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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은 대본을 다 읽었다 (2)

Author: 리사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18:25:27

서울 외곽 3층짜리 사옥은 간판 글자부터 반쯤 떨어져서 '가온다인'이 '가온다ㅇ'으로 읽혔고, 회사 사정도 딱 저 간판만큼 딱했다.

부부가 이십 년을 갈아 넣은 기술회사였다. 균열을 미리 잡아내는 기술 하나는 업계가 알아줬지만 믿었던 동업자한테 그 기술을 통째로 뒤통수 맞았고, 빚 갚을 날은 사흘 뒤인데 책상엔 경쟁사가 보낸 헐값에 사겠다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원작에서 부부는 오늘 저기 도장을 찍는다. 기술 뺏기고, 회사랑 같이 무너지고, 하나뿐인 딸은 바닥까지 굴러떨어진다.

참고로 그 딸이 3년 뒤 아카데미 히로인 중 하나가 된다.

뭐, 그건 천 일 뒤 얘기고.

"학생. 여기 견학하는 데 아니야."

사장이 문 앞에서 나를 돌려세우려 했다. 교복 입은 열여섯짜리가 약속도 없이 쳐들어왔으니 안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하지.

"견학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럼 뭐, 물건 팔러 왔어?"

"사러 왔는데요."

"뭘."

"이 회사요."

사장이 잠깐 나를 빤히 보더니 문을 마저 열었다. 쫓아내기엔 헛소리가 너무 구체적이었을 거다.

사무실 안쪽에선 형광등 하나가 계속 깜빡거렸고, 아무도 안 고치는 걸 보니 고칠 여유가 없는 집이었다. 에어컨은 아예 죽었는지 낡은 선풍기가 목을 좌우로 흔들며 서류 모서리만 들썩이게 하는 중이었다.

책상엔 다 식은 종이컵 믹스커피가 두 개, 그중 하나엔 립스틱 자국이 얇게 남아 있었다.

경쟁사 종이 옆에 준비해 온 걸 탁 내려놨다.

"그쪽 제안보다 세 배. 빚은 제가 따로 떠안습니다. 회사 운영은 두 분이 그대로 하시고요."

사장 손이 멈췄고, 부인이 먼저 종이를 펼쳤다가 첫 장 액수를 보고는 안경을 올려 내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이게 무슨 돈이야?"

"현금입니다. 오늘 전액 넣을 수 있고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부인이 종이를 도로 덮었다. "뭘 믿고 망해 가는 회사에 이 돈을 꽂느냐고."

좋은 질문.

그 순간, 가온다인 위로 시야가 처음으로 풀 화면을 깔았다.

━━━━━━━━━━━━

가온다인

플래그

■ 10개월 후 부도

■ 핵심 기술 헐값 매각

□ 균열 감지 표준 채택

개입 가능

YES

━━━━━━━━━━━━

시야는 딱 거기까지만 알려 준다. 저 빈칸 채우는 법은 대본 읽은 내 몫이고.

"이 기술, 3년 안에 나라에서 쓰는 기준이 됩니다."

사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말을 믿으라고?"

"안 믿으셔도 돼요. 대신 저기 도장 찍으시면 두 분 기술은 딴 회사 이름으로 그 기준이 됩니다. 두 분은 그 뉴스를 병원에서 보시게 되고요."

부인 안색이 굳었고, 사장은 뭐라 하려다가 아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지만 사실이라. 원작에서 정확히 그렇게 됐다.

"학생이 우리 집 사정을 어떻게 알아."

"저 그런 거 잘 맞힙니다."

"점집 하지 그래."

"그건 자릿수가 안 맞아서요."

"말은 잘하네."

부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갑자기 엉뚱한 걸 물었다.

"밥은 먹었어? 학생이 이 시간에 학교는 어쩌고 여기 있어."

"수업은 어차피 잘 안 나갑니다."

"그런 걸 자랑이라고."

"자랑은 아니고 사정입니다."

"사정 있는 애가 회사를 사러 다니냐."

"사정이 있어서 사러 다니는 거죠."

"여보, 애 상대로 뭐 하는 거야."

사장이 끼어들었다가 스스로 말끝을 흐렸다.

"……아니, 애가 맞긴 한가."

그래도 아까보다 어깨가 반 뼘쯤 내려가 있었다. 그 틈에 마지막 장을 펼쳤다.

"저 기술만 사러 온 거 아닙니다. 두 분이 계속 만들게 하려고 왔어요. 돈은 제가 대고, 회사 이름도 사람도 그대로 두고."

"이유가 뭐야."

"남이 이거 먹고 수천억 버는 꼴 보기 싫어서요."

착해서 살린다는 말보다 이게 훨씬 잘 먹혔다. 실제로 거짓말도 아니고.

조건은 하나 달았다.

"제 이름은 어디에도 올리지 마세요. 누가 물어도 투자자 같은 건 없는 겁니다. 가족한테도요."

"왜 그렇게까지 숨어?"

"빌런은, 얼굴 안 팔릴수록 오래 살거든요."

사장은 못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알아들었으면 그게 더 문제였고.

도장 찍히기까지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변호사가 문구를 한 줄씩 짚는 동안 부부는 같은 질문을 표현만 바꿔 세 번 더 물었고, 나는 답을 안 바꿨다.

그사이 부인이 종이컵에 커피를 새로 타 왔는데 내 앞에 놓인 건 학생용이라고 우유를 탄 거였다. 이런 집은 손님 나이 따라 커피도 바꾸나 보다. 결국 경쟁사 종이는 책상 끝으로 밀려났고, 내가 가져온 종이 위에 두 사람 도장이 나란히 찍혔다.

쉰이 다 된 부부가 열여섯짜리한테 고개를 숙였다. 은인이라고,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이 은혜 하나뿐인 딸한테도 꼭 말하겠다고.

"그것만은 말아 주세요."

"왜? 우리 애가 알면 좋아할 텐데."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낯가리는 애가 남의 회사 문을 그렇게 열어?"

"문은 안 가립니다."

정중하게 말렸다. 아주 정중히.

물론 착해서 한 짓은 아니고. 저 빈 네모의 값어치가 사들인 값의 수백 배다. 부부가 살고 그 집 딸 인생에서 비극 하나 지워진 건 계산서 옆에 딸려 온 덤이었다.

덤치고는 뭐,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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