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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흩어진 맹세
바람에 흩어진 맹세
Author: 아오

제1장

Author: 아오
하지만 도중에 만난 마적 떼에게 동행하던 아이들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오직 강채안만이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기어 나와 하얀 눈밭을 피로 물들이며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절망의 한복판에 소지환의 마차가 멈춰 섰다.

겨우 열여섯 소년에 불과했으나 이미 조정을 손아귀에 쥔 채 천하를 호령하는 섭정왕.

그는 숨이 끊어져 가던 어린 강채안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검은 도포가 바람에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살고 싶으냐?”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강채안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네 목숨은 내 것이다.”

그가 던져준 따뜻한 죽 한 그릇과 솜옷 한 벌, 그리고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

그것이 화근이었을까.

그날 이후 구 년 동안, 소지환은 강채안을 친히 길렀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피도 눈물도 없이 목을 베는 암위로.

하지만 강채안은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그를 향한 충심이 지독한 연모로 변질되었는지.

임무를 수행하다 치명상을 입었을 때 사흘 밤낮을 제 곁을 지키며 간호하던 그의 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글을 가르쳐주겠다며 다가와 귓가를 간지럽히던 따스한 숨결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작년 추석 연회 때 누군가의 계략으로 미약에 취해 서재 병풍 뒤로 밀어붙여 탐했던 그 황당하고도 위태로웠던 하룻밤 때문이었을까.

그 밤이 지난 후 소지환은 마치 없던 일처럼 단 한 번도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고 강채안 역시 철저히 그림자의 본분을 지켰다.

그저 며칠에 한 번씩, 소지환은 어둠을 틈타 그녀의 방을 찾을 뿐이었다.

어떤 날은 물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또 어떤 날은 굶주린 짐승처럼 거칠게 탐했다.

소지환은 결코 두 사람의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고, 강채안 또한 감히 명분을 바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냉혹하고 무정한 섭정왕이었으니까.

누구에게도 명분을 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내였기에 강채안은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 아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느 날, 소지환이 한 소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왕부로 돌아왔다.

회랑 아래에 서서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강채안은 온몸의 피가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강서하.

그 모진 굶주림 속에서 진작 구더기 밥이 되어 죽은 줄 알았던, 제 친동생이었다.

알고 보니 당시 강채안이 제 몸을 팔아 남긴 은자 다섯 냥으로 강서하는 반년을 버텼고 이후 부유한 거상에게 거두어져 귀하게 자랐다고 했다. 그러다 얼마 전 거상의 일가가 마적에게 몰살당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서하를 소지환이 구해낸 것이었다.

“언니... 내가, 내가 언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어느새 아리따운 처녀로 자란 동생이 품에 안겨 아이처럼 서럽게 울 때만 해도, 강채안은 하늘이 마침내 자신을 굽어살피신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소지환이 강서하를 바라보는 눈빛은 결코 평범한 아랫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서하에게 피비린내 나는 살인술을 가르치는 대신 이름난 학자들을 모셔와 거문고와 서화를 가르쳤다. 강서하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말 한마디에 그녀의 처소에 밤낮으로 화려한 등불을 밝혀 주었고, 배꽃을 보고 싶다는 철없는 투정에 머나먼 남강에서 수십 그루의 배나무를 통째로 마당에 심어 주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김도학이 강서하에게 치명적인 맹독을 먹인 것이다. 그리고 소지환을 향해 잔인한 조건을 내걸었다.

“해독제를 원한다면 기꺼이 줄 수 있다. 하지만, 소지환. 네가 가장 아끼는 최고의 사냥개 강채안을 나한테 보내거라. 한 달 동안 내 노리개로 마음껏 부릴 터이니.”

김도학이 어떤 자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환관의 최고 우두머리, 막강한 권력으로 조정을 뒤흔드는 태감이자 온갖 기괴하고 변태적인 고문으로 사람을 찢어발기는 악마. 그의 처소에서 실려 나가는 시신 중 사지가 온전한 것은 단 한 구도 없었다.

강채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지환을 바라보았다.

그 냉정한 입술로 안 된다고 한마디 하길 간절히 바랐다.

“한 달이다. 한 달 뒤에 내 너를 데리러 가마.”

하지만 그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잔인한 선고뿐이었다.

그 후의 한 달은 강채안의 삶에서 가장 처참하고 어두운 지옥이었다.

김도학은 강채안의 비명 섞인 절규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바늘로 그녀의 손목 힘줄을 끊었다가, 어의를 시켜 다시 꿰매기를 반복했다. 사흘 밤낮을 얼음 창고에 매달아 두고 숨이 넘어가는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가장 끔찍했던 날은, 달콤한 꿀을 그녀의 두 손에 잔뜩 바른 뒤 독개미가 들끓는 항아리 속에 처넣었을 때였다.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가 살점을 뜯어내고 뼈를 갉아 먹는 고통에 강채안은 어금니가 전부 바스러질 때까지 비명을 삼켰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두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열 손가락은 허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핏떡이 된 살점 위에는 여전히 굶주린 독개미 몇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왕부로 인계되기 전날 밤, 김도학은 강채안의 짓뭉개진 턱을 거칠게 쥐어틀며 비웃었다.

“소지환이 고작 계집 하나 살리겠다고 제 제일가는 사냥개를 내던지다니. 말해 보아라. 그놈이 그 어린 계집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냐?”

강채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지난 구 년 동안 소지환을 향해 붉게 타 올랐던 가슴속 연모의 불꽃이 그 지옥 같은 한 달 동안 단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차디차게 꺼져 버렸음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그녀는 영혼까지 종속된 사계(死契)를 맺은 몸.

소지환의 칼이 되겠노라 맹세했으니 생과 사는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그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왕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부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강서하가 시녀들을 거느린 채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화사한 하늘색 비단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지독하게도 아름다웠다.

“언니, 고생 많았어.”

강서하가 생긋 웃었다.

아주 달콤한 미소였다.

“내 해독제 때문에 그 더러운 김도학 밑에서 오랫동안 구르고 왔으니, 몸이 엄청 더러워졌겠지?”

짝짝.

그녀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우리 언니 몸 좀 깨끗하게 씻겨드려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 서 있던 시녀가 펄펄 끓는 뜨거운 물 한 대야를 강채안의 몸 위로 그대로 퍼부었다.

촤아아악!

살이 익어 가는 비린내와 함께 순식간에 강채안의 살점이 붉은 핏빛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선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프냐고?

당연히 아팠다.

하지만 김도학이 손톱 밑으로 은바늘을 찔러 넣고 살을 파내던 고통에 비하면 이딴 화상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서하는 온몸이 짓무르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채안의 모습에 흥미가 식은 듯 입술을 삐죽였다.

“깨끗해졌네. 이만 들어가 봐.”

강채안은 불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제 처소로 돌아왔다. 엉망이 된 옷가지들을 간신히 벗겨 내고 상처에 약을 바르려던 찰나, 방문이 부서질듯 거칠게 열렸다.

소지환이었다.

역광을 등지고 선 그의 거대한 체구가 방 안 가득 숨 막히는 압박감을 드리웠다. 마음이 완전히 난도질당해 죽어 버렸음에도 구 년을 길들여진 본능은 비참하게도 여전히 이 사내를 향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돌아왔느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상처를 확인해야겠다.”

강채안은 거역하지 않고 묵묵히 몸을 돌려 흉측하게 난도질당한 등판을 드러냈다. 소지환의 손가락이 채찍 자국 위를 쓸어내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김도학이 부리는 채찍에 맞은 자국이옵니다.”

강채안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담담했다.

소지환의 시선이 넓게 지져진 인장 자국으로 향했다.

“이것은?”

“달궈진 인두이옵니다.”

그녀가 상처를 덤덤히 읊조릴 때마다 소지환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방금 전 입은, 진물이 흐르는 화상 자국에 머물렀다.

“... 이건 또 어찌 된 일이냐?”

강채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하가 시녀들을 시켜 끓는 물을 부었습니다. 제가 더럽다면서 말이지요.”

순식간에 소지환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서하가 제게 끓는 물을 부으라 명하였습니다.”

강채안은 담담하게 진실을 고했다.

그 순간, 소지환의 안색이 겉잡을 수 없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서하는 누구보다 유순하고 선량한 아이다! 네가 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제 불찰이라며 온종일 방구석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아이란 말이다! 그런 아이가 감히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강채안. 언제부터 이리 가당치 않은 거짓말을 부리게 된 거지?”

강채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인은...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변명을 하는 것이냐!”

소지환이 거칠게 그녀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여봐라! 이 년을 끌고 가 당장 곤장 스무 대를 쳐라!”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감히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형틀에 엎드려진 강채안의 등 위로 묵직한 채찍이 내려앉았다.

철썩!

첫 매질이 등판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물지 않은 살점이 처참하게 찢겨 나가며 선혈이 분수처럼 터졌다. 소지환은 마루에 서서 그 모습을 그저 차갑게 방관할 뿐이었다.

“오늘 매질은 작은 경고일 뿐이다. 향후 또다시 서하를 모함하거나 해하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자도 필시 이리될 것이다.”

두 대, 세 대...

거듭되는 매질에 입술이 형편없이 터져 나갔다.

검붉은 피가 턱 끝으로 흘러내려도, 강채안은 비명 대신 신음을 삼키며 버텼다.

문득, 열 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피비린내에 구역질을 하던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다정하게 귓가에 속삭여주던 소년이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내가 네 뒤에 있지 않느냐.”

그랬던 그가, 이제는 죽음보다 더한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스무 대의 매질이 끝났을 때, 강채안의 하반신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떡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제 가슴을 도려낸 사내의 차가운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기 위해.

그 순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검붉은 선혈이 울컥하며 터져 나왔다.

멀어져 가는 의식의 저편에서 전전긍긍하는 태의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왕, 왕야... 채안 낭자의 맥이... 맥이 끊어지기 직전입니다... 아무래도 목숨을 부지할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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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도성 안팎에 난데없이 역병이 다시 창궐하자, 서운조는 서둘러 행장을 꾸려 하산할 채비를 서둘렀다.“이번에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강채안이 약초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서운조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리합시다.”저잣거리 어귀에 임시 의원 자리를 펼쳐 놓자마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운조가 온화한 얼굴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맥을 짚는 동안, 강채안은 그 곁에서 익숙한 손길로 약재를 빻고 나누어 담았다. 때로는 말 없이 침을 건네며 그와 소리 없는 호흡을 맞추었다. 이렇듯 분주하면서도 평온한 나날이 그녀는 참으로 좋았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준비해 온 약재가 바닥을 드러냈다. 강채안은 잠시 머물고 있는 거처로 발길을 돌렸다.푸른 박석이 깔린 길을 따라 혼자 걷던 중이었다. 마을 어귀의 개울가를 막 지나치려던 순간, 정적을 갈라놓는 비명이 사방을 찢었다.“아이고, 내 새끼! 우리 아이가 물에 빠졌소!”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거센 물살이 야속하게도 아이를 깊은 물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강가에 모여든 어른들은 혼비백산하여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암위로 살아온 세월이 뼛속 깊이 새긴 본능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지. 강채안의 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돌난간을 가볍게 박차고 도약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얼음장 같은 강물이 옷자락을 무겁게 끌어당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빠르게 헤엄쳐 아이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숨을 몰아쉬며 강가로 돌아왔다.물을 잔뜩 들이켜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어미의 품에 안겨주었을 때, 강채안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얇은 면사마저 비틀어져 뺨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매무새를 고치려 고개를 숙이는

  • 바람에 흩어진 맹세   제17장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서운조의 정성 어린 손길이 날마다 이어지자 강채안의 몸에 새겨졌던 크고 작은 상처들도 조금씩 빛을 잃어갔고, 안색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수도 늘었다. 약재를 늘어놓은 선반 주변을 어지럽히는 참새들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했고, 서운조가 약을 달이다 실패하여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채 멋쩍게 서 있을 때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서운조 역시 약초를 구하러 산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작은 것들을 챙겨왔다. 어떤 날은 계피향이 은은한 계피사탕 한 봉지였고, 어떤 날은 저잣거리에서 갓 들여온 이야기책 몇 권이었으며, 또 어떤 날은 투박하지만 들꽃 같은 정취가 배어있는 나무 비녀이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면 강채안은 마당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책장을 넘겼다. 선비와 규수의 사랑 이야기, 협객들의 무용담.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만큼 해가 기울어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서운조가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탈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눈매가 영민해 보이는 백여우 탈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청란(青鸞) 탈이었다.“오늘 밤 산 아래 마을에서 연등회가 열린다오.”서운조는 백여우 탈을 그녀의 눈앞에 내밀며 다정하게 웃었다.“강물 위로 등불이 흘러가 장관을 이룬다 하니, 제법 떠들썩할 것이오. 함께 가시겠소?”강채안은 순간 굳어버렸다.연등회. 그 단어가 귓속에서 잠깐 맴돌았다. 마치 오래전에 잊어버린 언어처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어둠과 얼음처럼 차가운 명령들뿐이었다. 사람이 넘쳐흐르는 축제란 지난날의 그녀에게 언제나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다. 방심하면 죽는 곳,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곳. 몸 안 깊숙이 새겨진 경계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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