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정하람 건이 가라앉고 며칠, 뒤통수에 새 시선이 하나 붙었다. 이번 건 종류가 아예 달랐다.강현우의 미행은 은밀했고 정하람은 계산기 두드리듯 나를 봤다면, 윤이서는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다.복도에서든 식당에서든 훈련장 출입구에서든 대놓고 봤고, 눈이 마주쳐도 피하기는커녕 봤다 어쩔래, 하는 얼굴로 되받아 왔다.배식 줄에서 마주친 날엔 내 식판에 얹힌 반찬 개수까지 세고 갈 기세였다. 그날 반찬은 세 개, 그중 하나가 콩자반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 첫 번째는 아침에 일어나는 거고.지난번에 멀어지는 등에 대고 찾아오라고 했었다. 반쯤은 허세였지만 부르든 안 부르든 올 애라는 건 알고 있었다. 3년을 하루도 안 거르고 미워한 애가 그 끈기를 어디다 두고 오겠나.그날 방과 후, 그 애가 직접 길을 막았다."잠깐 얘기 좀 해."문자도 쪽지도 없이 사람 지나다니는 복도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손엔 낡은 서류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고, 모서리가 닳고 배가 불룩한 게 사흘은 밤샌 두께였다."여기서?""아니. 사람 없는 데로."그 애가 턱으로 창밖을 가리키자 뒤따라오던 안경이 눈치도 없이 끼어들었다. 요즘 이 녀석은 나를 형이라 부르면서 반경 3미터를 못 벗어난다."형, 어디 가세요? 저 과제 초안 오늘까지—"윤이서가 고개를 돌렸다. 딱 반 초, 상대 무게중심부터 훑는 검객의 눈이었고 안경 목소리는 그 반 초 만에 말라붙었다."저, 저는 먼저 가 있을게요 형. 천천히 오세요. 아주 천천히요.""야.""네?""뛰지 마라. 계단에서 구르면 과제도 못 내.""아, 네! 조심하겠습니다!"그러고는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사라졌다. 제 목숨이 과제보다 급했겠지."친구야?""과제 하청.""뭐?""아니야. 가자."걷는 동안 그 애는 한마디도 안 했고,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은 내가 하나 골라 던졌다."밥은 먹고 다니냐.""뭐?""얼굴이 반쪽이라서.""니가 그런 걸 왜 물어.""심심해서."그 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
정하람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넌 나를 풀려는 게 아니야. 풀려는 애는 답지부터 찾지, 마주 앉진 않아. 넌."잠깐 뒀다."나랑 두고 싶은 거지. 오랜만에, 답이 안 보이는 판이 하나 생겼으니까."정하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팔꿈치를 괸 채로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한 줄 수식처럼 들여다봤다. 창밖에서 누가 공을 찼는지 둔한 소리가 한 번 났고, 그 소리가 지나간 뒤에야 그 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보통 심부름꾼은 자기가 무슨 판에 껴 있는지도 몰라. 근데 넌 내가 뭘 원하는지까지 말해.""관찰력 좋은 심부름꾼도 있는 거지."그 애가 고개를 저었다."관찰력 좋은 심부름꾼은 위험해서 안 쓰여. 오래 못 살고.""그럼 나 걱정해 주는 거야?"그 애 눈이 반짝였다."아니. 그럼 네 위에 누가 있는지, 더 궁금해진다는 뜻이야."토끼가 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 연 손을 다시 봤다. 반쯤 예상한 반응이었고 그러라고 흘린 미끼였다. 예상했다고 안 아픈 건 아니라서, 나는 국 남은 걸 마저 떠 넣었다.그 애 어깨 위로, 시야가 글줄을 갱신했다.━━━━━━━━━━━━━━[정하람 — 지적 흥분]━━━━━━━━━━━━━━그 흥분 아래에서 그 애가 나를 넣어 둔 칸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풀 문제라는 딱지가 뜯겨 나가고 그 자리가 아직 비어 있었다.열아홉이 3년짜리 판을 짠다. 그 진짜 답은 확률로도 상식으로도 아직 기각이니까, 그 애는 나를 심부름꾼과 그 이상 사이 어디쯤에 걸어 두고 흔드는 중이었다.풀 문제에서 마주 앉는 상대로. 오늘, 딱 한 칸 움직였다.정하람은 한참 나를 봤다. 판돌 어디 둘지 고르는 눈으로.그러더니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심부름꾼치고는, 본인이 너무 재밌어."심부름꾼이면 심부름만 하면 되는데, 방금 나는 읽고 되받고 되던졌다. 그 애 가설에 처음으로 실금이 갔다.뭐, 그 애는 그 실금을 똑똑한 심부름꾼으로 도로 메울 거다. 진짜 답은 아직 그 애 상식이 기각하는 중이니까. 틀린 조각 쥐고도 판은 계속 굴러
"너, 뭐야."내가 몰던 짐승이 갑자기 돌아서서 말을 걸면, 사냥꾼이 딱 이런 얼굴을 한다.곤란한 건 나였다. 이 질문에 내놓을 답이 하나도 없었으니까.국그릇을 살짝 기울여 보였다."밥. 너는 안 먹어?""……""식판까지 들고 와서 반찬만 뒤적일 거면, 그 자리 딴 애 줘도 되고.""안 줘.""그럼 앉아."정하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를 다시 스캔하는 눈.하긴. 그 애가 나흘을 파서 찾아낸 4분을 소문으로만 유명한 놈이 심드렁하게 아는 척했으니, 계산기에 값이 안 맞을 만도 하지.그 애가 식판을 테이블 끝까지 끌어와 제대로 앉았다. 도망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젓가락을 한 번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놨고,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그 4분, 니가 넣었어?"직구인 척하는 변화구였다. 니가 넣었냐를 묻는 척하면서 내가 그 4분의 의미를 아는지 낚는 거고. 되묻든 부정하든 반응하는 순간 저 머릿속 계산기에 값이 하나 찍힌다.그러니까 여기선 세 번째 얼굴을 해야지."내가 넣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국을 뜨면서 질문의 주어를 그 애 쪽으로 슬쩍 돌려놨다."넣었든 안 넣었든, 넌 이미 그게 거기 있는 걸 찾았잖아. 답 다 풀어 놓고 채점만 나한테 받으러 온 거야? 그건 좀 없어 보이는데."정하람의 눈이 잠깐 멈췄다.무례로 무례를 받아먹은 얼굴. 이런 상대는 화내도 정색해도 걸린다. 맞받아 줘야 재밌어한다는 걸 어른들 상대로 배웠다.아니나 다를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말 잘하네.""밥 먹는 것보단 잘해.""밥은 왜 못 먹는데.""국이 매워서.""그럼 물 부어.""물이 미지근해서.""까다롭네.""재벌이라서."그 애가 피식 웃더니 팔을 접어 테이블에 기댔다. 웃음기를 그대로 얹은 채로 다음 걸 던졌다."그럼 이건. 가온다인 옵션 행사 건도, 그 4분이랑 같은 손이야?"가온다인. 옵션 행사. 학생이 알 리 없는 이름과 어려운 말을, 젓가락질하듯 툭 흘렸다.미끼 안에 바늘을 숨겨서.낯선 말로 아는 표정을
폰을 들었다. 처음으로, 나를 캐는 시선을 지우는 대신 낚기로 했다.미끼는 단순할수록 좋다. 천재는 복잡한 함정은 의심하면서 딱 하나 어긋난 숫자는 못 지나친다. 그 버릇을 노렸다.홍세라한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세라 씨. 구시가 훈련 기록 올린 거 있잖아. 거기 숫자 하나만 바꿔 줘.""……또 무슨 일 꾸미세요.""주작 예비대 들어간 시각. 실제보다 정확히 4분 당겨서 올려. 잘못 적었다고 바로잡는 공지 붙여서.""4분요?"홍세라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볼펜 뚜껑 여닫는 소리가 났고, 숫자를 되짚는 기색이 그대로 넘어왔다."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의미 없어. 그게 핵심이고.""의미가 없는 게 핵심이다.""응.""틀린 숫자를 일부러 올렸다가 일부러 바로잡는다.""응.""그래 놓고 이유는 안 알려 주고.""알면 재미없잖아.""저 이제 자야 돼요.""자. 하고 자.""순서가 왜 그래요."이 4분이 뭐냐면.정하람은 지금 대피 효율을 계산하고 있을 거다. 원래 숫자로도 이미 불가능하게 빠른 값인데, 예비대 투입이 4분 당겨지면 대피 완료 시각이 이론상 최적값에 소수점까지 딱 맞아떨어진다.우연으론 억겁을 굴려도 안 나오는 숫자. 뒤에 누가 있다는 증거가 그 애 계산기에 대문짝만 하게 뜨는 거다.그리고 그 공지가 하필, 그 애가 기록을 마지막으로 열어 본 다음 날 올라온다.똑똑한 애면 읽을 거다.'누가 내 계산에 맞춰서, 지금, 숫자를 손봤다. 나를 본 놈이 있다.'굳이 4분인 것도 계산이었다. 1분이면 그냥 실수로 보이고 10분이면 대놓고 티가 난다. 딱 4분. 그 애가 설마 하면서도 결국 계산기를 두드릴 수밖에 없는 폭이다.홍세라가 낮게 웃었다."이거 혹시 그 어린 천재한테 러브레터 쓰시는 거예요?""업무야."잘라 말했는데 홍세라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웃음기만 짙어졌다."업무 치고는 너무 로맨틱한데. 4분 당긴 숫자로 나 여기 있어? 시 쓰시네.""시
"당신, 누구야?"질문은 짧았다. 근데 나한텐 내줄 답이 없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네 인생 말아먹은 놈 몸에 세 들어 사는 딴 사람이고, 이 세계가 소설인 것도, 니가 그 안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것도, 오늘 그 골목이 찢어질 걸 미리 알고 거기 서 있었던 것도 전부 안다.문장 하나 뱉을 때마다 윤이서가 한 번씩 더 무너질 거다."할 말이 없네."그래서 딱 그 말만 했다.윤이서는 나를 한참 봤다. 흙 묻은 손등을 교복 자락에 문질렀다."그래. 그것도 대답이네.""……""내가 알아낼 거야. 당신이 대답 안 해도."세검을 검집에 밀어 넣는 소리가 짧게 났고, 흙투성이 교복의 등이 곧게 멀어졌다."그래. 찾아와."안 들릴 만큼 낮게, 그 등에 대고 흘렸다.이젠 막을 생각이 없었다. 부를 거다. 숨어 산 것도 오늘까지고.그 등 위에 글줄이 새로 떴다.━━━━━━━━━━━━━━[윤이서 — 한도윤 혐오(불안정) / 진실 추적]━━━━━━━━━━━━━━3년 내내 바위처럼 안 움직이던 '혐오' 뒤에, '불안정' 세 글자가 처음 붙었다.곤란해야 정상인데, 딱 절반만 그랬다.나머지 절반은 솔직히 좀 신선했다. 여태 미워하기만 하던 애가 정면으로 알아내겠다고 선언하는 거. 이거, 나쁘지 않은데.빚쟁이가 처음으로 빚진 놈한테 관심을 보인 셈이니 빚진 쪽이 손해 볼 건 없지. 뭐, 이건 굳이 어디 적어 둘 항목은 아니라서 안 적었다.* * *점심시간의 식당은 늘 그렇듯 국 냄새랑 식판 부딪는 소리로 가득했고, 창가엔 며칠 전 비 온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옆자리 안경이 밥을 반쯤 남긴 채로 물었다. 어제부터 형이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동갑인데 뭐가 형이라는 건지. 정정은 안 했다. 따르는 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형, 그날 거기 있었잖아요. 안 무서웠어요?""잤어."안경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면서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네?""버스에서. 시끄러워서 깼고.""거짓말이죠.""진짜야.""그럼 괴물은 언제 보셨는데요."
팔을 풀고 걔를 모녀 쪽으로 밀어 놓은 다음, 어디서 집었는지도 모를 쇠막대기로 형체 머리를 두 번 내리쳤다. 그놈이 축 늘어지는 동안 등 뒤에서는 윤이서가 첫 놈을 마저 밀어내는 소리가 났다.구십 초가 끝났다. 골목 입구로 주작 방패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시민 보호! 학생들은 뒤로!"쇠막대기를 버리고, 모녀를 안전 요원한테 넘기고, 대피 인파에 슥 섞였다. 십오 초짜리 개입이었고 다들 각자 공포에 바빴으니 아무도 못 봤을 거였다.그렇게 생각했다.* * *전투는 사십 분 만에 끝났다.첫 번째 균열 앞에서 강현우는 원작의 명장면을 그대로 써냈다. 아니, 그 이상으로.밀려 나오는 형체들을 혼자 막아선 사십 분 동안 저놈이 그린 궤적에 주작 대원들조차 넋을 놨다는 후문이 돌았고, 균열이 잦아들고 전문 처리팀이 도착했을 때 저놈은 피 한 방울 안 흘린 채 검을 거뒀다.사망자 0. 중상자 0.원작에서 이 자리엔 처리팀 여섯이랑 상인들이랑 신입생 둘이 누워 있었다. 이름은 하나도 안 나왔고, 나는 그 대목을 원룸 침대에서 그냥 넘겼다.저녁 뉴스는 두 가지를 다뤘다. 아카데미 신입생 수석의 영웅적 활약, 그리고 기적적으로 정비돼 있던 구시가의 대피 체계."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인근에서 훈련 중이던 저희 예비대가—"인터뷰에 응한 주작 현장 지휘관은 준비된 문장을 정확히 읊었다. 그 뒤 얘기는 밤에 홍세라한테 전화로 들었다."대표님, 그 지휘관이 인터뷰 끝나자마자 저한테 뭐라고 물은 줄 아세요?""……""길드장님, 근데 우리가 왜 하필 거기서 훈련하고 있었습니까.""좋은 질문이네. 뭐라고 했어?""훈련 계획은 위에서 짜니까 위에 물어보라고 했죠.""세라 씨가 위잖아.""그러니까요. 저 오늘 저한테 거짓말했어요.""익숙해져."무전기 잡음이 뒤에서 한 번 크게 튀었다가 잦아들었다."안 익숙해지고 싶은데요.""수당 챙겨 줘. 그 사람들.""이미 올렸어요. 대표님보다 제가 빨라요, 그런 건.""그럼 나는 뭘 해주면...""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