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았어. 내 허리가 정말 나았다고.”“나도 마찬가지네. 훌라후프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수호 군, 의술이 참으로 대단하군. 정말 탄복하네.”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심지어 손태진마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실력은 있네요.”그때, 연상철이 손을 뻗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수호 군, 치료비는 얼마예요?”치료를 하면 치료비를 받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연 선생님 치료비는 조금 비싸요. 총 40만 원이고, 다른 분은 한 분당 20만 원이에요.”내가 제시한 비용은 딱 적당했다.그때 연상철이 말했다.“40만 원이라니. 십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힌 손목 통증을 치료했는데. 내가 다른 곳에서 치료한 것만 해도 40만 원은 족히 넘어요.”“저는 연 선생님이 저에게 인맥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나는 웃으며 내가 원하는 걸 말했다.그 대답에 연상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군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데, 말하지 않아도 손님은 소개해 줄 거예요.”“이렇게 하죠. 나는 천만 원, 나머지는 각각 5백만 원씩 낼게요.”“감사합니다, 연 선생님.”사실 이 정도도 비싼 건 아니다.다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돈을 입금했다.게다가 놀랍게도 연상철이 나와 민우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는 당연히 놓칠 수 없었다.연상철은 특별히 손태진에게 큰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했다.우리는 먹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앞으로 꼭 우리 한의관에 방문하겠다며 약속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술을 권하는 바람에 운전해야 하는 민우 대신 내가 모든 술을 받아 마셨다.다행히 정도를 아는 어르신들 덕에 나는 취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자 때는 어느덧 9시가 넘어 우리는 연상철과 작별한 뒤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기대앉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한껏 들떴다.연상철 같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연승호가 그 약물 자국이 안 지워진다고 했는데 내가 걸레로 몇 번 만에 지웠거든. 알고 보니 연승호가 직원들더러 벽을 아예 긁어내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결국 그 손해는 모두 본인이 짊어지게 됐어.”“그 자식 그때 표정이 어땠는지 너희 못 봤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현성은 말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때 민우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이거 수호 아이디어잖아. 화도 풀고 고소도 못 하게 했다니. 진짜 속 시원해!”“젠장. 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해장국 좀 끓여.”비록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나는 속이 메슥거려 참을 수 없었다.그도 그럴 게, 전에는 이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으니까.현성은 진작 나를 위해 만들었던 해장국을 그릇에 가득 담아 나에게 가져왔다.나는 그걸 한꺼번에 원샷했지만, 속이 울렁거려 결국 얼마 뒤 모두 토해냈다.다행히 토해내고 나니 속은 한결 편해졌다.“사업하는 거 쉽지 않네. 남 비위 맞춰야지, 술도 마셔야지... 그래도 성취감은 있어.”그 일을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우리는 너무 기뻐 잠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희망을 보았고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걸 했다는 성취감에 어릴 때로 돌아가 창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그 덕에 민우와 현성은 여자를 꼬시는 것도 잊었다.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지쳐서 거실에 쓰러져 잠들었다.하지만 현성은 다음 날 아침 또 일찍 깨어나 주광덕의 가게에 글을 붙였고, 민우는 7시가 넘어서 깨어나 혼자 천수당으로 출근했다.두 사람 모두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어제 술을 마셔 푹 휴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보니 문자 메시지 몇 개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했다.그중 하나는 서예지가 보낸 거였는데, 언니가 강북에 왔다면서 주소를 보내
이상한 눈빛으론 바라보는 서나연의 눈빛에 나는 온몸이 불편했다.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나연을 마주 봤다.“서나연 씨, 물 마실래요?”“나 그쪽 알아요. 그 예술가잖아요.”서나연은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며 나는 내가 그때 했던 말까지 잊어버릴 뻔했다.나는 어색하게 웃었다.“맞아요. 그걸 다 기억할 줄은 몰랐네요.”“S시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나타났어요?”“아... 전에는 S시에 영감 찾으러 간 거예요. 사실 저 강북 사람이에요.”나는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서나연은 내 옆에 앉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를 오롯이 쳐다보며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었다.“거짓말. 예술가가 아니면서!”‘어디서 티가 났지?’나는 너무 당황해서 가슴이 벌렁거렸다.만약 상대가 정상인이라면 내가 이렇게 긴장할 건 없다. 문제는 서나연은 정상인과는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그녀는 작은 자극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서가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까.그날 서나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모습을 떠올리니 나는 서나연이 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불안해 다급히 설명했다.“서나연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이 옷차림이 예술가 같지 않아요? 저 오늘 일반인 컨셉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하...”나는 웃음으로 어색함을 감췄다.서나연은 나를 꿰뚫어 볼 것처럼 계속 쳐다봤다.“예술가 아니라 의사잖아요. 몸에서 한약 냄새 나요. 내 동생도 한의사라 당신과 똑같은 냄새가 나거든요.”서나연은 이 순간만큼은 정상인 같았다.아마 서나연이 정상인이라고 하면 나도 믿었을 거다.그렇다는 건 서나연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뜻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 가끔 흥분했다 가끔 냉정했다 하니까.다시 말해서 현재는 정상과 미친 상태의 과도기에 있다는 뜻이라 아직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이게 바로 서씨 가문이 서나연을 강북에 데려오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원인이다.나는 속으로 서나연의 상태를 대략 가늠했다. 그리
“아주머니가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제가 설명할 테니...”“그래도 안 돼요.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저에게 맡겨 주셨는데. 아가씨한테 무슨 일 있으면 안 돼요.”가사 도우미는 내가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직접 달려들었다.나는 그 전에 막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어 가사 도우미는 어느새 서나연의 몸에 있던 침을 뽑아버렸다.“망했어. 이젠 망했다고!”나는 연신 울부짖었다.가사 도우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망하긴 뭐가 망해요? 지금 사람 놀리는 거죠? 아가씨 멀쩡하잖아요... 어머, 아가씨, 왜 이러세요?”서나연은 벌떡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몸이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가사 도우미는 그제야 겁을 먹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아가씨, 놀리지 마세요. 얼른 정신 차려 보세요.”나는 다급히 달려갔다.“그러니까 가만두라고 했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제 어떡해요?”가사 도우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사실 나는 일부러 가사 도우미를 겁준 거였다. 서나연의 몸이 뻣뻣하게 굳고 미라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건 사실 정상적인 반응이다.하지만 내가 이렇게 겁주지 않으면 앞으로 또 이럴 저지를 테니 따끔하게 교훈을 줘야 했다.나는 서나연을 일으켜 세워 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그러자 얼마 뒤 서나연은 정상으로 돌아왔다.짝!서나연은 정신이 들자마자 내 뺨을 후려갈겼다.나는 순식간에 멍하니 굳어버렸다.“서나연 씨, 왜 때려요?”서나연은 나를 밀쳤다.“감히 나를 찔러? 죽여버릴 거야!”서나연은 말하면서 갑자기 가위를 꺼내 들었다.나는 다급히 도망쳤다.“서나연 씨, 방금 그건 치료 과정이었어요. 지금 이게 머 하는 짓이에요? 얼른 가위 내려놔요. 죽을 수 있어요.”“안돼. 나를 질렀으니 나도 당신 찔러야 해!”나와 서나연은 티 테이블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했다.여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나는 할 수 없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서광진이 눈에 들어왔다
서광진이 기뻐하기도 잠시, 서나연은 힘 빠진 듯 쓰러졌다.“나연아, 나연아, 왜 그래?”서광진의 미소는 순간 사라지더니 딸에 대한 걱정과 관심만 남았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확인했다.“별일 아닙니다. 서나연 씨는 감정 소모가 심해 혼절한 겁니다.”“하, 다 내 탓이네. 내가 너무 섣불리 좋아했어. 이미 예전으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서나연 씨는 예전에 화끈한 성격이었나요?”나는 서나연이 온화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방금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던 거다.서광진은 딸을 눕히고 나서야 대답했다.“나연이는 예전에 엄청 활발하고 귀여웠네. 성격도 털털했고. 그런데 임천호를 만난 뒤로...”임천호를 언급하자마자 서광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임천호를 만난 뒤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네. 처음에 임천호가 잘해줄 때는 매일 기뻐했는데, 임천호의 사업이 성공하면서 우리 서씨 가문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나연에 대한 태도가 순식간에 변하더군.”“그 뒤로 그렇게 활발하던 나연이가 매일 우울해하고 웃지도 않고 지금처럼 변했네.”딸이 사람을 잘못 만났던 일을 떠올리자 서광진의 눈에는 아픔이 번졌다.명문가의 귀한 딸로 태어난 서나연은 임천호를 만나지 않고, 모든 마음을 바쳐 임천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공주가 지금은 한 맺힌 아줌마로 변해버렸다.그런 딸을 보며 슬퍼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지예 말로는 자네가 나연이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정말 방법이 있나?”서광진은 갑자기 나를 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나는 한의사라 몸은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서나연의 문제는 몸이 아닌 마음이다.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서 회장님, 서나연 씨 상태는 심리 치료예요. 약물은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어요.”“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도 우리 딸을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인가?”서광진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으며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따져 물었다.나는 흠칫 겁
“아직은 말하기 어려워요. 이따가 확인해 봐야 해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러자 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가뜩이나 일하기 어려운데, 사직서라도 제출하고 싶어지네요.”“아주머니가 사직서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나도 어디 말할 데 없어서 한탄하는 거잖아요. 있잖아요, 서 회장님 평소에 다정하고 친절해 보여도 화나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요.”그 말에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한동안 일했으니 서씨 가문에 대해 잘 알겠지?’나는 서씨 가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우선 식구들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다.“또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줄 수 있어요?”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러자 가사 도우미도 평소에 재벌가 일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꺼냈다.“서 회장님은 두 따님을 엄청 아끼는데 아내분한테는 잘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서씨 가문에서 1년 넘게 일했는데 사모님은 본 적이 없거든요. 소문에 의하면 감금당했다는 말도 있고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어요...”그 말을 들으니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나는 애써 부인하려고 했다.‘이에 설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설마 사람을 때려죽이겠어?’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너무 무섭다.“지, 지금 험담하는 거 아니죠? 서 회장님 그런 사람 아닌 것 같던데요.”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서광진이 내 목을 잡던 모습을 떠올리니 덜컥 겁이 났다.“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어느 하루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다가 여자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그것도 바닥에서 나는 소리였어요.”“그때 내가 너무 놀라 바로 방에 들어갔는데, 비명이 계속 들렸어요. 마치 누구한테 맞는 것 같았거든요.”“됐어요. 그만 말해요. 질금 일부러 저 겁주려는 거죠?”나는 다급히 가사 도우미의 말을 잘랐다.“내가 왜 겁을 줘요?”나는 어른 반문했다.“서씨 가문이 그렇게 무서우면 왜 진작 도망가지 않았어요?”“나도 도망치고
‘응? 이건 무슨 수법이지?’나는 앞에 있는 은행 카드를 보니 마음이 살짝 동요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4억은 나한테 천문학적인 숫자였을 거다.하지만 지금은 이게 내 목숨을 앗아가는 부적 같았다.“서 회장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저 이미 서지예 씨한테 최선을 다한다고 말씀드렸어요.”나는 적어도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이 카드를 받으면 마지막 살길도 막히는 셈이나 다름없다.서광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적나?”“아닙니다. 서지예 씨가 저한테 손님을 소개해 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회장님 돈까지 받겠어요.”역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서광진은 ‘하’하고 짤막한 웃음을 내뱉았다.“카드도 받게. 지예랑 한 거래는 나랑 상관없으니 따져 묻지 않겠네. 내 요구는 단 하나, 최선을 다해 나연을 치료하는 거네. 내가 나연이를 왜 이렇게 신경 쓰는지 어나?”서광진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그걸 내가 알 턱이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서광진의 눈에서 순간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임천호 그 인간 때문이네. 나연이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임천호와 맞설 수 있으니까.임천호가 지금 자리에 오른 건 내 도움 없이는 안 됐을 거네. 그런데 그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나연이와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지.”“그런 자식이 아무렇지 않게 누비고 다니는 걸 내가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난 나연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하게 하지 않을 거네.”‘또 왜 임천호와 엮였지?’‘나는 정말 임천호와 악연일까? 왜 벗어나지 못할까?’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그때 서광진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조사해 보니 임천호랑 원한이 있던데. 지난번에 S시에서 4억을 사기당했다지?”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서광진이 나를 조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서광진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걱정하지 말게. 자네한테 뭘 하려
나는 서광진한테 말했다.“우선 서나연 씨한테 약을 처방하고 돌아가서 연구할게요. 제가 상세한 치료 방안을 짜면 다시 연락드리죠.”“알겠네. 그럼 정 선생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네.”나는 겨우 눈앞의 일을 해결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다.비록 가사 도우미의 말이 조금 과장되었지만 서씨 가문 사람과 지내는 건 확실히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감이 느껴졌다.나는 왠지 이 모든 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짜여진 판이었을지도 모른다.다만 나는 현재 그 판 안에 놓인 상태라 잘 보이지 않기에 한 걸음씩 가보면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백조의 호수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침 유미 사모님과 마주쳤다.사모님은 마트를 다녀온 모양인지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다만 발목을 삔 모양인지 고통스러워하며 일어섰다.나는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괜찮아요?”“수호 씨였군요. 방금 실수로 발을 삐었어요.”나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확인했다. 사모님의 발은 근육을 다친 듯 퉁퉁 부어 있었다.나는 얼른 사모님을 부축해 일어났다.“사모님, 발이 많이 다친 듯한데, 반드시 처리해야 해요. 제가 업어 드릴게요.”사모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고 목까지 빨개졌다.“어, 어떻게 그래요? 나 대신 짐이나 들어줘요.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나는 특별히 강조했다.“안 돼요. 근육을 다쳐서 더 걸으면 부상이 심해져요.”“괜찮아요. 힘 안 써요.”사모님은 여전히 보수적이라 과도한 스킨십을 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나는 사모님 대신 짐을 들었고, 사모님은 이를 악문 채 절뚝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얼른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사모님에게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다만 사모님은 여전히 부끄러워했다.“수호 씨, 이러지 마요. 내가 직접 할게요.”나는 단호하게 시모님을 자리에 앉혔다.“사모님, 앉아서 가만히 계세요. 발목이 더 심해진 거 못 느꼈어요?”사모님도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