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소재인은 어제 황후의 명으로 내훈까지 베껴 쓰느라 몸이 편치 않다 합니다. 모든 것은 짐의 잘못이니 저를 탓하시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마음이 불편해진 황제가 슬며시 태후의 손을 붙잡았으나,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
“이 어미가 법도에 따라 다 알아서 할 터이니, 황제께서는 어서 대전으로 드시지요. 모두 폐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국의 천자가 고작 후궁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추문이 돌아서야 되겠습니까?”
태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매몰차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
서릿발 같은 그녀의 위엄 앞에 황제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결국 엎드린 설아를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미련 가득했던 황제의 그림자가 멀어지자마자, 태후의 서슬 퍼런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소설아를 향했다.
납작 엎드려 떨고 있는 가녀린 어깨 위로, 독기를 가득 머금은 태후의 시선이 잔인하게 내리꽂혔다.
“그만큼 알아듣게 타일렀으면 눈치껏 처신했어야지. 이것이 정녕 네가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더냐?”
“태후마마……”
“네 아비 경북후가 전사하고 가문이 풍전등화일 때, 네 오라비가 작위를 잇도록 뒷배를 서준 것이 누구더냐. 내 은덕으로 근양왕의 사위 자리까지 꿰찼으면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제 분수도 모르고 이토록 오만방자하다니! 입궁하기가 무섭게 감히 내 아들을 홀려 재인 첩지를 받아내더니, 이제는 조회까지 폐하게 해? 네년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하였구나!”
“태후마마, 신첩은 단 한순간도 마마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조회를 거르지 않으시도록, 매일 아침 눈물로 간청하며 마마의 뜻을 전하고 또 전하였사옵니다!”
“발칙한 것! 당장 그 입을 닥치지 못할까!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감히 폐하를 입에 담다니!”
소설아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태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목격한 것은 분노한 태후뿐만이 아니었다.
태후의 등 뒤로 늘어선 초영황후와 비빈들.
저마다 화려한 비단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채 너머 가려진 입술들이 얼마나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지. 그녀들이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말이다.
“오늘부로 재인 소설아를 냉궁으로 쫓아버려라. 뭘 잘못했는지 깨닫기 전엔 절대 꺼내주지도 말고,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라! ”
서슬이 시퍼런 태후의 일갈에 다들 숨을 죽이며 소설아를 내려다보았다. 꽤나 만족스러운 결말인 듯, 비단부채를 살랑이며 잔인한 미소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태후마마! 억울하옵니다! 마마! 살려주시옵소서, 마마!”
하지만 절규하는 소설아의 목소리는 그녀가 머물던 비연각의 높은 담장을 넘지 못했다. 태후의 서슬 퍼런 기세를 등에 업은 상궁들은 짐짝을 치우듯 그녀를 인정사정없이 끌고 가 차가운 냉궁에 처박아버렸다.
“태후마마! 살려주시옵소서, 마마!”
그녀의 잘못이라곤 오직 황제의 총애와 그가 속삭인 사랑을 믿었던 것뿐이었는데.
바닥을 기며 떠나가는 상궁들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자비 없는 발길질뿐이었다. 설아는 차가운 돌바닥 위를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재인 마마!”
함께 냉궁으로 내쫓긴 시녀 청아가 울부짖으며 달려와 쓰러진 설아를 감싸안았다.
“마마, 정신 차리세요, 제발!”
어떻게든 설아를 일으켜 세우려 청아가 안간힘을 쓰던 그때였다. 낮게 가라앉았던 하늘이 기어이 비명을 지르듯 거친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얇은 침의 한 장은 순식간에 빗물에 젖어 들어 차갑게 달라붙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태후의 매서운 추궁과 매질에 가까운 수모로 이미 혼이 나간 설아였다. 그녀는 청아의 품에 늘어진 채,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만 간신히 뜨고 있을 뿐이었다.
“마마! 마마!”
청아는 제 겉옷을 벗어 설아의 어깨를 감싸고는, 짐짝처럼 늘어진 그녀를 끌다시피 하여 냉궁 안으로 들였다.
낡고 축축한 습기로 인해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은 절로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추웠다. 화로 하나는커녕 제대로 된 이불 한 채조차 허락되지 않은 냉방의 한기가 물에 젖은 설아의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청아는 냉궁 안을 모조리 뒤져 낡은 옷가지를 몇 벌 찾아냈지만, 방 안 가득한 한기를 가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청아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설아의 몸은 불덩이처럼 끓어오르고야 말았다.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설아를 보살핀 청아는 날이 밝자마자 태의원으로 달려갔으나, 태의를 만날 수는 없었다..
“제발, 태의 어르신! 재인 마마께서 몸이 불덩이라 깨어나질 못하십니다! 해열탕 한 재라도, 아니 황련 한 뿌리만이라도 내어주세요, 제발!”
애절한 청아의 울음소리가 굳게 닫힌 태의원 문전에서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닫힌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어도 문 안쪽은 쥐 죽은 듯 고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삼 일째 되던 날, 굳게 닫혔던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작은 종이 봉지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갈근탕이다. 어서 이걸 갖고 사라지거라!”
감사 인사를 전할 틈조차 없이 문은 다시 굳게 닫혀버렸으나, 청아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황공하옵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서둘러 냉궁으로 돌아온 청아는 정성을 다해 약재를 달여 설아에게 먹였다. 하지만 며칠째 차가운 냉골에서 고열에 시달렸던 설아의 병세는 나아질 줄 몰랐다.
설아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연백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그런 황제의 동태를 보고, 태후가 단단히 착각을 했던 모양이지.”설아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태후마마께서... 저를 두고 오해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연백리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나직하게 덧붙였다.“하지만 그것도 결국 원인은 나다.”연백리의 눈빛이 잠시 창밖 먼 곳을 향했다.“태후는 내 모친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계신다. 그런데 자꾸만 모친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대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겠지.”그는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듯 말을 이어 갔다.“그래서 그대를 후궁으로 들여 황궁 한구석에 처박아 두고, 평생 괴롭힐 작정이었던 것 같다.”“세상에나...!”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악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려 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등골을 타고 싸늘한 한기가 흘러내렸다.그것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한 사람의 인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을 수 있는, 현정태후라는 인간의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일이었다.“다행히, 당신이 후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어.”연백리의 말에 설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누군가요?”“초영황후.”연백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정적으로 말했다.설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연백리는 그런 설아의 반응을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태후가 후궁 간택의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자, 아비를 시켜서 내게 은밀하게 연락해왔더군. 물론, 황후가 그런 머리를 썼을 리는 없어. 아비의 능력이겠지.”그 말을 듣는 순간, 설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헌국공……”“응? 가회안을 알고 있나?”연백리는 뜻밖이라는 듯 설아를 바라보았다.설아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얼른 손사래를 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
송부인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연백리와 설집사가 머물고 있는 서재를 찾아갔다.“왕야, 양부인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급히 들어선 송부인이 장락사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전하자, 서재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연백리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고, 설집사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감았다.한참 동안 말없이 상황을 정리하던 설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번 입궁은 피할 수 없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다.“소낭자께서 직접 헤쳐 나가셔야 할 시련입니다.”연백리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설집사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아를 연각 앞에 홀로 세워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연백리가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내가 같이 입궁하는 수밖에.”설집사는 곧바로 난색을 드러냈다.“폐하께서 순순히 수긍하지 않으실 텐데요.”“그래도 내가 옆에 있으면 눈치는 보겠지.”연백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 말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설집사는 더는 만류하지 못한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이제 폐하께서는 더더욱 왕야께 가시를 드러내실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연백리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여인네 하나 때문에 가시를 드러내는 황제라니. 이보다 더 우스울 수 있겠는가.”그는 설집사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했다.“여러모로 내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군.”연백리는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지만, 그 웃음과는 달리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다음 날 아침.설아는 아침 일찍부터 입궁할 채비를 마친 뒤 만화각을 나섰다.하지만 객잔 앞에 서 있는 마차를 본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늘 장락사에서 타고 다니던 소박한 마차가 아니었다.검은 칠을 곱게 올린 차체와 문짝에 새겨진 은빛
초영황후는 곧바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황후는 한층 더 몸을 낮춘 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다만 오히려 소설아 그 계집아이를 궁으로 끌어들인다면, 자그마한 실수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그러나 현정태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뒷배가 경무왕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게냐?”초영황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경무왕이면 또 어떻겠습니까?”황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태후를 마주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감히 황제폐하께서 입으실 의복에 실수를 한다면, 경무왕이 아니라 그 누가 나선다 한들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잠시 초영황후를 빤히 바라보던 현정태후는 이내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그래.”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태후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어디, 네 생각대로 일이 잘 흘러가는지 두고 보자꾸나.”차갑게 황후를 내려다본 태후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세상이 네 생각처럼 그리 만만한 줄 아느냐.”비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몸을 돌린 현정태후는 그대로 보화궁을 나서 자의궁으로 돌아갔다.태후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초영황후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조금 전까지의 공손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흥.”황후는 영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멍청한 짓만 골라 하는 주제에, 누굴 비웃는는 거야.”황후는 태후가 떠나간 쪽을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두고 보라지.”입가를 슬쩍 비틀어 올린 그녀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내가 당신의 콧대를 납작하게 밟아 줄 테니까.”잠시 말을 멈춘 황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러니 그때 가서 고맙다고 울며 매달리기나 하지 말라고.”초영황후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태후가 사라진 자의궁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심여은의 연회복은 기로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도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고개를 든 심여은의 눈앞에는 사경원 공자가 직접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그는 심여은의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천천히 따라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오늘 연회복이 참 아름답습니다.”갑작스러운 칭찬에 심여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사경원은 그녀의 수줍은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심소저께서 연희전으로 들어오시는 순간, 좌중의 모든 시선이 소저께 머물더군요. 저마다 어느 집 규수인지 궁금해하며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심여은은 부끄러운 나머지 시선을 떨구며 조그맣게 웃었다.“과찬이세요. 다 옷이 아름다웠을 뿐인걸요.”그러자 사경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잠시 심여은의 눈을 바라보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저 또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순간 심여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곧이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수줍게 웃음을 터뜨렸고, 늦봄의 따뜻한 바람은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풋풋한 인연을 조용히 감싸 안고 있었다.하지만 심여은의 입에서 장락사라는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현정태후의 표정은 눈에 띄게 일그러져있었다.조금 전까지 연신 감탄을 쏟아내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곁에 앉아 있던 초영황후 역시 심기가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황후는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마실 뿐,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묘한 정적이 상석을 감싸고 돌았다.그 미묘한 분위기를 아는 것인지, 혹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연각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장락사라고…...?”연각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그 정도 솜씨라면 나도 다음번 잠행에 입고 나갈 편복을 한 벌 맞춰야겠군.”하지만 그 말을 들은 현정태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하게 떠올랐다.“황상!”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각을 돌아보았지만,
은은한 옥빛을 머금은 최고급 천명사로 지은 연회복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러 겹의 치맛자락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부드럽게 흩날렸다.과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선은 어린 규수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치맛자락과 소맷단에는 진심과 변치 않는 마음, 그리고 풍성한 행복을 뜻하는 수국이 분홍빛과 하늘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가듯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지금껏 누구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수 기법이었다.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옷감 자체였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끝단에 섞어 짜 넣은 은사가 은은하게 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빛은 마치 비단신을 신은 듯 심여은의 걸음걸이마저 한층 더 우아하게 돋보이게 만들었다.한참 동안 넋을 잃고 연회복을 바라보던 심문경이 마침내 설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이 옷이 광목으로 만든 옷이란 말이오?”설아는 공손히 반절을 올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예, 그렇습니다, 어르신. 만가직방에서 직접 짠 광목으로 만든 연회복입니다. 부디 심소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기로연에 이 옷을 입고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심문경은 말없이 천명사를 다시 한번 손끝으로 쓸어보았다.이윽고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평생 검소한 옷차림과 소박한 몸가짐으로 사치를 경계하며 살아왔소. 그런데 수수한 광목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 멋을 낼 수 있다니... 세상은 역시 견문을 넓히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구려.”그는 설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내 시야를 넓혀 준 장락사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하리다.”그 말을 들은 심여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다.조부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이제 이 아름다운 연회복을 입고 기로연에 참석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했다.며칠 뒤.마침내 황실이 주최하는 기로연이 열리는 날이 밝았다.황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품고 있다는 어화원 연희전.연회가 열리는 전각 주변에는 수천 개의 홍등과 궁등이 장대하게 불을 밝히고
손끝을 스치는 감촉은 광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웠고, 은은한 윤기는 비단과는 또 다른 고급스러움을 품고 있었다.설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 고마워요, 만소저.”그녀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만수수를 바라보았다.“덕분에 정말 아름다운 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천명사를 품에 안은 설아는 곧장 장락사로 돌아왔다.돌아오자마자 심여은에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고, 연락을 받은 심여은은 약속한 날보다도 더 들뜬 얼굴로 서둘러 장락사를 찾아왔다.설아는 다실로 심여은을 안내한 뒤, 정성스레 천명사를 펼쳐 보였다.“이 옷감은 제일 고운 최고급 면사에 광택이 살아 있는 명주실을 더해 만들어 낸 천명사라는 광목이에요.”심여은은 처음 보는 옷감을 신기한 듯 손끝으로 조심스레 매만졌다.설아는 천을 들어 등불 앞으로 가져갔다.“그냥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이 옷감의 진짜 장점은 바로 빛에 있답니다.”“빛이요?”설아는 대답 대신 천명사를 천천히 움직여 보였다.등불 아래에서 결을 따라 은은한 윤기가 흐르더니, 움직일 때마다 명주실이 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였다.심여은의 두 눈이 저절로 커졌다.설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이것이 비단보다도 더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명주실만의 장점이에요.”그녀는 천의 끝단을 살며시 들어 보였다.“게다가 끝단에는 은사를 함께 섞어 짜 넣었어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사가 빛을 받아 심소저의 발걸음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거예요.”잠시 심여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본 설아가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그러니 사공자께서도 심소저를 그냥 지나치실 수는 없겠지요.”설아의 설명을 듣는 내내 넋을 잃고 천명사를 바라보던 심여은은, 끝내 두 손을 꼭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정말 고마워요!”기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였다.“이 정도라면 저희 조부님께서도 절대 반대하실 수 없을 거예요!”그녀의 얼굴에는 며칠 전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설렘과 기대만이
여인네들이 장난스럽게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하자 계산대 주변이 금세 시장통 다운 활기로 시끌벅적해졌다.설아는 그제야 상념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눈앞 풍경에 넋을 놓고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아… 맞다!”설아는 얼른 계산대 뒤쪽에 준비해두었던 나무 상자를 열었다.상자 안에는 작은 광목 주머니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정갈하게 짜낸 광목 안에 굵은소금을 넣어 만든 소금 주머니였다. 눅눅한 장마철에 찬장이나 그릇장 안에 넣어두면 습기를 잡아주는 데 요긴한 물건이었다.“이 상자를 밖으로 꺼내주시겠어요?”임 주부는 재빨리
베틀 돌아가는 소리와 실 스치는 소리가 익숙한 숨결처럼 공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그때였다.안쪽에서 바쁘게 실타래 꾸러미를 안고 오던 만수수가 설아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마침 잘 왔네요.”만수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품에 안고 있던 실타래 뭉치 하나를 설아 쪽으로 내밀었다.“이걸 받아요.”“어… 네!”설아는 황급히 두 팔로 실타래를 받아안았다.생각보다 꽤 묵직한 무게였다.잘 정리된 면사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품 안 가득 전해졌다.만수수는 그런 설아를 힐끗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오
“다 못하고 가도 상관없어요.”만수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대신 온전히 세 개를 짤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설아의 얼굴에 생기가 돌며, 금세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정말요?”만수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작업장 안쪽을 턱짓했다.“그러니까 우선 베틀 앞으로 가요.”설아는 활짝 웃으며 얼른 뒤를 따라갔다.그리고 그날부터 그녀는 정말 정신없이 포대 자루만 짜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닥.베틀 돌아가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귓가를 울렸다.손놀림은 여전히 서투른 편이었다. 실도 자꾸
그는 설아를 조금 더 품 안으로 끌어당긴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포목점을 차려준 것처럼, 내가 가진 건 널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데.”설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걸로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걸… 왕야도 알고 계시잖아요.”그녀는 젖어드는 눈가를 애써 감추려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왕야 곁에 있으면 결국 약점이 될 거예요. 왕야를 찌르는 화살이 되고 말 거라고요.”연백리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지만, 그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되나?”포기할 생각 따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