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심성빈은 곧 메뉴판을 받아 몇 가지 음식을 더 추가했다.웨이터가 나가자 룸 안은 이내 고요해졌다.이든이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눈가에 씁쓸한 회한과 감탄이 가득했다.“몇 년 만에 이 도시에서 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그때도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 보는 사람마다 죄다 네가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거야. 알고 보니 진작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네.”“그때 네 품에 안겨 있던 그 여자애가 지금은 여친이 되었다니!”심성빈이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한 모금 마신 뒤 시선을 올리고 이든을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든, 나 한번 도와주라.”이든은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금세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말해봐.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줄게.”“앞으로 내 여자친구 앞에서 북성 이야기는 언급하지 말아줬으면 해. 과거 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거든.”이든은 그 말을 듣고 몇 초간 침묵하다가 곧장 숨겨진 사정을 알아차렸다.그날 밤, 심성빈은 중상을 입은 송하나를 안고 큰 병원이 아닌, 하필이면 자신의 동물 병원으로 왔었다.그 배후에는 입을 열기 어려운, 남들에게 알려지기 곤란한 사정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어제 자신이 무심코 털어놓았던 옛일을 떠올리며 이든은 죄책감에 가득 차 곧바로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 성빈아. 내가 경솔했어.”“옛이야기에 잠시 감상에 젖어 신중하지 못했어. 내 잘못이야. 걱정 마! 앞으로는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을게.”“너도 의도치 않게 한 말이잖아. 괜찮아.”심성빈은 담담한 표정으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이번에 온 김에 얼마나 있을 거야? 모처럼 만났는데 내가 여기저기 구경시켜줄게. 이 지역 사람으로서 대접 좀 해야지.”“아니, 괜찮아.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이든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이번엔 그냥 옛 친구들 얼굴이나 볼 겸 들른 거야. 오후 비행기로 또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해. 이렇게 우연히라도 널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 이번 일정에서 가장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성빈은 고개를 숙여 송하나의 눈가를 지그시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하나야, 내가 옆에 있어 줄까?”그는 정말 불안했다.조금 전 그녀의 눈에 스쳤던 공포를 똑똑히 보았기에 한밤중에 다시 악몽에 놀라 깰까 봐 걱정스러웠다.이에 송하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종일 힘들었을 텐데 푹 쉬어요.”심성빈은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받쳐 베개에 눕히고는 이불을 꼼꼼하게 여며 주었다.“나 바로 옆방에 있어. 밤에 또 악몽 꾸거나 어디 불편한 데 있거든 수시로 불러. 다 들리니까.”심성빈의 다정한 위로가 송하나의 마음에 스며들어 남아있던 불안감을 완전히 씻어냈다.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대답했다.“네, 그럴게요.”심성빈은 그녀를 몇 초간 깊이 응시하며 마음이 평온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제 방으로 돌아온 뒤, 베란다에 서서 비서에게 전화를 걸고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북성 쪽, 옛날에 하나와 관련된 기록들, 찾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찾아서 깨끗하게 처리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마.”송하나는 매우 똑똑하다.오늘 심성빈의 설명이 너무 두루뭉술하다 보니 그녀가 완전히 믿지 못할까 봐 걱정됐다.혹시라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옛날 기사를 찾아볼까 봐 두려웠다.그 옛일들이 지금 그녀의 안정된 삶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전화를 끊은 심성빈은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이든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통화는 금세 연결되었다.수화기 너머로 이든의 시원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성빈? 진짜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어제 데이비드랑 너 얘기 했는데 마침 네 여자친구 만난 거 있지. 너무 신기하더라고. 네 여자친구가 그러던데 성빈이 너 요즘 화인국으로 돌아갔다며?”심성빈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오늘 밤에 막 들어왔어. 내일 점심시간 괜찮아? 내가 식당 예약할게,
심성빈은 손을 들어 송하나의 이마에 젖어 붙은 잔머리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여전히 창백한 얼굴과 눈물에 젖은 두 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하나야, 어디 아파? 아니면... 낮에 무슨 일 있었어?”심성빈은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송하나가 막 기억을 잃었을 무렵에는 악몽을 자주 꿨다.하지만 이 작은 도시로 옮겨 와 생활이 차츰 안정된 뒤로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악몽에 시달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또 이렇게 끔찍한 꿈을 꾼 걸까?송하나는 심성빈의 따뜻한 품에 기대어 마음을 완전히 진정시켰다.잠시 망설였지만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오후에 개인 병원에 흉터 연고를 가지러 갔었어요. 거기서 성빈 씨의 옛 친구를 만났는데, 이름이 이든이라고 하더라고요.”‘이든?’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송하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심성빈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당혹감이 빠르게 스쳐 갔다.‘설마 이든을 만난 것 때문에 하나가 악몽을 꾼 걸까?’“그래서?”심성빈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물었다.“그 녀석이 뭐라고 했어?”“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많이 이야기해 줬어요.”“2, 3년 전에 제가 북성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대요. 누가 저를 쫓고 있었던 것 같다고도 했고요. 그날 밤 성빈 씨가 크게 다쳐 의식을 잃은 저를 안고 이든 씨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으로 뛰어와 살려 달라고 했대요.”송하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심성빈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에 맺힌 의문을 털어놓았다.“성빈 씨, 그런데 전 왜 그 일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을까요?”“그때 제가 왜 갑자기 북성에 있었던 거예요? 저를 뒤쫓던 사람들은 누구였죠?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그 질문을 듣는 순간 심성빈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었다.심성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송하나가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심성빈은 긴 여정을 마치고 별장으로 돌아왔다.검은 승용차가 멈춰 서자마자 그는 문을 열고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향했다.가정부는 그를 보자 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심성빈은 벗은 외투를 가정부에게 건네며 자기도 모르게 텅 빈 거실을 둘러봤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 속에는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하나는요?”“하나 씨는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벌써 주무세요.”심성빈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아직 여덟 시도 안 됐다.“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자는 거죠?”가정부가 서둘러 설명했다.“하나 씨는 오늘 돌아오셨을 때부터 안색이 안 좋으셨어요. 생리할 때가 돼서 배가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저녁도 거의 못 드셨어요. 그저 몇 숟갈만 드신 뒤 방으로 올라가셨어요.”그 말을 듣자 심성빈은 가슴이 철렁했다.그는 더 묻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송하나의 침실 앞에 도착한 심성빈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심성빈은 더 망설이지 않고 문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문을 열었다.방 안에는 침대맡에 놓인 작은 노란빛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은은하고 따뜻한 조명이 방 안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송하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편안하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숨을 가쁘고 불규칙하게 몰아쉬고 있었고, 가슴을 작게 들썩이는 모습을 보아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심성빈은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열이 나는지 확인하려고 송하나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그 순간, 송하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내뱉었다.심성빈이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끊어지는 듯한 말소리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안 돼, 오지 마.”송하나는 차갑고 어두운 악몽에 붙잡혀 있었다.꿈속의 그 사람은 송하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놓고 칼을 든 채 조금씩 다가왔다.그 공포는 직접
“그날 밤 성빈은 병상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어요.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송하나 씨를 지켰죠.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당시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뇌 안쪽도 다쳤어요. 깨어난 뒤 기억을 잃었으니 지금 생각이 안 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남자는 지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하지만 송하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북성? 교통사고라니? 누군가 나를 쫓아왔다고? 왜 난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송하나가 알고 있는 건 물에 빠진 뒤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는 사실뿐이었다.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그때 난 왜 북성에 갔을까? 누가 몰래 뒤를 쫓고 있었던 걸까? 그 교통사고는 나를 쫓던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머릿속 깊은 곳에서 기억의 파편 같은 것들이 떠오를 듯했지만 너무나 흐릿해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남자는 송하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자신의 말 때문에 몸이 안 좋아졌을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죄송합니다. 제 이야기가 불편하셨나요?”“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인연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이든이라고 해요. 심성빈의 친구예요. 두 분이 잘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네요.”“참, 이 나라에는 언제 오셨어요? 성빈도 같이 안 왔나요?”송하나는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낮게 대답했다.“작년에 왔어요. 성빈 씨도 줄곧 저랑 여기 있었는데, 최근에 일 때문에 잠깐 귀국했어요.”이든이 아쉽다는 듯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아, 그거 아쉽네요. 있었다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나 나눌 수 있었을 텐데요.”“돌아오면 전해 줄게요.”송하나는 간단히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그녀는 흉터 연고를 챙겨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고 머
다음 날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심성빈은 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차갑던 눈빛에는 어느새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만 가득했다.송하나를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져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 앞에 나타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같은 시각, 이국의 작은 도시에는 어느덧 오후가 찾아와 있었다.송하나는 개인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송하나 씨, 흉터 연고가 다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편하실 때 언제든 오셔서 찾아가시면 됩니다.”전화를 끊은 송하나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혼자 차를 몰아 그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은 지난번과 달리 유난히 조용했다. 공기에는 은은한 약 냄새가 감돌았다.지난번 진료를 봐주었던 젊은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접수대에서 간호사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송하나는 다가가 가볍게 물었다.“오늘은 데이비드 선생님이 안 계시네요?”간호사는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데이비드 선생님은 먼 곳에서 오는 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가셨어요. 오늘은 진료가 없습니다.”그는 카운터에서 미리 포장해 둔 연고를 꺼내 송하나에게 건넸다.“송하나 님, 주문하신 흉터 연고입니다. 확인해 주세요.”이어 간호사는 명함 한 장도 내밀었다.“여기에 병원 연락처가 적혀 있습니다. 나중에 연고가 대량으로 필요하시면 미리 전화로 예약해 주세요.”“감사합니다.”송하나는 연고와 명함을 받아 들고 가볍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바로 그때, 병원의 유리문이 바깥쪽에서 열렸다.키가 큰 남자 두 명이 나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한 명은 데이비드였다.그 옆에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외국인 남자가 서 있었다.단정하고 점잖은 인상의 남자였다. 간호사가 말한, 데이비드가 공항까지 마중 나갔던 친구인 듯했다.송하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옆으로 비켜 지나가려 했다.그런데 데이비드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송하나의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