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르 추적꾼 빅토르 크로스

말라카르 추적꾼 빅토르 크로스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4
By:  천생신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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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음산한 성을 배경으로, 이 이야기는 두 괴물의 추락과 대립을 그립니다. 한때 움브라의 무법자였던 볼코프 드라큘라 백작은,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야수적 본능으로 매일 밤 양민의 피를 핥으며 연명합니다. 그의 삶은 고위 흡혈귀의 우아함 대신, 굶주림과 구차함이 뒤섞인 처절한 생존의 연속이죠. 반면, 추적꾼 빅토르 크로스는 고대의 악마 말라카르를 쫓다 제국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자로 전락합니다. 황제의 칙령 한 장 때문에, 그는 아프리카 사막을 떠돌다 결국 지하 감옥에서 다리마저 산산조각 나는 고문을 당합니다. 수십 년간 악귀를 사냥하던 그가, 이제는 절뚝이며 삼류 드라큘라의 소굴로 내몰린 셈입니다. 한때 포식자였던 두 존재가 각자의 몰락 끝에서 마주한 이 밤, 과연 누가 진짜 괴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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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장: 제국의 족쇄와 꺾인 긍지

 유럽 대륙의 동쪽 끝, 문명의 따스한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하고 짙은 안개와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변방의 땅. 그곳에는 한낮의 태양조차 제 빛을 발하지 못한 채 회백색 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척박하고 음산한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흑회색 절벽의 가장 높은 꼭대기, 마치 병든 대지에 박힌 거대한 야수의 송곳니처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성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풍파에 시달려 외벽 곳곳이 허물어지고, 검푸른 이끼와 가시넝쿨이 죽은 자의 혈관처럼 기괴하게 얽혀 있는 그 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절벽 아래 웅크린 숲과 계곡 전체에 숨 막히는 공포를 흩뿌리고 있었다.

본래 이 성의 주인이었던 오만한 인간 영주의 비명이 알현실의 대리석 바닥을 붉게 적시며 끊어진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와 단숨에 왕좌를 빼앗은 새로운 주인은, 어둠의 세계 '움브라(Umbra)'에서 건너온 악귀, 볼코프 드라큘라 백작이었다.

그는 고상한 귀족 흉내를 내며 와인잔에 피를 담아 마시는 여타 고위 악마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아한 주술 대신 짐승 같은 완력과 원초적인 폭력성으로 먹잇감을 짓밟는 무법자이자, 고스트 계의 깡패. 귀찮은 규율과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이 척박한 변방의 요새에 둥지를 튼 그는, 찢겨나간 인간 가문의 문장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밤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벼랑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눈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

태양이 핏빛 노을을 거두고 뼛속까지 시린 한기와 함께 짙은 어둠이 계곡을 집어삼키는 시간. 죽은 듯 고요하던 성탑 꼭대기에서 거대한 박쥐 형상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달빛조차 두터운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칠흑 같은 심야, 비로소 볼코프 백작의 진짜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움브라를 주름잡던 무법자라는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사냥의 방식만큼은 철저히 은밀하고 야만적이었다. 귀족적인 최면으로 사냥감을 매혹하거나 화려한 함정을 파는 수고로움 대신, 그는 그저 굶주린 짐승처럼 헐떡이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깎아지른 절벽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백작의 표적은 언제나 성채 아래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힘없는 인근의 양민들이었다.

차가운 밤안개에 몸을 숨긴 백작은 짐승의 보폭으로 낡고 허술한 오두막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했다. 문틈으로 짐승의 기름 냄새와 섞인 미약한 인간의 체취가 새어 나오면, 그는 문빗장을 부수는 대신 스산한 밤바람처럼 스며 들어갔다. 고된 노동에 지쳐 흙바닥에 쓰러져 곯아떨어진 농부나, 밤늦게까지 화덕 앞을 서성이는 나약한 촌부는 등 뒤로 훅 끼쳐오는 죽음의 냉기를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끔찍한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거대한 쇠집게 같은 백작의 억센 손아귀가 저항할 새도 없이 사냥감의 입과 어깨를 짓누르고, 짐승의 발톱보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무자비하게 목덜미를 꿰뚫었다. 투박하고 거친 인간의 살갗이 거칠게 찢겨나가고, 단말마의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해 컥컥거리는 방 안에는 오직 탐욕스럽게 피를 빨아들이는 질척한 파열음만이 울려 퍼졌다. 뜨거운 생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마다 백작의 창백했던 뺨에 기괴한 생기가 돌았고, 희생자의 몸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수분이 빠져나가며 차갑게 식어갔다.

하지만 핏줄을 타고 흐르는 펄떡이는 생명력은 잠시나마 얼어붙은 내장을 덥혀줄 뿐, 결코 풍요로운 만찬이 아니었다. 인간의 피를 와인처럼 숙성시켜 은잔에 따라 마시는 고위 흡혈귀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달리, 무식한 힘으로 움브라를 버텨온 이 깡패 백작에게는 성 안에 쌓아둔 피의 창고나 막대한 재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밤 야생의 감각에 의존해 음습한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짐승처럼 목을 뜯어 그날그날의 갈증을 면할 만큼만의 피를 핥아먹으며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 그것이 영지를 공포로 몰아넣은 붉은 눈의 괴물이 마주한 비참하고도 구차한 생존의 민낯이었다.

입가에 묻은 끈적한 핏자국을 투박한 손등으로 쓱 닦아낸 백작은, 채 가시지 않은 헛헛한 뱃속을 움켜쥐고 또 다른 오두막을 향해 번뜩이는 안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볼코프 백작의 구차한 사냥이 멈추고, 굶주린 위장이 진정한 포식을 누리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세상의 이치를 뒤틀어 금기의 힘을 탐하는 타락한 연금술사들이 고스트 계의 치명적인 악마 술(術), 이른바 ‘크루오르(Cruor) 비술’을 전수받기 위해 은밀히 이 저주받은 성을 찾아올 때가 바로 그 예외적인 날이었다. 라틴어 고어로 ‘유혈’을 뜻하는 이 비술은 오직 생명체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저주를 내리는 파괴적인 흑마법이었기에, 그것을 배우려는 대가 또한 끔찍하고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무정한 지식의 탐구자인 연금술사들은 비술의 대가를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금화를 쥐고 촌락의 가장 어둡고 빈곤한 구석을 뒤졌다. 기근과 질병에 시달려 당장 내일 먹을 빵 한 조각조차 구하지 못하는 가난에 찌든 천민 집안의 부모들은, 눈앞에 던져진 묵직한 돈주머니의 유혹과 절망적인 생존 앞에서 결국 눈물을 머금고 어린 처녀 딸을 팔아넘겼다. 영문도 모른 채 밧줄에 묶여 짐짝처럼 성으로 끌려온 가엾은 처녀들은 백작을 위한 최고급 제물이 되었다.

연금술사가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공물로 바친 처녀의 맑고 순결한 피는, 평소 시궁창 같은 오두막에서 억지로 들이켜야 했던 늙고 병든 자들의 탁한 피와는 차원이 다른 달콤함이었다. 백작은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피를 탐욕스럽게 핥아 마시며 검붉은 황홀경에 빠져들었고, 흡족한 미소 속에서 연금술사들에게 몇 가지 흉측한 크루오르의 저주를 하사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횡재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 벌어지는 일일 뿐이었다. 움브라의 고위 귀족들처럼 서늘한 지하 창고에 피가 가득 찬 와인 오크통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거나, 정교한 인간 농장을 세련되게 운영할 만한 재력도, 지능적인 수완도 그에게는 없었다. 가엾은 처녀의 피로 채웠던 달콤한 상납의 밤이 지나고 나면, 볼코프 백작은 또다시 텅 빈 위장이 꼬이는 참혹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인간의 피를 섭취하기 위해 그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타고난 야생의 완력뿐이었다. 어둠의 통치자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그는 매일 밤 굶주린 들개처럼 성 밖을 배회하며 짐승 같은 힘으로 무식하고도 잔혹한 범죄 행각을 벌여야만 했다. 쌓아둔 피의 재산이 단 한 방울도 없는 깡패 드라큘라에게는, 닥치는 대로 양민의 목을 뜯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야만적인 사냥만이 유일하고도 비참한 생존 방식이었다.

태초의 숲이 품은 비밀을 수호하고 대자연의 흐름을 다스리던 고대의 제관,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드루이드(Druid)라 불렀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타락하여 고스트 계에 몸을 담은 악한 드루이드들은 생명의 힘을 비틀어 죽음의 주술을 부리고, 맹수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생명체의 육신과 정신을 찢어발기는 끔찍한 재앙 그 자체였다. 이들은 단순히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류와는 차원이 달랐다. 곰이나 표범 같은 거대한 야수로 변신해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교묘하게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환각과 저주로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는 원초적인 악마들. 이들 앞에서는 웬만한 괴물들조차 공포에 질려 숨을 죽여야만 했다.

이 참혹한 고대 마물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어둠을 뿜어내는 자가 바로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Malakar)’였다. 밤마다 촌부의 낡은 오두막이나 털어 피를 핥아먹는 변방의 깡패 볼코프 백작 따위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고스트 계의 까마득한 대선배이자 절망의 군주였다. 그리고 이 거대한 악을 영원한 지옥으로 처박기 위해 평생의 숙명을 걸고 검과 총을 쥔 사냥꾼이 있었으니, 바로 고스트 계의 악귀들을 처단하는 냉혹한 추적꾼 ‘빅토르 크로스(Victor Cross)’였다.

빅토르는 피 냄새를 쫓는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말라카르의 뒤를 쫓았다. 숱한 사투 끝에 말라카르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그 사악한 심장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악한 드루이드의 진정한 무기는 야수의 발톱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한 틈을 파고드는 교활한 혀와 간악한 주술이었다.

궁지에 몰린 말라카르는 정면 돌파 대신 치밀하고도 소름 끼치는 농간을 부렸다. 그는 특유의 둔갑술과 환각을 이용해 빅토르가 지키려던 무고한 자들을 도리어 빅토르가 학살한 것처럼 위장했다. 더 나아가 인간 권력자들의 꿈속에 파고들어 정신을 교란시킴으로써, 빅토르를 통제 불능의 위험분자로 낙인찍어 버렸다. 이 비열한 이간질과 완벽하게 짜인 주술적 함정에 빠진 빅토르는 뼈아픈 타격을 입고 말았다. 말라카르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커녕, 도리어 심각한 부상과 함께 사냥꾼으로서의 명예마저 진흙탕에 처박힌 것이다.

그 심하게 당한 대가는 참담했다. 말라카르의 교묘한 뒷공작에 놀아난 권력층은 눈엣가시가 된 빅토르를 가장 멀고 후미진 곳으로 쫓아낼 구실을 찾았고, 결국 그에게 터무니없는 강제 동원령을 내렸다. 그것은 대자연의 섭리를 뒤틀어 버리는 고대 악마 말라카르를 사냥하던 일급 추적꾼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가 억지로 떠맡게 된 새로운 표적은, 저 멀리 동유럽 구석진 땅의 낡은 성에 틀어박혀 양민들의 목이나 물어뜯으며 연명하는, 자신보다 한참은 격이 낮은 하급 마물. 바로 볼코프 백작의 소탕이었다.

진짜 사냥감을 눈앞에서 놓치고 함정에 빠진 빅토르는, 들끓는 분노와 모멸감을 차가운 은제 총탄과 함께 씹어 삼키며 썩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 동구의 척박한 땅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발밑에 두고 호령하는 거대한 제국. 그 정점에 군림하는 황제의 권력은 고스트 계의 악마들조차 함부로 넘보지 못할 만큼 압도적이고 절대적이었다. 천하를 쥐고 흔드는 옥좌에서 뻗어 나온 명령은 한낱 변방의 먼지부터 가장 깊은 숲속의 은둔자까지 모조리 옭아매는 거대한 쇠사슬과도 같았다.

말라카르의 간악한 농간이 결국 제국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권력층의 귀에까지 닿았음이 분명했다.

빅토르의 눈앞에 던져진 것은 사냥꾼 길드의 흔해 빠진 임무 하달서가 아니었다.

핏빛보다 선명한 황실의 밀랍 인장이 무겁게 짓눌러진 최고급 양피지.

그것은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엄중한 ‘칙령(勅令)’이었다.

어두운 뒷골목과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누비며 괴물들을 도륙하던 무자비한 추적꾼 빅토르라 할지라도, 이 칙령 앞에서는 꼼짝없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칙령을 찢어버리는 순간, 그는 제국의 비호를 받는 사냥꾼의 신분을 잃고 황실 친위대와 수만 명의 추격대에게 쫓기는 반역자 신세로 전락할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평생의 숙적인 드루이드 말라카르의 목을 치기는커녕, 제국의 칼날 아래 허무하게 목숨을 잃거나 햇빛조차 들지 않는 감옥에서 평생을 썩어가야 할 것이 자명했다.

빅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양피지를 쥔 그의 거친 손마디가 터질 듯 하얗게 질렸고 억눌린 분노로 어깨가 잘게 떨렸지만, 끓어오르는 모멸감을 삼키는 것 외에는 당장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악마를 단숨에 두 동강 내던 그의 날카로운 검마저도, 제국이라는 거대한 인간의 권력 앞에서는 무력하게 칼집 속에서 침묵해야만 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황제의 칙령은 그렇게 빅토르의 발목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족쇄를 채운 채, 그를 볼코프 백작이 웅크리고 있는 저주받은 동유럽의 변방으로 가차 없이 등 떠밀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철권 통치하는 거대한 절대 권력, ‘발테리아 제국(Valteria Empire)’의 붉은 밀랍 인장이 찍힌 양피지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빅토르는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황금빛 수실이 달린 그 칙령의 마지막 구절까지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문장을 곱씹을수록 그의 핏속에서는 굴복 대신 걷잡을 수 없는 오만과 불길 같은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칙령에 적힌 임무의 상세 내용은 참담할 정도로 초라했다. 변방의 낡은 돌덩이 성에 틀어박혀 밤마다 촌부들의 피나 핥아먹는 삼류 흡혈귀, 볼코프 백작의 목을 쳐오라는 것. 그것은 수백 년 묵은 악한 드루이드 말라카르와 생사를 건 혈투를 벌여온 일급 추적꾼에게는 노골적인 조롱이자 치욕이었다. 그가 겪어온 지옥 같은 전장과 베어 넘긴 고대의 악마들에 비하면, 저 동구의 드라큘라는 그저 덩치 큰 들개에 불과했다. 제국 수뇌부의 의도는 명백했다. 썩은 피나 마시는 하급 마물 따위에게 검을 더럽히게 만들어, 사냥꾼으로서의 위대한 명예를 진흙탕 속에 영원히 처박으려는 속셈이었다.

양피지를 쥔 빅토르의 투박한 손아귀에 우두둑 뼈 소리가 나도록 힘이 들어갔고, 절대적인 황제의 칙령은 순식간에 볼품없이 구겨져 화로 속으로 던져졌다.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황실의 귄위를 상징하는 인장을 시꺼멓게 녹여버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곧 제국 전체의 무력을 적으로 돌리는 자살 행위였지만, 짐승보다 못한 하급 마물의 꽁무니를 쫓으며 스스로 긍지를 짓밟히느니 차라리 반역자의 낙인을 달고 쫓기는 길을 택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미련 없이 은으로 주조된 총탄과 낡고 무거운 도검만을 챙겨 들고 칠흑 같은 밤의 장막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목적지는 제국의 삼엄한 감시망과 거미줄 같은 정보망이 그나마 헐겁게 미치는 미지의 땅, 태양과 모래의 대륙 아프리카였다.

제국의 정예 추격대들이 동유럽의 숲과 산맥을 샅샅이 뒤집어엎는 동안, 빅토르는 이미 지중해의 거친 파도를 넘는 밀항선의 썩은내 나는 밑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유라시아의 밤공기가 익숙했던 그에게, 처음 발을 내디딘 아프리카 대륙은 숨이 턱 막힐 듯한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는 모래폭풍이 지배하는 가혹한 세계였다. 북아프리카의 메마르고 번잡한 항구 도시 미로 같은 골목에 스며든 그는 사냥꾼의 긍지 높던 이름을 버리고 철저한 이방인이자 유령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발테리아 제국은 황제의 명령을 발밑의 먼지처럼 무시한 오만한 사냥꾼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흙먼지 날리는 시장통과 허름한 술집, 으슥한 뒷골목의 벽마다 빅토르의 험악한 얼굴이 그려진 현상 수배지가 빽빽하게 나붙기 시작했다. 그의 목에 걸린 막대한 제국의 금화에 눈이 먼 현지의 무자비한 용병들과 사막의 암살자들이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흔적을 쫓았다. 빅토르는 스스로가 고스트 계를 벌벌 떨게 하던 포식자에서, 거대한 인간 권력에 쫓기는 사냥감으로 전락했음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빛바랜 넝마를 푹 눌러쓴 채 낮에는 뜨거운 모래언덕의 동굴에 숨죽여 엎드리고, 밤이면 별빛조차 닿지 않는 외진 오아시스 근방을 전전하며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한때 유라시아 대륙의 어둠을 가르던 위대한 추적꾼은, 제국의 거대한 분노를 피해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구석진 그늘 아래서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끝없는 수배범의 삶을 위태롭게 연명해 나갔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짐승의 썩은 내장으로 위장해 보아도 그들의 집요한 후각을 끝내 속일 수는 없었다.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파견된 제국 최정예 암살 및 추적 부대, ‘블러드 하운드(Bloodhound) 특수대’가 마침내 아프리카 북부의 메마른 협곡 한가운데서 빅토르의 숨통을 옥죄어 왔다. 숱한 고대 악마들을 도륙했던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나, 감정을 거세당하고 오직 살육만을 위해 훈련된 수십 명의 인간 병기들이 거미줄처럼 쳐놓은 포위망을 단신으로 뚫어낼 재간은 없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처절한 사투 끝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빅토르는 결국 차가운 강철 사슬에 짐승처럼 묶인 채 유라시아 대륙으로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짐짝처럼 던져진 곳은 제국의 서쪽 끝, 작열하는 태양과 메마른 대지가 펼쳐진 ‘에스파르다(Esparda) 속주’였다. 그중에서도 깎아지른 해안 절벽 아래 뚫려 있는 ‘산크투스(Sanctus) 지하 감옥’은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결코 햇빛을 볼 수 없다는 악명 높은 생지옥이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축축하고 썩은내 진동하는 감방에서, 제국은 오만한 사냥꾼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주는 자비 따위는 베풀지 않았다. 제국 수뇌부가 원한 것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었다. 황제의 칙령을 감히 휴지 조각 취급한 자의 뼛속 깊은 오만함을 완벽하게 박살 내고, 절대 권력의 발밑에 벌레처럼 기어 다니게 만드는 철저한 '굴복'이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스산한 지하 고문실. 눅눅한 공기 속에는 썩은 피비린내와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칙령을 거부한 오만함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아직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나 보군."

블러드 하운드 특수대의 고문관이 차갑게 식은 화로 속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인두를 꺼내 들었다.

치이익-!

짐승의 누린내 같은 연기와 함께 제국의 흉측한 낙인이 땀에 젖은 빅토르의 등짝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쇠사슬에 매달린 빅토르의 전신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튀어 올랐지만,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끝내 비명을 삼켰다.

거친 숨소리만 토해내는 빅토르를 내려다보며 고문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그는 인두를 화로에 던져버리고, 구석에 놓여 있던 무거운 강철 철퇴를 집어 들었다.

"사냥꾼에게 다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그 뻣뻣한 고개를 꺾으려면, 대지를 박차는 법부터 영원히 잊게 만들어야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철 철퇴가 묵직한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퍼억-! 우두둑!

무자비하게 내리꽂힌 쇳덩이가 빅토르의 왼쪽 무릎 관절을 정확히 산산조각 냈다. 억센 근육이 파열되고, 하얀 뼛조각이 시뻘건 살점을 뚫고 기형적인 각도로 튀어나왔다. 웬만한 고문에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던 빅토르의 입에서, 마침내 짐승의 단말마 같은 끔찍한 비명이 감옥의 천장을 찢어발겼다.

"크아아아아악-!"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까무러치는 빅토르의 귓가에, 고문관의 서늘한 속삭임이 뱀처럼 기어들어 왔다.

"기억해라, 사냥꾼. 너는 제국의 발밑을 기어 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강철 같은 의지도, 매일 반복되는 숨 막히는 폭력과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의 고통 앞에서는 결국 마모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참혹한 조련이 끝나고 마침내 감옥의 육중한 철문 밖으로 짐짝처럼 내던져진 것은, 예전의 당당하고 거침없던 위대한 추적꾼이 아니었다. 왼쪽 다리가 완전히 망가져 형편없이 절뚝거리는, 만신창이가 된 한 명의 패배자였다.

눈부신 햇빛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빅토르는 자신의 발밑에 다시 던져진 그 구겨진 칙령과 은제 총탄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황제는 그를 죽이는 대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육신의 장애와 수치심을 안겨준 채, 기어코 그 삼류 드라큘라의 소굴로 등을 떠민 것이다. 부서진 뼈가 억지로 맞물리며 전해지는 끔찍한 고통을 질근질근 씹어 삼키며, 빅토르는 반항심조차 거세된 텅 빈 눈동자로 흙바닥의 무기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저 멀리 볼코프 백작이 도사리고 있는 동유럽의 낡은 성을 향해 비참하고도 느릿한 절뚝임을 시작했다.

검붉은 빛깔로 물든 동유럽의 하늘, 지는 해를 등지고 수천 마리의 박쥐 떼가 죽은 땅 바로 위를 스치듯 날아다니며 불길한 징조를 흩뿌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 어둠이 짙게 깔린 볼코프 백작의 음산한 성을 향해 오르는 좁은 비탈길에는 무겁고 불규칙한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탁... 즈으윽... 탁..."

황실 감옥에서의 참혹한 고문이 남긴 훈장, 완전히 망가져 형편없이 뒤틀린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 빅토르 크로스의 투박한 숨소리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졌던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사냥꾼의 텅 빈 눈동자에는 육신의 고통보다 깊은 모멸감과 차가운 살의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성문이 빅토르의 발길질 한 번에 힘없이 열렸다.

썩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성 내부는 짐승의 누린내와 마른 피 냄새가 진동하는 거대한 도축장과 같았다. 성의 주인이자 움브라 계의 무법자, 볼코프 백작은 불청객을 위한 우아한 인사 따위는 생략했다.

칠흑 같은 천장 석들보에 피에 굶주린 들개처럼 매달려 있던 백작.

그는 다리를 절뚝이는 빅토르를 나약한 먹잇감으로 착각했다. 기괴한 괴성과 함께 백작의 그림자가 허공을 가르며 덮쳐왔다.

강철 같은 발톱이 빅토르의 목덜미를 노리고 쇄도하는 찰나였다.

그러나 제국에 의해 육신이 꺾였을지언정, 수십 년간 숱한 악마들을 썰어 넘기던 일급 추적꾼의 전투 본능마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빅토르는 절뚝이는 다리를 오히려 축으로 삼아, 상체를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비틀었다. 백작의 발톱이 빅토르의 낡은 가죽 코트를 찢고 허공을 가르는 순간, 빅토르의 거친 손은 이미 품속에서 차갑고 육중한 리볼버를 뽑아 든 상태였다. 고스트 계를 처단하기 위해 특별히 주조된 순도 높은 은(銀) 탄환이 장전된 무기였다.

"타아앙-!"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시뻘건 화약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은제 총탄은 짐승처럼 도약하던 볼코프 백작의 넓은 가슴팍을 정확히 꿰뚫었다.

"크아아아악!"

평범한 철검이나 납탄 따위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던 백작의 단단한 피부가, 은탄환이 박히는 순간 무서운 속도로 타들어 가며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움브라의 흑마법으로 빚어진 불사의 육신이 은이 뿜어내는 정화의 기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끔찍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고꾸라져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백작을 향해, 빅토르는 고통스러운 다리를 끌며 냉혹하게 다가갔다. 살려달라 애원할 이성조차 남아있지 않은 채,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깡패 드라큘라에게 자비는 없었다. 빅토르의 차가운 총구가 백작의 미간을 정확히 겨냥했다.

"너 같은 삼류 찌꺼기에게 허비할 긍지 따윈 없다."

낮게 으르렁거린 빅토르의 굵은 손가락이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연이은 굉음과 함께 두 번째 은탄환이 백작의 두개골을 산산조각 냈다. 동구의 척박한 밤을 공포로 지배하던 볼코프 백작의 육신은 한 줌의 재와 진흙으로 허물어져 내렸고, 그의 사악한 영혼은 영원한 고통만이 기다리는 움브라 계의 가장 깊은 지옥으로 비참하게 처박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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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Kabanata
제1장: 제국의 족쇄와 꺾인 긍지
유럽 대륙의 동쪽 끝, 문명의 따스한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하고 짙은 안개와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변방의 땅. 그곳에는 한낮의 태양조차 제 빛을 발하지 못한 채 회백색 구름 뒤로 숨어버리는 척박하고 음산한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흑회색 절벽의 가장 높은 꼭대기, 마치 병든 대지에 박힌 거대한 야수의 송곳니처럼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거대한 성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풍파에 시달려 외벽 곳곳이 허물어지고, 검푸른 이끼와 가시넝쿨이 죽은 자의 혈관처럼 기괴하게 얽혀 있는 그 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절벽 아래 웅크린 숲과 계곡 전체에 숨 막히는 공포를 흩뿌리고 있었다.본래 이 성의 주인이었던 오만한 인간 영주의 비명이 알현실의 대리석 바닥을 붉게 적시며 끊어진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와 단숨에 왕좌를 빼앗은 새로운 주인은, 어둠의 세계 '움브라(Umbra)'에서 건너온 악귀, 볼코프 드라큘라 백작이었다.그는 고상한 귀족 흉내를 내며 와인잔에 피를 담아 마시는 여타 고위 악마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아한 주술 대신 짐승 같은 완력과 원초적인 폭력성으로 먹잇감을 짓밟는 무법자이자, 고스트 계의 깡패. 귀찮은 규율과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이 척박한 변방의 요새에 둥지를 튼 그는, 찢겨나간 인간 가문의 문장 위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밤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벼랑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눈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태양이 핏빛 노을을 거두고 뼛속까지 시린 한기와 함께 짙은 어둠이 계곡을 집어삼키는 시간. 죽은 듯 고요하던 성탑 꼭대기에서 거대한 박쥐 형상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달빛조차 두터운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칠흑 같은 심야, 비로소 볼코프 백작의 진짜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그는 움브라를 주름잡던 무법자라는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사냥의 방식만큼은 철저히 은밀하고 야만적이었다. 귀족적인 최면으로 사냥감을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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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철축단애(鐵軸斷崖), 부서진 육신으로 벼려낸 칼날
페테르부르크의 흑한(極寒)은 그저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 피부 밑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적인 기상 현상이었다. 네바 강의 살얼음을 깎아내며 불어온 칼바람이 황궁의 육중한 대리석 기둥을 때릴 때마다, 빙결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둔탁하고 기괴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황금빛 돔과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조각들로 치장된 지상의 본성과 달리, 빅토르가 향한 황궁 가장 깊은 곳의 ‘황실 움브라 통제국(Umbra Control Bureau)’은 짙은 음습함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빛이 온전히 닿지 않는 화강암 계단에는 벽면에서 스며 나온 습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시커먼 살얼음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탁한 가스등이 헐떡이며 내뿜는 매캐한 석탄 냄새와 오래된 양피지들의 묵은내, 그리고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비릿한 피 냄새가 환기되지 못한 채 묵직한 공기 속에 진득하게 녹아 있었다. 빅토르의 투박한 구두 굽이 얼어붙은 석재 바닥을 짓누를 때마다 울리는 파열음은, 이 거대한 지하 건축물이 살아 숨 쉬며 침입자의 온기를 착취하는 괴물의 내장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둠의 피조물들을 감시하고 사냥꾼들을 통제하는 제국의 은밀한 기관이었다.통제국의 수장이자 움브라 계 특별 관리관인 ‘바실리 카라조프(Vasily Karazov)’는 탁한 가스등 조명 아래서 거만한 표정으로 빅토르를 맞이했다. 빅토르는 그에게 어떠한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자루의 끈을 풀어 집무실의 매끄러운 탁자 위로 내용물을 쏟아냈다.툭, 데구르르.은탄환에 미간이 박살 난 채 흉측하게 일그러진 머리통 하나가 굴러나왔다. 재로 바스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 주술이 걸린 은가루를 잔뜩 뿌려둔, 볼코프 백작의 잘린 수급이었다. 바실리는 불쾌한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리며 비단 손수건으로 코끝을 가렸지만,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수급의 이목구비와 수배 서류를 꼼꼼히 대조했다. 특유의 기형적인 송곳니와 야성의 골격. 동유럽 변방을 어지럽히던 움브라 계의 깡패, 볼코프 백작이 틀림없었다."수고했군, 추적꾼. 제국의 칙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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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사막의 신기루, 기만적인 안식
사바나의 붉은 흙바닥이 점차 하얗게 탈색되며 끝없는 모래의 바다로 이어지는 사막의 초입. 정오의 태양은 모든 수분을 증발시키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미세한 유리 조각 같은 모래알들이 사나운 열풍을 타고 날아와, 찢겨나간 빅토르의 복부와 어깨의 열상(裂傷) 위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끓어오르는 모래밭 위로 아무런 가림막 없이 내던져진 탓에, 사막의 태양은 자비 없이 그의 남은 생명력을 바싹 말려버리고 있었다. 입술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졌고, 고철 같은 왼쪽 다리는 이제 감각마저 상실해 버렸다.흐려지는 동공 위로 썩은 고기를 탐하는 사막 독수리 떼의 그림자가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모든 고통이 마비되고 지독한 갈증마저 잊혀갈 무렵, 빅토르는 이 핏빛 생애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죽음의 안식이 자신을 데려가려 함을 느꼈다.바로 그때였다. 열기로 기괴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뚫고 한 인영(人影)이 다가왔다.푸른 천으로 머리와 입술을 가린 채, 맑고 단단한 눈동자만을 빛내고 있는 젊은 여인. 생명의 흔적을 찾아 척박한 길을 횡단하던 유목 부족 '알 하리브'의 딸, 아미라(Amira)였다.그녀는 피비린내와 짐승의 악취가 진동하는 참혹한 광경을 발견하고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이 찢겨나가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사내. 사막의 미신대로라면 악령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미라의 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깊은 연민이 먼저 차올랐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가와 가죽 물통의 마개를 열었다."살아야 해요. 죽음에 굴복하지 말아요."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부드러운 이집트어 억양으로 속삭이며, 거칠게 갈라진 빅토르의 입술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을 흘려보냈다.물 한 모금에 밴 광물질의 쓴맛. 그것은 메말라가던 빅토르의 세포를 억지로 찢어발기며 깨우는 날카로운 생명수였다. 아미라는 땀범벅이 된 채 가녀린 어깨로 짐승처럼 무거운 빅토르의 거구를 부축하고, 기어코 모래 언덕 너머의 오아시스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빅토
last updateHuling Na-update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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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잿빛 까마귀의 유산, 그리고 영면
붉은 흙먼지가 날리던 아프리카의 지평선을 등진 빅토르의 여정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사그라지고 지중해의 비릿하고 짠 바닷바람이 밀항선 밑바닥의 썩은 널빤지를 때릴 무렵부터, 사냥꾼의 핏속에 잠들어 있던 서늘한 감각은 점차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그는 동유럽의 험준하고 축축한 산맥들을 절뚝이는 다리로 묵묵히 넘었다. 남에서 북으로 북상을 거듭할수록 대기의 온도는 급격히 곤두박질쳤고, 하늘을 짓누르는 구름은 검붉은 빛깔에서 무거운 납빛으로 색채를 잃어갔다. 유목민의 푸른 베일(타겔무스트)과 얇은 가죽 코트는 이미 매서운 북풍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나간 지 오래였다. 대신 그의 어깨 위에는 사냥한 야생곰의 두꺼운 털가죽이 눈보라를 막기 위해 무겁게 얹혀 있었다.마침내 빅토르의 발길이 당도한 곳은, 세상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흑한(極寒)의 땅이자 거대한 발테리아 제국의 심장부가 똬리를 틀고 있는 주도(主都),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였다.이곳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생명체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거대한 백색의 야수와도 같았다. 대기를 찢으며 몰아치는 시베리아의 눈보라는 수만 개의 미세한 유리 조각처럼 빅토르의 거칠어진 뺨을 난도질했다.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허연 입김이 수염 끝에 엉겨 붙어 고드름처럼 얼어붙었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찬 얼음장 같은 공기는 기관지를 날카롭게 긁어댔다.무엇보다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는 빅토르의 망가진 육체에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과거 이곳 제국의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며 박살 났던 왼쪽 무릎 관절은, 영하의 기온 속에서 뼛속의 골수까지 얼어붙는 듯한 끔찍한 통증을 토해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뼛조각들이 살을 찢는 듯한 마찰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빅토르는 눈보라 속에서 짐승처럼 턱을 꽉 깨문 채 묵묵히 기형적인 발자국을 눈밭 위에 새겨 나갔다.잿빛 안개와 거센 눈보라 너머로, 이윽고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그 오만하고도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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