장례를 치르다 말고 혼절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느냐? 조문객들을 진정시키느라 네 오라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쯧!”후부인은 소설아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오라버니, 죄송합니다.”소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소진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괜찮다니, 이제 됐다. 덕분에 마음 편히 네 혼사를 논해도 되겠구나.”소설아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직 상중이고, 오라버니도 있는데 제 혼사를 논하기엔 좀 이른 것 같습니다.”“아니, 얘가 정말!”짜증 난다는 듯, 후부인이 새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신 이 마당에, 네 오라비가 근양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시집갈 나이가 다 됐으면 가문을 위해서 적당한 곳으로 혼인해서 떠나야지! 보탬이 될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에, 뭐? 상중이라 논하기에 일러? 이런 배은망덕한 것을 보았나!”후부인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몸을 떨다 기어이 찻잔을 집어던졌다. “어머니, 진정하시지요.”소진우가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며 후부인을 말려보았다. “설아,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경북후부는 내가 관직에 나아가 작위를 이어야만 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려면 근양왕의 비호가 꼭 필요한 상황이란다.”“그것이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