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소여정이 강북에 온 게 임천호와 아이를 갖기 위해 몸조리를 하기 위해서라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사장님 일로 그동안 바삐 보내다 보니 그녀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저 지금 가게로 나갈 건데 이쪽으로 와요. 이따가 가게에서 봐 드릴게요.”내 말에 소여정은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럼 이따 봐.]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리고 약 20분 뒤, 화인당에 도착했다.얼마 뒤, 소여정과 정태곤이 화인당에 나타났다.정태곤은 여전히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을 노려봤다. 마치 눈에 칼이 들어있는 것처럼.나는 놈을 한번 보고는 더 이상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소여정이 정태곤더러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놈은 싫어하는 눈치였다.“아가씨, 임 회장님이 저더러 항상 아가씨 곁에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내 옆에 붙어 있어서 뭐 해? 내가 임 회장님한테 미안한 짓할까 봐 감시하려고?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얼마나 방탕하면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하겠어?”정태곤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그럼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밖에서 기다려.”소여정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호통쳤다.소여정 앞에서 정태곤은 순한 양이 되었다. 내가 비록 정태곤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자식을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통쾌했다.그동안 몸조리를 한 덕에 내 팔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이제 더 이상 깁스도 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소여정을 데리고 마사지룸으로 향했다.“앉아요. 이따가 봐줄게요.”말을 마친 나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소여정이 내 뒤에 서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그 때문에 갑자기 돌아선 순간 하마터면 소여정과 마주칠 뻔했다.매혹적인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왜, 왜 남의 뒤에 서 있어요?”나는 속이 벌렁거려 소여정을 흘긋거렸다. 그러다가 시선이 소여정의 얼굴에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이건 어쩔 수 없었다. 소여정이 너무 예뻤으니까. 붉은
나는 소여정한테 약점이 잡힌 기억이 없었기에 그녀의 협박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순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소여정 손에는 나와 윤지은이 용천 호텔에 함께 있던 영상이 있었다.그 영상을 본 순간 나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어떻게 이 영상이 있어요?”머리를 굴려 봤더니 백연우가 영상을 공유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백연우가 내 방에 몰래 소형 카메라를 설치했었으니까.나는 순간 백연우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몰래 남을 훔쳐본 것도 모자라 그 영상을 소여정한테 공유하기까지 했다니.‘나를 진짜 나를 죽일 작정인가?’나는 소여정의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영상 지워요.”하지만 소요정은 매우 민첩하게 몸을 피했다.“지우라고 한다고 내가 지워야 해?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절대 안 지워.”“지은 씨가 알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지은? 평소에 그렇게 불러? 둘이 그날 깊은 대화를 한 게 끝이 아닌 가 보네. 뭔가 더 있네, 더 있어.”예전에 백연우가 영상으로 협박하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윤지은과의 사이를 실토한 적이 있다.하지만 소여정의 반응을 보니 백연우가 그것까지 말한 건 아닌 듯했다.그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렇지 않으면 윤지은이 발견하는 순간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까.“다시 한번 말할게요. 지워요.”나는 더 이상 소여정을 쫓아가지 않고 명령조로 말했다.그러자 소여정은 일부러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싫은데. 내가 안 지우면 어쩔 건데?”나는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여정을 향해 달려갔다.소여정은 내가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줄 알고 얼른 제 품속에 숨겼다. 하지만 소여정이 피할 줄 알고 나는 다른 걸 노렸다. 겉으로는 핸드폰을 노리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소여정을 와락 끌어안아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소여정도 결국엔 여자였기에 힘으로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정수호,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감히 나를 안아?”소여정은 내가 핸드폰을 빼앗을까
소여정이 너무 가볍게 말해 도저히 어떤 말이 진짜고 어떤 말이 가짜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내가 죽으면 소여정 씨한테 무슨 이득이 있어요? 왜 자꾸 제가 죽기를 바라요?”소여정은 아무리 봐도 나랑 상극이 틀림없다. 소여정이 나타날 때마다 나한테 재난이 닥치는 걸 보면.전에 그나마 생겼던 호감도 이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이득은 없지. 그렇다고 나쁜 점도 없잖아?”‘그래.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얘기 안 하면 그만이야.’소여정은 이미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이대로 소여정한테 꼬투리가 잡혀 나는 앞으로 또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소여정은 내 약점을 잡고 일부러 놀려댔다.“우선 내 발부터 좀 주물러 봐.”소여정은 말하면서 하이힐을 벗어 백옥 같은 발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이 상황에 뭘 어쩌겠나? 나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나는 머리가 복잡했다.모든 게 다시 소여정한테 휘어잡혀 쩔쩔매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하지만 소여정은 정말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심지어 발마저 백옥처럼 하얗고 좋은 냄새가 났으니. 게다가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탓에 워낙 뽀얀 발이 더 예뻐 보였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여정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을 마사지했다.그때 소여정이 발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말 좀 해. 목석도 아니고. 너무 재미없잖아.”“뭘 말해요? 내가 언제 죽나 예기할까요?”나는 저도 모르게 토라진 여인처럼 불만을 토로했다.그러자 소여정이 또 발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내가 언제 수호 씨가 죽는 걸 바랐다고 그래? 내가 정말 그런 마음이었으면 그 영상을 지은이 아빠한테 보냈어.”하긴, 맞는 말이었다.하지만 소여정한테 약점을 잡혔다는 자체가 너무 짜증 났다.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됐어. 농담이야. 그 영상 누구한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감상할게.”“미쳤어요? 그렇게 보고 싶으면 인터넷에 그런 영상 널렸어요. 왜 꼭 자기 친구 걸 봐요?”나
그게 아니라면 놈이 질투하는 눈빛을 할 리가 없다.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질투가 너무 짙어 못 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나는 얼른 손을 떼려다가 그렇게 하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의사인 내가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뭘 봐요? 의사가 환자 치료하는 게 뭐 문제 있어요?”나는 정태곤을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할수록 정태곤이 경계를 풀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정태곤은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더 원망스럽게 쏘아보더니 터벅터벅 다가왔다.“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뭐야? 내가 뭐 잘못 말했나?’나는 질투에 눈먼 사람의 눈에 그 어떤 해명도 소용없다는 걸 모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더군다나 자기한테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는 내가 이런 태도로 말했으니, 정태곤이 나를 보는 눈빛은 더욱 원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태곤은 정말 소여정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소여정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데, 나는 그녀의 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정태곤의 눈은 질투로 번뜩였다. 마치 나를 당장 찢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정태곤, 뭐 하자는 거야? 정 선생이 내 병 치료하는 걸 방해하려는 거야? 내 몸조리 방해할 생각이야? 나랑 임 회장님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소여정이 제때에 나를 구해 주었다.그러자 정태곤은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표정을 풀었다.“그런 뜻 아닙니다.”“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누구 마음대로 들어오래?”소여정이 또다시 호통쳤다.그러자 정태곤은 얼른 허리를 굽신거렸다.“한참 지났는데 나오지 않으셔서 걱정되어 들어와 봤습니다.”“걱정한 거야? 시름이 안 놓인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나를 의심한 거야?”소여정은 정태곤을 빤히 바라봤다. 정태곤은 그 눈빛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
그때 소여정이 내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뭔 생각을 그렇게 넋 놓고 해?”“아무것도 아니에요.”나는 소여정한테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소여정은 제 발을 거두었다.“됐어. 이제 내 몸이나 진찰해 줘. 중요한 건 이거야. 내 몸이 호전되지 않으면 임천호는 분명 내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수호 씨도 무사하지 못 할 거야.”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다른 사람 찾으면 안 돼요? 임천호가 가뜩이나 우리 관계를 의심하는데, 왜 하필 나한테 치료받으러 온 거예요?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수호 씨랑 나 사이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 거잖아. 생각해 봐. 수호 씨가 의사고 내가 환자면 환자가 의사한테 진찰받으러 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히려 의심받았다고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지. 임천호는 분명 철저하게 조사할 거야.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후환을 막기 위해 수호 씨를 죽일지도 몰라.”“그러면 제가 오히려 소여정 씨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여정은 이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는지 농담조로 말했다.“고마워할 건 없어. 내 몸이나 잘 치료해 줘. 내가 임천호한테 약속했거든. 임천호 아이 낳아주겠다고.”“정말 임천호 아이 낳아줄 거예요? 임천호가 명분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난 명분 따위 신경 안 써. 하지만 아이라도 안 낳으면 내 상황이 위험해져.”나는 소여정이 아닌 지라 소여정의 상황 따위는 모른다.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그저 나더러 몸을 치료해달라고 하니 치료할 수밖에.한바탕 진찰을 한 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소여정 씨는 기혈이 좀 부족한 것 말고는 별 이상 없어요. 약 처방해줄게요. 약 먹으면서 몸조리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침 맞을 필요는 없는 거야? 마사지거나.”소여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실망하게 해서 어쩌죠? 침은 맞을 필요 없어요. 마사지도 할 필요 없고요.”소여정은 임천호의 여자다. 임천호
나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예가 언니 때문에 소여정을 아니꼽게 여기는 마당에 둘이 만나면 분명 소여정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지금은 내가 화인당을 관리하고 있는 마당에 소란이 일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내 책임이었다. 때문에 나는 얼른 다가가서 서지예를 막아섰다.“사모님, 소여정 씨는 병 보러 온 거예요. 그러니 절대 시비 걸면 안 돼요.”서지예는 나한테 싸늘한 눈빛을 쏘아 댔다.“사모님? 방금 날 막아선 주제에 날 사모님이라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비켜.”“싫어요.”“양동준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서지예는 눈을 부라리며 화가 난 듯 말했다.그 말에 나는 다급히 변명했다.“당연히 아니죠. 저 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생각한 거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진짜 고민 오래 했어요.”“그런데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서지예는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봤다.나는 얼른 서지예 앞으로 다가가 설명했다.“저도 다 스승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어디서 개소리야? 그 여자가 무서워서 이러는 거겠지.”“전 소여정 씨 무서워하지 않아요. 두 분이 여기서 싸우면 화인당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여기 윤지은 씨 친구 남편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윤지은 씨는 사모님이 모시는 아가씨잖아요. 만약 두 분이 싸우기라도 하면 윤지은 씨한테 어떻게 설명하려고요?”서지예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아가씨한테 설명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해.”“설명한다고 해도 윤지은 씨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지예는 여전히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래서 나더러 이대로 참으라고? 정수호, 그러고도 남자야?”서여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옆으로 밀쳐버리고 마사지룸으로 행했다.보아하니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심지어 나를 경멸하는 것 같았다.나도 이러는 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그래요. 알았어요. 잘 생각해 볼게요.”소여정은 서지예의 말을 마음에도 두지 않은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서지예는 소여정의 그런 태도에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사람이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소여정은 생긋 웃었다.“서지예 씨,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내가 왜 뻔뻔해요? 꾸짖으니 마음에 깊이 새기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건데, 대체 어쩌라는 거예요?”서지예는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쳤다.“당장 임천호 곁에서 떠나.”“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소여정이 되물었다.하지만 서지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왜 불가능한데. 네가 임천호 옆에 딱 붙어서 떠나기 싫어하는 이상 충분히 가능하잖아.”소여정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이건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임 회장님한테 빌붙어 떠나지 않으려 한 적 없어요. 임 회장님이 저를 옆에 붙잡아둔 거예요. 나처럼 연약한 여자가 임 회장님이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떠나요? 죽고 싶으면 모를까.”“내가 그쪽 언니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두 분 결혼 생활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목숨까지 내 바쳐야 해요? 난 그 정도로 위대하지 않아요.”소여정의 말은 듣기 거북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만약 소여정이 떠나기 싫은 게 아니라 떠나지 못하는 거면, 이건 소여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소여정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도덕을 지키고, 유부녀의 한 맺힌 원한을 만족시킬 정도로 위대하지 않았다.서지예는 소여정이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웠다.마음에 드는 건, 소여정의 총명함이었다. 서지예의 언니는 소여정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부족했다. 매일 울기나 하고 임천호의 환심을 사는 법을 도통 몰랐으니. 게다가 소여정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싸움에서 서지예는 완전히 패했다.“서지예 씨, 혹시 볼 일이 더 남았어요? 없으면 이만 나가주세요.”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하지만 여자들 간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한지 제대로 실감했다.서
“어렵다고?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사는 것도 어려운데.”‘설마 그 정도라고?’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적 없으니까 내 말이 실감 나지 않을 거야. 수호 씨가 왜 단단해지지 못하는 줄 알아? 그동안 생활이 너무 평탄해서 단련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야.”나는 그 말을 동의할 수 없었다.“제 생활이 평탄하다고요? 이미 충분히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하거든요?”“하하, 조금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자기 생활이 파란만장하다고 하더니. 그럼 구렁텅이에서 굴러본 사람들은 어떻겠어?”나는 왠지 소여정이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왜 내가 꼭 구렁텅이에서 굴러야 하는 건데? 난 지금 당장 강해지고 싶은데.’“제가 책임감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요. 전 아직 저를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언젠간 증명해 보일게요.”소여정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는 소여정에게 약을 처방해 주고 어떻게 약을 먹고 어떻게 몸조리해야 하는지 주의 사항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소여정은 그 말을 듣고는 계산을 한 뒤 떠나버렸다.밖에 나와 보니 서지예와 양동준은 역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윤지은은 왜 갑자기 나를 찾는지 의문이었다.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지은 씨는 저를 왜 찾는데요?”서지예는 방금 전 일 때문에 안색이 여전히 어두웠다.“사모님 일 때문에. 사모님이 아가씨 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거든. 아가씨는 사모님이 얼른 댁에 돌아가셨으면 하고.”그 말을 들으니 순간 의문이 들었다.“그게 저랑 뭔 상관인데요?”“사모님한테 약속한 거 잊었어? 윤 회장님이 먼저 굽히지 않으면 사모님은 절대 안 돌아가. 아가씨가 뱉은 말은 지키라고 전해달래. 만약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라고.”그 일이라면 당연히 잊지 않았다. 다만 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은.’내
“됐어. 이제 말해.”서윤기는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우선 이거 풀어줘. 이렇게 외진 산에서 나 혼자 도망도 못 쳐.”나는 두말없이 서윤기의 뺨을 때렸다.“적당히 해. 넌 우리 손에 잡힌 상황이야. 흥정할 자격 없어.”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사모님은 아예 서윤기의 멱살을 잡고 물었다.“말해. 말 안 하면 가만 안 둬!”“알았어. 말할게. 정호섭 일은 나랑 상관없어.”나는 또다시 서윤기의 뺨을 때렸다.“상관없다고? 내가 룸 밖에서 똑똑히 들었어. 네가 이동민 지시해서 조금희를 협박해 대신 일을 저지르게 했다고 했잖아.”“그리고 사고 직전에 조금희 계좌로 2억이 뜬금없이 입금된 거 이미 확인했어.”“나랑 이동민이 협력하는 건 사업적으로 왕래가 있기 때문이야. 조금희는 아예 몰라. 2억은 더더욱 모르고.”“정말 모르는 거야? 거짓말하는 거야? 서윤기,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날 자꾸 몰아붙이지 마!”서윤기는 공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나 정말 모른다고. 이렇게 잡혀서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나처럼 돈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죽는 걸 두려워해. 어렵게 Y시 시장을 뚫었고 떼돈 벌 기회가 생겼는데 이대로 죽기 싫다고.”서윤기의 눈빛과 도는 꾸며낸 것이 아닌 듯했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설마 서윤기가 정말 정 사장님 일과 관련이 없나?’‘아니야. 분명 관련이 있어. 내가 룸에서 들었던 게 분명한데 틀릴 리 없어.’나는 사모님과 윤지은에게 서윤기를 며칠 더 가두었다가 다시 물어보자고 건의했다.사모님은 이미 힘이 쫙 빠져 우리 부축 없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호섭 씨, 제발 진실을 빨리 알 수 있게 지켜줘.”사모님은 결국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나와 윤지은은 그런 사모님한테 더 힘내라고 위로할 수박에 없었다.“지금 서윤기가 우리 손에 있으니 도망치지 않은 이상 언젠가는 진실을 말하게 돼 있어요.”“유미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러다 화병 와.”위로의 말은 누구나 할
게다가 집에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다리도 불편하고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침침했다.노랑머리가 그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기에 우리는 곧바로 서윤기를 차에서 끌어냈다. 서윤기는 내리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지만 나는 그의 다리를 잡고 강제로 끄집어냈다.강하게 나오는 내 모습에 놀란 서윤기는 소변까지 지리고 말았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 왜 날 이런 곳에 끌고 온 건데? 여기 어디야?”“나도 몰라.”나는 솔직히 말했다.그 말에 서윤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정수호, 너 정말 미쳤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너도 정 사장님 죽이는데, 난 왜 너한테 이러면 안 돼?”내가 반박했다.그러자 서윤기가 바로 말했다.“난 아니야. 정호섭 일 나랑 상관없어. 나 억울해.”“억울한데 Y시에는 왜 나타난 건데?”“우연이야. 다 우연이야. 난 여기 약재 구입하러 왔어. 나 정말 정호섭 일 몰라...”사실 나도 지금까지 직접적인 증거를 입수하지 못한 탓에 서윤기가 진짜 범인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문제는 서윤기의 입이 너무 무거워 입을 열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나는 서윤기를 방에 끌고 가 꽁꽁 묶고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서윤기 잘 좀 감시해요. 난 약초 찾으러 나갔다 올게요.”윤지은은 의아한 듯 물었다.“무슨 약초?”“Y시에 사실 심마라는 풀이 잘 나거든요. 다른 말로 쐐기풀. 사람이 그 풀에 닿으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요.”나는 일부러 서윤기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서윤기도 한약재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쐐기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내 말에 바로 겁을 먹었다.“뭐 하는 거야? 쐐기풀로 어쩌려고 그래? 나 쐐기풀에 알레르기 있어. 이러나 나 진짜 죽어.”나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나 한의사야. 그런 말에 내가 속을 것 같아?”“정수호, 내가 돈 줄게. 아주 많이 줄게. 나 풀어줘.”서윤기는 애원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나는 서윤기의
나는 또 서윤기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랬더니 서윤기의 코에서 또 피 두 줄기가 흘려내렸다.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불법이면 어때? 난 너 죽을 거야!”“정수호. 이렇게 할 필요까지 있을까? 정호섭은 이미 죽었어. 네가 날 죽여도 정호섭은 돌아오지 않아...”서윤기는 버둥거리며 소리쳤다.하지만 우리는 아예 서윤기를 엘리베이터 안에 밀어 넣었다. 심지어 서윤기가 세게 반항해 데리고 나가기 어려울까 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그의 뒷목을 후려쳐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취한 서윤기를 부축하는 것처럼 홀을 지나 가게를 나갔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곧장 차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그때 윤지은이 물었다.“어디 가려는 거야?”“호텔은 돌아갈 수 없어요. 사람 적은 곳으로 가야 해요. 인터넷으로 이 부근에 민박집 있는지 검색해 봐요. 아예 그곳을 임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윤지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그 사이, 사모님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그런 사모님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그때 마침 장소 검색을 마친 윤지은이 말했다.“안 돼. 민박집은 너무 밀집되어 있어 발각되기 쉬워.”나는 순간 사람 한 명이 떠올라 차를 길옆에 세우고 윤지은한테 말했다.“지은 씨가 운전해요. 연락은 제가 할게요.”우리는 이내 자리를 바꾸었다.사실 내가 떠올린 사람은 노랑머리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혹시 도박해요? 솔직히 말해요. 거짓말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요. 경찰에 신고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 대신 한적하고 은밀한 곳 알아봐 주면 돼요.]그 시각 노랑머리는 불법 도박장에서 한창 놀음에 푹 빠져 있었다. 오늘 그는 운이 좋아 이미 수십만 원을 벌어 마침 그만두려던 참이었다.그때 마침 내 문자를 본 노랑머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했다.[형님, 제가 한적하고 비밀스러운 곳 하나 아는데, 그곳은 내 구역이 아니라 친구 구역이라 돈을 내야 해요.]나는 바로 답장했
사실 이동민 외 다른 사람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나는 재빨리 영감들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그도 그럴 게, 때리는 족족 쓰러졌으니까.곧바로 룸 안에서 처벌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이동민은 한나둘씩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더니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 나에게 걸어왔다.서윤기를 잡으려면 우선 이동민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나는 옆에 있던 노인을 발로 차버리고 악에 받쳐 이동민의 시선을 마주 봤다.“이 자식, 죽어!”이동민은 주먹을 쥐더니 화려한 동작 없이 바로 내 얼굴을 향해 날렸다.하지만 나는 그걸 재빨리 피한 뒤 이동민 뒤에 숨어 공격 기회를 노렸다.이동민은 속도가 느렸지만 힘이 강해 내가 손을 뻗을 때 내 손을 단번에 다리 사이로 잡았다. 그 순간 나는 팔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나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이동민의 허벅지 안쪽 살을 잡았다.남자의 약점은 그곳만이 아니다. 허벅지 안쪽 살을 꼬집는 것만으로도 똑같이 제압할 수 있다.이동민은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더니 이내 다리에 힘을 풀었다. 그사이 나는 다시 놈의 가장 나약한 곳을 덥석 잡았다.그 순간 이동민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 꿇고 말았다.옆에 잇던 서윤기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발견하고 곧장 밖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하지만 나는 의자로 이동민을 쓰러뜨린 뒤 신속히 서윤기를 잡았다.“거기 서! 서윤기. 넌 도망 못 쳐!”“정 사장님 죽음 네가 조작한 거지?”서윤기는 도망치면서 말했다.“어디서 생사람 잡아? 내가 했다면 증거를 내놔. 증거도 없이 모함하면 무고죄로 고소할 거야.”“고소는 무슨.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나는 속도를 올리며 말했다.서윤기는 내가 거의 따라붙자 곧장 엘리베이터 안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놈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사모님과 윤지은이 달려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문을 닫아버렸다.이윽고 윤지은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나와. 폭력 쓰게 하지 마.”순식간에 3대 1인 상황이 되니 더 승산 없어진 서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