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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Author: 리사야

빌런은 대본을 다 읽었다 (1)

Author: 리사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18:25:16

입학식이 끝나고 강당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 흐름을 혼자 거꾸로 거슬러 오는 놈이 하나 있었다. 어깨로 인파를 밀어내며 곧장 이쪽으로 오더니, 내 걸음이 닿을 자리에 발을 딱 붙이고 섰다.

"한도윤."

반말이었다. 통성명도 없이.

키는 나랑 비슷한데 어깨만 유독 벌어져 있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열아홉짜리한테 전혀 안 어울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처음 보는 눈이 아니라, 한 번 죽여 본 걸 다시 만난 눈.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

오. 첫 대사부터 세게 나오시네.

목덜미엔 입학식 땡볕이 아직 벌겋게 남아 있었다. 새 교복인데 소매에서 나온 손이 안 맞았다. 마디마다 굳은 자리가 있었고, 말하는 동안 그 오른손이 허리께에서 한 번 접혔다 펴졌다. 거기 아무것도 안 걸려 있는데.

"잠깐만."

손가락으로 강당 쪽을 가리켰다.

"혹시 다른 한도윤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우리 집안 이름 흔한데."

"아니."

"확실해? 작년에도 한 명 있었어. 삼십 분 떠들고 사람 잘못 봤대."

"한도윤은 너 하나야."

"그건 좀 섭섭한데. 나눠 질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공평하지."

단호하시네.

신발코로 화단 경계의 흰 자갈을 한 번 굴리자 서걱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뒤에서 사진 찍던 학부모들이 그 소리에 카메라를 내렸고, 현수막 아래를 빠져나가던 걸음들도 슬슬 느려지는 중이었다.

"2학년 봄에 하나가 학교를 그만둔다. 그 뒤로 이름이 없어."

자갈을 굴리던 발이 멈췄다.

목소리가 한 단 더 내려갔다.

"이 학교에서 내가 세는 이름은 하나다. 먼저 꺾기로 한 이름도 하나고."

입학식 날 누가 누구 멱살을 잡았다더라 하는 얘기는 교칙보다 빨리 퍼지는 법이라, 구경꾼 스무 명쯤이 삼 미터 뒤에서 모르는 척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었다.

정리해 보자. 처음 만난 놈이 통성명 대신 협박을, 그것도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정상은 아니지.

근데 더 정상이 아닌 건 내 쪽이었다. 나도 저놈을 알거든.

강현우.

어젯밤까지 내가 침대에 널브러져 넘기던 소설의 주인공이다. 멸망한 미래에서 돌아와 이번 생엔 다 막아 보겠다고 이 악문 회귀자다. 그리고 원작에서 재벌 빌런 한도윤을 직접 손봐서 퇴장시키는 남자.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장면, 원작에 없다.

원작 입학식에서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고, 부딪히는 건 한참 뒤였다. 내가, 아니 원작의 한도윤이 윤이서 교과서를 창밖으로 던지고 신발을 없애고, 옆에 붙어 있던 애들을 하나씩 떼어 내고, 그러다 끝내 선을 넘은 다음에.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정확히는, 원작의 한도윤이 하던 짓만 쏙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 했지만.

빼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저 몸이 부순 것 중 몇 개는 3년에 걸쳐 조용히 도로 사다 놨다.

목록은 3년 동안 한 줄씩 줄었다. 한 줄만 안 줄었다.

그 시작은 천 일 전이었다.

* * *

눈을 떴더니 소설 속이었다.

빙의 자체는 뭐, 그러려니 했다. 밤새 폰으로 소설 넘기다 잠들었으니 개연성은 차고 넘친다.

진짜 문제는 배역이었다. 하필 내가 뚝 떨어진 자리는 윤이서 하나를 3년에 걸쳐 혼자로 만들어 놓고 주인공한테 흠씬 깨지는, 몇 번 나오다 조용히 사라지는 재벌 망나니였다.

거울 속에서 앞머리로 눈을 반쯤 가린 잘생긴 낯짝이 마주 봤다. 일부러 음침하게 세팅한 얼굴이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 딱 다섯 번 나오고 퇴장하는 얼굴인데.

"반갑다."

거울한테 인사까지 해 봤지만 저쪽은 대답이 없었다. 그야 그렇지.

한도윤.

열여섯.

재벌 3세.

며칠 전까지는.

기억을 정리해 보니 상황은 단순했다. 이 몸은 사고를 대차게 쳐서 가문에서 잘렸고, 입 다무는 값으로 거액을 받는 대신 두 번 다시 집 근처엔 얼씬도 안 하겠다는 종이에 도장을 꽝 찍었다.

원작의 한도윤은 그 돈을 3년에 걸쳐 술이랑 도박으로 아주 알뜰하게 태운다. 성격만 남은 빈털터리로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여자애들한테 집적대다 강현우한테 코 깨지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

등장 다섯 번. 대사 절반이 "감히 나한테?"

다섯 번에 대사 절반이 같은 문장. 나 같아도 안 읽지.

이 몸이 제일 자주 한 짓이 뭔 줄 아나. 여자 앞에서 카드 긁으며 이 정도는 껌값이라고 폼 잡다가 정작 한도 초과로 결제가 막히는 거였다. 없어 보이는 것도 꼭 티 나게 없어 보이고. 클래스 참 꾸준하지.

그때 눈앞에 반투명한 글자가 떴다.

━━━━━━━━━━━━━━

[ 메인 스토리 진입 ]

남은 시간 : D-1000

예정 역할 : 퇴장형 빌런

━━━━━━━━━━━━━━

친절하기도 하셔라.

무대에 오르기까지 천 일.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내 배역은 퇴장이란다.

남의 미래는 뭐든 보인다. 회사가 언제 망하는지, 누가 언제 죽는지, 어떤 기술이 몇 년 뒤에 다들 쓰는 물건이 되는지.

근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시야가 딱 입을 다문다. 거울을 봐도 손바닥을 봐도 가슴에 손을 얹어도 아무것도 안 뜬다.

딱 하나, 저 숫자만 뜬다. 내가 언제 무대에 서는지, 거기서 뭐가 될 예정인지. 이유는 안 알려 준다. 피하는 법은 더더욱 안 알려 주고, 남은 날짜만 꼬박꼬박 세어 준다.

이게 제일 악질이지.

천 일 뒤면 원작 무대인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거기서 대본대로 굴면 돈이고 사람이고 목숨이고 전부 주인공 빛내는 재료로 쓰이고 끝이다. 퇴장형이라잖아. 이 시스템, 스포일러를 아주 대놓고 한다.

싫은데.

죽는 것도 싫고 가난해지는 것도 싫지만, 남 배경으로 사는 건 그중에서도 제일 싫다. 배경은 조명을 안 켜 준다.

무엇보다 나는 그 소설을 완결까지 봤다. 어느 균열이 언제 터지는지, 어떤 회사가 몇 년 뒤 수백 배로 뛰는지, 누가 배신하고 누가 끝까지 살아남는지.

회귀자가 목숨 갈아 넣어 얻은 미래를 나는 원룸 침대에 누워 공짜로 정주행했다.

거기서 나는 값이 안 붙는 쪽이었다. 나가는 돈만 있고 들어오는 값이 없어서, 남의 이야기만 읽었다. 읽는 건 공짜니까.

여기선 내가 뭐가 얼마짜린지 안다.

거기다 열여섯짜리가 만지기엔 자릿수부터 비현실적인 입막음 값까지 딸려 있었고, 말릴 부모도 돌아오라 부를 가문도 없었다.

천 일.

대본 아는 놈한테는, 판 하나 새로 깔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자, 그럼.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이 몸에 딸려 온 게 돈이랑 기억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거리 건너 회사 간판 위에, 폰 경제 뉴스의 기업 로고 위에 옅은 글자가 떠 있었다. 어떤 이름엔 꽉 찬 검은 네모가, 어떤 이름엔 아직 안 채워진 빈 네모가.

플래그가 보였다. 사람이랑 회사에 걸린,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이거 좀. 사기 아닌가?

폰 검색창에 회사 이름 하나를 쳤다.

가온다인.

내 첫 번째 플래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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