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조리 잘해요. 앞으로 조심하고요.”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그러자 고아연이 담담하게 웃었다.“걱정하지 마. 이런 일은 한 번뿐이야. 다시는 없을 거야.”“그럼 다행이고요.”하정현이 남아서 고아연을 돌보고, 주선영까지 있으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결국 나는 고아연이 잘 있는 걸 확인한 뒤 곧바로 집을 나왔다.그때 윤지은한테서 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혹시 이사했어?]“네? 아... 그게...”나는 이사한 사실을 윤지은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다. 때문에 내가 일부러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나는 얼른 해명했다.“형수가 원래 집을 팔고 새집을 샀는데, 그동안 형수랑 함께 지냈으니 나도 같이 이사하게 됐어요.”[그걸 나한테 왜 설명해?]윤지은의 질문에 나는 오히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에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전화는 왜 했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별건 아니고, 그냥 고맙다고.]윤지은이 가리키는 건 다름 아닌 내가 조인권을 혼내 준 일이다.나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나도 마침 발견한 거예요. 기회가 왔으니 당연히 혼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참. 병원 그만두는 건 다 끝났어요?”[아직이야. 내가 특채로 들어온 거라 날 해고하는 게 쉽지는 않거든.]“병원을 그만두면 나한테 와서 일해요.”[내가 왜?]“우리 천수당에서도 의사를 모집하거든요. 지은 씨가 오면 급여를 높게 쳐줄게요.”[싫어!]내 진심이 담긴 제안을 윤지은이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하니,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말했다.“농담이에요. 설마 진짜로 받아들인 건 아니죠?”[미친놈.]윤지은은 이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결국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윤지은과 대화할 때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 같네.’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소여정의 집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나는 꽃다발을 구매했다. 별다른 뜻은 없이 단지 꽃이 너무 예쁘고
내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조인권은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나는 신속히 조인권의 바지를 벗긴 뒤 아무도 모르게 도망쳤다.“젠장. 내가 이런 짓을 하라다니.”나는 화장실에서 도망쳐 나간 뒤 한참을 돌아 화장실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에 그 바지를 던졌다.화장실 안에 갇힌 조인권은 분명 엄청 처참한 몰골로 나를 잡아먹을 듯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다만 그 여자의 치마와 부민규의 바지도 벗겨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이렇게 한 사람의 바지만 벗기면 나머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와 대신 조인권의 바지를 찾아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조인권을 골탕 먹이기는 충분했다.모든 걸 마친 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쓰레기통에 있는 바지를 사진 찍어 윤지은에게 보냈다.[내가 복수해 줬어요. 그 자식 바지를 벗겨 쓰레기통에 버렸거든요.]윤지은은 내 뜬금없는 말에 물음표를 보냈다.결국 나는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했다.내 말을 들은 윤지은은 곧바로 엄지손가락을 추켜든 이모티콘을 보내왔다.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고아연한테로 돌아갔다.마취가 풀린 덕에 고아연은 정신이 많이 또렷해졌다.“나 좀 부축해 줘요.”“어디 가게요? 아연 씨 언니는요? 이 상태로 호텔에 묵는 건 아닌 것 같아요.”하정현이 걱정스레 물었다.“호텔에 묵을래요. 언니가 이 모습 보면 또 뭐라고 할 거예요.”고아연은 호텔에 묵을지언정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그때 내가 끼어들었다.“정 안 되면 내 월세방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호텔보다는 나을 거예요.”고아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나는 얼른 현성에게 전화해 오늘 밤에는 월세방에 가지 말라고 귀띔했다.현재 월세방에 주선영 혼자 분이라 고아연 한 명이 더 지내는 건 문제없었다.하정현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 결국 함께 가기로 했다. 나 역시 월세방에 와보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집안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주선영은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집 안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드은 순간 왠지 귀에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한참 동안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드디어 기억해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부민규였다.부민규는 내가 이 병원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 나와 함께 들어온 동료다.하지만 어찌나 경박한지, 나와 남주 누나가 영상 통화하는 걸 몰래 엿듣고 남주 누나를 노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인간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나는 비록 부민규가 얄미웠지만 서로 관련이 없는 사이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하지만, 이제 막 몇 걸음 뗀 순간, 안에서 부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인권 도련님, 저, 저는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응? 안에 부민규 외에 남자가 한 명 더 있다고?’‘헐. 너무 짜릿한 거 아니야?’‘잠깐. 인권 도련님?’‘조인권?’나는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문에 바짝 기댄 채 엿들었다.그리고 얼마 뒤, 안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나가긴 어딜 나가? 내가 너를 왜 불러왔는데? 사진 찍어달라고 불러온 거 아니야. 거기 딱 서서 나 좀 위풍당당하게 찍어.”‘젠장. 이 사람 변태 아니야?’이런 곳에서 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부민규는 아마 안에서 보기만 하고 할 수 없어 아주 답답할 거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동국의 사무실로 향했다. 역시나 사무실에는 마동국 한명뿐이었다.“마 교수님, 오랜만이에요.”나는 웃으며 마동국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동국은 여전히 쇼츠 보는 걸 즐겼다. 그것도 미녀를.한의과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하루 종일 환자가 몇 명 없었다.고개를 들어 나를 본 마동국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수호 씨 아닌야? 여긴 어쩐 일인가?”“조인권 선생님 찾으러 왔어요. 한의과에 왔다면서요?”“아. 그래. 온 지 얼마 안 돼. 그런데 또 금방 갔어. 어디 갔는지는 나도 몰라
결혼하고 애 낳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물론 있겠지만, 자기는 애 낳을 리 없다던 사람이 바로 고아연이다.고아연은 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생각한 대로 할 뿐,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때문에 감히 추측하건대, 고아연의 뱃속의 아이는 실수로 생긴 거라고 생각한다.얼마 뒤, 주치의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 나는 다급히 물었다.“의사 선생님, 환자는 어때요?”“자궁 적출 수술은 끝냈어요. 마취가 풀리면 괜찮을 거예요.”의사는 말을 마친 뒤 조용히 떠나갔다.나와 하정현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아연은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표정도 좋지 않았다.“정현 씨가 아연 씨 좀 지켜봐요. 난 잠깐 따뜻한 물 떠올게요.”내가 떠나려던 찰나, 고아연이 눈을 떴다.“정수호? 여긴 어쩐 일이야?”“내가 불렀어요.”하정현은 말하면서 침대 옆에 앉았다.“아연 씨 언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수호 씨한테 했어요.”“어때요? 몸은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고아연은 하정현한테 무척이나 잘해줬고, 하정현 역시 고아연을 매우 걱정했다.여자 혼자 이런 수술을 했는데,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으면 그게 누구라도 기분이 안 좋을 거다.고아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생각보다 괜찮아요. 적어도 아프지는 않아요.”“됐어요. 안 웃어도 돼요. 말해 봐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미소를 쥐어 짜내는 고아연의 모습을 보니 나는 기쁘기는커녕 터무니없었다.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지, 고생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다만 고아연은 현재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정말 상관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만약 전자라면 상황은 심각하다.그때 고아연이 입을 열었다.“안 웃어도 되다니? 아이는 나한테 짐일 뿐인데, 없어지면 오히려 방해도 되지 않고 얼마나 좋아. 그러니 웃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이 아이는... 젠장. 분명 그 자식이 콘돔에 손을 쓴 게 분명해.”고아연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
우연인지 사고인지는 모르겠으니 이게 우연이라면 참 신기한 일이다.유미 사모님이 매번 나를 보는 게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마침 눈이 마주칠까?하지만 유미 사모님이 의도적으로 나를 본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현재 사모님은 나를 꼴도 보기 싫어할 텐데, 매번 문 앞에서 내 쪽을 볼 리가 있나?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고개를 들어 봤더니, 유미 사모님은 어느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사모님도 떠났으니 나는 이 모든 게 우연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한 채 계속 가게 문 앞에서 몸을 움직였다.나는 태극권 체조를 했다.지나가던 어르신들은 꽤 그럴싸하게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하나둘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얼마 뒤, 나를 따라 배우러 온 어르신이 순식간에 열 명을 훌쩍 넘어버렸다.나는 순간 그 장면에 깜짝 놀랐다.“하하하, 이보게 총각. 태극권을 꽤 그럴싸하게 하는 것 같던데, 기회가 된다면 같이 운동함세.”“하하. 좋아요.”나는 상냥하게 동의했다.모처럼 어르신들의 관심을 받은 터라 나는 기꺼이 그분들을 상대했다. 무엇보다 이런 어르신들을 절대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그도 그럴 게, 이분들 모두 우리 가게의 잠재적인 고객층이니까.나는 사업에 뛰어든 뒤로 머리에 온통 고객을 유입하고 장사하는 생각뿐이다.심지어 강아지가 길을 건너도 나는 몇 번 더 보곤 한다. 요즘 사라들은 동물 사랑이 워낙 크니까.가끔 반려동물을 잘 돌봐 줘도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나는 어르신들과 한바탕 웃고 떠든 뒤, 각자 흩어져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갑자기 ‘징징’ 울려댔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더니 아주 뜻밖의 인물, 하정현이었다.나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의외네요.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했어요?”“고아연 씨한가 사고를 당했어요.”하정현의 말에 내 마음은 순간 불안해졌다....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누워 있는 고아연을 검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밖에서 기다리는 하정현은 조급한 마음
“고아연 씨는 어디서 사는데요? 수연 씨도 혹시 같이 살아요?”“아니요. 아연이가 어디서 사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집도 없으니 이 호텔 저 호텔 전전하겠죠.”“정 안 되면 큰 언니 집에서 지내라고 했는데 기어코 싫다고 해서 나는 수호 씨가 아연이 심기 건드린 줄 알았죠.”나는 다시 한번 맹세헸다.“정말 안 그랬어요. 안 본 지도 오래됐고요. 심지어 말도 안 해봤는데 어떻게 고아연 씨 심기를 거슬렀겠어요?”고수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찌 된 영문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듣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무엇보다 나는 고아연과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라, 그녀가 매일 뭐 하는지 모른다.고수연은 매일 번개처럼 나타났다 구름처럼 사라지며 아주 신비하게 굴곤 하니까.“거짓말이었다가 봐요. 만약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요!”고수연은 나를 삿대질하며 경고했다.나는 고수연의 손을 치워냈다.“그럼 수연 씨도 더 이상 나한테 이런 태도로 말하지 마요. 난 수연 씨 사장이에요.”고수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긋 웃더니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사장님,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헐. 대체 무슨 낯으로 부탁까지 해요?”나는 고수연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두 아이의 엄마면서 어쩜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지.고수연은 내 팔짱을 덥석 잡았다.“아이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래요. 진용진과 이혼한 이후로 그 인간은 한 번도 아이를 신경 쓴 적이 없거든요.”“두 아이가 매일 아버지는 왜 자기들 보러 오지 않냐고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일이 첫째 생일이라 첫째가 진용진이 오기를 무척 바라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 인간이 내 연락처를 차단해서 찾을 수가 없어요.”“나한테 그건 왜 말해요?”나는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고수연을 보며 물었다.그러자 고수연이 말했다.“내일 나랑 같이 우리 첫째 생일 축하해줘요.”내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고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먼저 거절하지 말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