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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무대 (2)

Author: 리사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22:03:05

여태 도면으로만 보던 자리를 발로 밟으니 지형이 손바닥처럼 읽혔다. 저 아래 터는 3년 전 겨울에 사 둔, 길도 안 난 땅이다. 지금 그 위에 방벽이 서 있었다.

오른쪽 오르막은 사람 실어 나르라고 미리 뚫어 둔 길인데 들것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능선 끝에는 초소도 하나 보였다. 서부 연구소가 학술 협조라는 이름으로 세운 눈이고, 저기가 균열 숨소리를 남들보다 몇 초 먼저 듣는다.

도면일 땐 몰랐다. 밟으니까 보였다. 죄다 사람이 딛고 선 자리다.

팔에 소름이 좀 돋았다. 나쁜 쪽은 아니고.

가는 길에 유도등 하나가 꺼져 있었다. 봄에 재난 훈련한다고 구청이 손봐 둔 설비였다. 하필 그 앞에서 대피 인파가 갈라지다 멎어 있길래 나는 옆 갈림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쪽 막혔어요. 왼쪽으로."

교사 하나가 나를 돌아봤다가 손짓하는 방향을 보고 그대로 인솔을 틀었다. 뒤에서 누가 쟤 누구냐고 물었고,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발치에 누가 흘리고 간 도시락 뚜껑이 뒤집힌 채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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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판정 (1)

    방어전 이틀 뒤, 아카데미는 축제 분위기였다.사망자 영(零). 중상 셋, 경상 마흔. 그중 절반은 대피하다 넘어져 까진 거다. 원작대로면 오늘쯤 학교 전체가 상복을 입고 있었을 텐데, 급식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식판 부딪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울렸고 창가 쪽에서는 누가 웃다가 사레들려 켁켁거리고 있었다.배식 줄에 선 애들이 그날 무너진 3구역 얘기를 한참 하다가 오늘 돈가스가 지난주보다 얇아졌다는 쪽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걸 뒤에서 들었다. 사람은 안 죽고 나면 돈가스 두께를 따진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살 만한 거지.주인공은 당연히 강현우다.균열 앞에 제일 먼저 서서 제일 늦게 물러난 놈이고, 신문에 이름이 실렸고, 교장이 단상에서 그 이름을 두 번 불렀다. 복도를 지나가면 애들이 대놓고 쳐다보는 통에 저놈은 모르는 척하느라 귀가 빨갛다.원작대로면 이 대관식은 두 달쯤 뒤에나 열렸다. 그만큼 당겨진 셈이다.좋다. 저놈은 커야 한다. 클수록 내가 산다.문제는 내 쪽 소문이 이상한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는 거다."야, 그거 들었어? 그 스폰남 있잖아.""걔가 왜.""능선 위로 올라갔대.""거짓말. 계단도 힘들어할 것처럼 생겼는데?""주작 애가 봤대. 개체 나오는 구역에서 지형을 줄줄 읊었다던데.""그건 좀 무섭다.""무섭긴. 개소리겠지.""개소리치고 본 사람이 너무 많아."여태 나쁜 소문은 편했다.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동안 내 돈은 조용히 움직였으니까. 이상한 소문은 결이 다르다. 나쁜 소문은 나를 덮어 주고, 이상한 소문은 나를 비춘다."형!"복도 저쪽에서 안경이 뛰어오는데 실내화가 바닥에 끽끽 끌렸고, 어깨에 걸친 가방이 뛸 때마다 옆구리를 한 대씩 때렸다. 요즘 이 녀석은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형 진짜 능선 올라갔어요? 저 그거 세 번 들었어요. 얘기가 갈수록 이상해지던데, 어제는 형이 개체 두 마리를 맨손으로—""안 올라갔어.""근데 형 어깨 붕대는요.""넘어졌어.""형 요즘 되게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대표님 (2)

    옆에서 유채원이 숨을 삼켰다."아빠. 지금 뭐라고 했어?"유채원의 아버지, 유정호는 딸의 물음에도 눈가가 벌게진 채 나만 바라봤다."맞으시죠. 우리 회사, 3년 전에 그날.""사람 잘못 보셨습니다."말하면서 늦었다는 걸 알았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늦게 나갔고, 저 사람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저는 열아홉입니다. 3년 전이면 열여섯이고요. 열여섯짜리가 무슨 회사를 삽니까.""그러니까요."유정호가 말했다."그때도 그게 제일 이상했어요. 교복 입은 애가 계약서를 들고 왔으니까. 그래서 3년 동안 못 잊은 겁니다. 얼굴을 딱 한 번 봤는데도.""아버님.""우리 딸이 지금 학교를 다니는 것도, 저 사람들이 오늘 여기서 일하는 것도, 전부.""그만하세요."내 목소리가 좀 셌던 모양이다. 유정호의 아내 박미경이 어깨를 붙잡았고, 그제야 유정호가 입을 다물었다.숨을 한 번 골랐다."오늘 여기 다친 사람 많습니다. 저기 명단, 아직 절반 남았고요."명단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그거부터 하시죠."부부가 나를 봤다. 뭘 말해도 안 통한다는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그때도 저 두 사람은 같은 질문을 표현만 바꿔 세 번 물었고, 나는 세 번 다 답을 안 바꿨다.유정호가 떨리는 손으로 명단을 주웠다."알겠습니다."돌아서면서 한마디가 붙었다."근데 대표님. 저희, 3년 동안 밥 한 끼 대접하겠다고 했던 거.""…….""아직 유효합니다."부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옆에 유채원이 남았다.한마디도 안 했다. 나도 안 했다. 부상자 실은 들것이 우리 사이를 두 번 지나갔고, 저 아래에서 확성기가 또 같은 안내를 반복했다."한도윤."세 번째 들것이 지나간 뒤에 그 애가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3년 동안 못 잊은 사람이 있어.""그래?""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딱 한 번 봤고, 감사 인사도 못 하게 하는 사람. 우리 회사가 넘어가는 날 나타나서 회사를 통째로 살려 놓고 그냥 간 사람."목소리가 이상하게 평평했다."내가 학교 다니는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대표님 (1)

    능선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유채원이 앞을 막았다."야! 한도윤!"제 몸도 흙투성이면서 목소리는 멀쩡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교복 소매엔 흙이 묻었어도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대피는 제대로 한 모양이다. 그 회사를 산 보람이 이런 데서 나온다."3구역 애들 다 빠졌는데 너만 없었어! 명단에 이름이 안 뜨길래—"3구역. 아침에 안전 점검 명목으로 인원을 아래로 뺀 자리다. 애들이 김샜다고 투덜대던 그 자리, 십 분 뒤에 능선이 통째로 갈라진 자리.이 애가 거기 있었구나."우리 조 원래 거기 앉아 있었거든. 점검한다고 옮기라 그래서 다들 툴툴댔는데, 옮기자마자 그쪽이."말하다 말고 내 꼴을 보더니 멈췄다. 찢어진 소매, 흙범벅 교복, 갈린 어깨, 뺨에 튄 흙이라기엔 색이 진한 것."너.""응.""너 지금 어디서 오는 건데.""저 위."나는 턱으로 능선을 가리켰다. 방금 균열이 열렸던 방향이었다.유채원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미쳤어?! 거기 통제구역이잖아! 대피 방송 세 번이나 나왔는데!""들었어.""들었는데 갔어?""어.""왜!"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대답할 만한 말이 하나도 없었다. 여태 지킨 얼굴을 저 위에 두고 왔다든가, 죽을 놈 하나 붙잡느라 흙바닥을 굴렀다든가, 전부 이 애한테 할 소리는 아니다."너 진짜 이상해.""알아.""아는 게 자랑이야?""자랑까진 아니고 경력이지.""뭐래."유채원은 내 손목을 잡고 후송 구역 쪽으로 끌었다."됐고, 일단 처치부터 받아. 어깨 그거 그냥 두면 안 돼.""별거 아니야.""별거 아닌 사람이 얼굴에 그런 거 묻히고 다니냐?""멋있잖아.""어디가.""각도 잘 잡으면 좀 나와.""각도 같은 소리 하네."말은 세게 하면서 잡은 손은 조심스러웠다. 다친 쪽을 피해서 반대쪽 소매를 쥐고 있었다. 저번 처치실에서도 그러더니.끌려가면서 나는 손목보다 딴 데 신경이 쏠려 있었다. 후송 구역이 눈에 들어왔으니까.3년 전 겨울에 사 둔 그 땅이었다. 며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등 뒤의 자리 (2)

    균열이 잦아든 건 그로부터 이십 분쯤 뒤였다.주작 병력이 능선을 넘어왔다. 홍세라가 미리 빼 둔 예비 병력이었다. 대피로는 뚫려 있었고, 다친 사람들은 이미 방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구청 방송이 세 번째 안내를 내보내는 중이었다. 여태 깔아 둔 조각들이 제 몫을 하고 있었다.동쪽 사면에서 검광이 두 번 번쩍였다. 도진혁이었다. 남은 개체 하나를 상급생 둘이랑 같이 몰아붙이는 중이었고,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원작에서 저놈은 저번 실습 때 오른팔을 못 쓰게 된다. 낡아 빠진 결계 장치 하나 때문에. 내가 그거 갈아 끼우느라 도장도 안 받고 일을 저질렀고, 그 서류가 나중에 차시현 손에 들어가서 복도에서 잔소리를 들었다.지금 저 두 손이 개체 하나를 붙들고 있다. 잔소리 한 번 값으로는 나쁘지 않았다.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교복은 흙이랑 남의 체액 범벅이었고, 어깨는 아까 구르면서 갈렸고,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숨이 돌아오자 시야를 열었다.━━━━━━━━━━━━━━[강현우 — 사망: 대형 균열 방어전 / D-DAY]━━━━━━━━━━━━━━검다. 아직도?숨이 한 번 막혔다. 판을 스무 겹 깔고 얼굴까지 걸고 이 흙바닥을 구르면서 사각을 다 읽어 줬는데도 안 꺼졌다는 건.칸이 흔들렸다.가장자리부터, 잉크가 물에 풀리듯이 검은색이 안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여태 시야가 뭘 채우는 건 봤어도 이렇게 비우는 건 처음이었다.━━━━━━━━━━━━━━[강현우 — 사망 플래그: 소멸]━━━━━━━━━━━━━━유리 깨지는 소리 같은 게 났다. 나만 들리는 소리였다.그리고 그 아래에서 내 칸이 돌아왔다.━━━━━━━━━━━━━━[ 한도윤 — 퇴장 예정 ]남은 시간 : D-DAY → D-9??━━━━━━━━━━━━━━자릿수가 다시 세 자리로 벌어졌다. 흐릿하게 잡혔다 풀리기를 몇 번 하더니 숫자가 자리를 찾았다.━━━━━━━━━━━━━━남은 시간 : D-930━━━━━━━━━━━━━━두 달 동안 사람 하나하나 붙여서 벌어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등 뒤의 자리 (1)

    강현우가 숙였다. 이유도 안 묻고 돌아보지도 않고. 회귀 전에 수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몸이라 그런가, 머리보다 목이 먼저 움직이더라.콰앙—방금까지 저놈 뒤통수가 있던 자리를 시커먼 게 훑고 지나갔고, 땅이 등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갈라졌고, 그 틈에서 두 번째 입이 열렸다. 원작에는 없는 자리에서.흙비가 쏟아졌다.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시야에서 눈을 못 뗐다.━━━━━━━━━━━━━━[2차 개방 — 진행]■ 대상: 강현우 (사각)━━━━━━━━━━━━━━아직 검다."왼쪽 두 번째 마디!""거기 껍질 얇아. 나머진 다 튕겨.""어떻게 알아.""물어볼 시간에 쳐."강현우가 나를 봤다. 아주 짧게. 그 반 초에 뭐가 지나갔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지금 나한테 뭘 더 물을 여유가 없었다.검이 갔다. 정확히 왼쪽 두 번째 마디로. 원작에서 저 개체를 잡는 데 스무 명이 붙었고 그중 셋이 죽고 나서야 알아낸 자리인데, 나는 그걸 침대에 누워서 읽었다.껍질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얇은 나무판 쪼개지는 소리랑 비슷했다.개체가 뒤로 물러났다. 처음으로.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땅이 또 부풀었다. 이번엔 세 군데였고, 시커먼 게 연달아 솟구쳤고, 그제야 이 판의 진짜 크기를 알았다.'어우.'아카데미가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날이라더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강현우가 내 앞으로 반보 나섰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뒤에 뭐가 서 있는지 인식도 못 한 몸짓처럼."뒤로 빠져."검을 든 팔이 이쪽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여긴 학생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너도 학생이야.""나는 달라.""어. 알아."입에 든 흙을 뱉었다. 아까부터 어금니가 서걱거렸다."니가 다른 것도 알고, 저게 세 번째로 어디서 나올지도 알아. 그러니까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오른쪽. 지금."강현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는 아직 나를 의심하는 중인데 몸은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방금 그 한 번이 목숨을 살렸으니까.오른쪽 흙더미가 터졌고, 검이 그

  •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데뷔 무대 (2)

    여태 도면으로만 보던 자리를 발로 밟으니 지형이 손바닥처럼 읽혔다. 저 아래 터는 3년 전 겨울에 사 둔, 길도 안 난 땅이다. 지금 그 위에 방벽이 서 있었다.오른쪽 오르막은 사람 실어 나르라고 미리 뚫어 둔 길인데 들것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능선 끝에는 초소도 하나 보였다. 서부 연구소가 학술 협조라는 이름으로 세운 눈이고, 저기가 균열 숨소리를 남들보다 몇 초 먼저 듣는다.도면일 땐 몰랐다. 밟으니까 보였다. 죄다 사람이 딛고 선 자리다.팔에 소름이 좀 돋았다. 나쁜 쪽은 아니고.가는 길에 유도등 하나가 꺼져 있었다. 봄에 재난 훈련한다고 구청이 손봐 둔 설비였다. 하필 그 앞에서 대피 인파가 갈라지다 멎어 있길래 나는 옆 갈림길을 손으로 가리켰다."그쪽 막혔어요. 왼쪽으로."교사 하나가 나를 돌아봤다가 손짓하는 방향을 보고 그대로 인솔을 틀었다. 뒤에서 누가 쟤 누구냐고 물었고,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발치에 누가 흘리고 간 도시락 뚜껑이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이 난리에 뚜껑만 남아서 굴러다니는 것도 재주다 싶었다.—2차 파형. 남서 사면. 예측 불가.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안 받을 수가 없었다."대표님!"홍세라였다. 폰 너머로 개체 울음이 섞여 들어왔다."애들 전부 투입했어요. 근데 이거, 예상이고 도면이고 현장이 대표님 그림이랑 딴판이에요! 두 번째 입이 북동 능선에 안 열려요!""알아."내가 지웠으니까. 두 달 전에 실습 사고 하나 지운다고 그 능선 균열을 먼저 치웠고, 그 한 삽이 오늘 지형을 통째로 바꿔 놓을 줄은 그때 몰랐지."그럼 두 번째 입은 대체 어디서—""남서쪽. 원래 없던 자리에서 열려. 아무도 안 보는 데서."폰 너머로 홍세라가 숨을 삼켰다."거기 방어 배치 없는데요.""알아.""대표님. 설마 지금 거기."거기서 말이 끊겼다."어젯밤에 뭐라고 했더라.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던가.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대표님!""홍세라.""……네.""끝나면 밥이나 사. 오늘 아침 굶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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