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동생 대신 보스의 신부가 되었다

도망친 동생 대신 보스의 신부가 되었다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05
Por:  YuImActualizado ah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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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쌍둥이 동생 대신 재벌가의 신부가 된 한서율. 며칠이면 끝날 거라 믿었던 대역은 차태혁의 의심과 집착 속에서 점점 진짜가 되어 간다. 빼앗긴 이름과 삶을 되찾으려는 그녀 앞에 사랑과 욕망, 가족의 비밀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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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제1화. 동생 대신 신부가 되다

“서우 대신 네가 들어가.”

서율은 붓을 든 채 아버지를 보았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온 한진규는 아직도 낮의 예식에서 입었던 정장 차림이었다. 가슴에 달렸던 꽃만 없어져 있었다.

“어디를요?”

“차태혁 방.”

붓끝에서 먹이 떨어졌다. 서율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고서 가장자리에 검은 얼룩이 먼저 번졌다. 사흘 동안 붙여 놓은 종이가 젖어 들었다.

“서우가 도망갔다. 그놈이랑.”

오늘 결혼한 신부가, 오늘 밤 다른 남자와 달아났다는 뜻이었다.

서율은 붓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먹을 닦았다. 손수건을 두 번 접은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식까지 올렸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가야 한다는 거야. 신랑은 급한 일 때문에 먼저 나갔고, 서우는 피곤해서 친정에서 쉬고 있다고 둘러댔다. 밤에는 데려다 놓겠다고 했어.”

책상 위로 휴대전화가 내던져졌다. 한서우가 남긴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빠, 나 못 해. 그 사람 눈 보고 어떻게 살아. 며칠만 나 찾지 마.]

그 아래로 한진규가 보낸 욕설과 부재중 통화 기록이 이어졌다. 서율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없었다.

“찾아오세요. 아직 멀리 못 갔을 거 아니에요.”

“인천항으로 빠졌어. 패물까지 싹 챙겨서.”

“그럼 차태혁 씨한테 설명해야죠.”

“내가 지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한테 딸을 보냈겠냐?”

한진규가 책상을 내리쳤다. 물그릇이 흔들렸고, 서율은 종이에 닿기 전에 그릇을 옮겼다. 아버지는 그 손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깟 종이가 눈에 들어와?”

“남의 물건이에요. 내일 돌려줘야 하고요.”

“내일 우리 회사가 없어질 판이라고!”

한양유통이 부도 직전이라는 건 서율도 알았다. 며칠째 정문 앞에 낯선 차들이 서 있었고, 주방에서는 물품 대금을 언제 주느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진규는 같은 이름을 찾았다.

태영캐피탈의 차태혁.

돈을 빌려주는 조건보다 돌려받는 방식으로 더 유명한 남자였다. 한진규는 그에게 회사 지분과 딸의 혼사를 함께 내밀었다. 그 딸은 늘 그렇듯 서우였다. 서율에게는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말만 전해졌다.

“오늘 밤만 넘겨. 서우 돌아올 때까지 사나흘이면 돼.”

“오늘 밤만이라면서 왜 사나흘이에요?”

“말꼬리 잡지 마.”

“그다음에도 안 돌아오면요?”

한진규가 입을 다물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서율은 그 표정을 잘 알았다. 서우가 망가뜨린 도자기를 붙일 때도, 서우 이름으로 작품을 낼 때도 아버지는 늘 저렇게 굴었다.

잘되면 서우가 한 일이고, 잘못되면 서율이 책임질 일이었다.

“싫어요.”

목소리가 작아 다시 말했다.

“못 해요. 저는 그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몰라요.”

뺨이 먼저 돌아갔다.

서율은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입술 안쪽이 이빨에 찍혔는지 피 맛이 났다. 마루에 떨어진 붓이 발밑까지 굴러왔다.

“먹여 살린 값을 이렇게 갚아?”

서율은 손등으로 입가를 눌렀다. 오늘 오전에도 복원 대금이 본채 계좌로 들어갔다. 그 돈이 자신의 식비보다 적은지, 많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문밖에 선 경호원 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얼굴 똑같지, 목소리도 닮았지. 불만 어둡게 해놓으면 알아볼 수가 없어.”

“서우랑 같은 엄마한테서 태어난 건 필요할 때만 기억나세요?”

“뭐?”

“밖에서는 딸 하나라고 하셨잖아요.”

쌍둥이 가운데 공식 가족으로 소개된 건 서우뿐이었다. 서우가 본채에서 친척들의 인사를 받는 동안 서율은 어머니와 별채에 살았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이면 서율은 서재 문을 닫았다.

한진규의 손이 다시 올라왔다. 서율은 이번엔 얼굴을 피하지 않고 아버지를 보았다. 잠시 허공에 머물던 손이 내려갔다.

“네 어미 자리, 계속 지켜주길 바라면 말 잘 들어.”

서율의 손이 멈췄다.

한진규는 그걸 보자 목소리를 낮췄다.

“납골당 계약도 내 이름이야. 네가 거기 혼자 찾아가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니 사진 앞에 두고 온 작은 꽃병이 떠올랐다. 다음 주에는 새 꽃으로 갈아드리려 했다. 아버지는 그곳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면서 위치와 계약 명의만은 잊지 않았다.

서율은 터진 입술을 눌렀던 손을 내렸다.

“어머니한테는 손대지 마세요.”

“그러니까 네가 잘하면 돼.”

한진규가 문밖으로 손짓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커다란 옷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서율이 대답하기 전부터 준비돼 있던 것들이었다.

붉은 슬립, 실크 가운, 구두. 목에 뿌릴 장미 향수까지.

서율은 옷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막았다.

“제가 입을게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율이 옷을 받아 쥐자 그제야 한진규가 등을 돌렸다.

“늦지 마라.”

문이 닫힌 뒤 서율은 거울 앞에 앉았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터진 입술을 보고 잠깐 손을 멈췄다.

“여긴 덧바르면 따가우실 텐데요.”

“괜찮아요. 피만 안 보이게 해주세요.”

목 뒤의 붉은 점 위로 컨실러가 덧발라졌다. 어머니는 어릴 적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그 점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옷이 같고 머리 모양이 같아도 엄마는 너를 찾는다고 했었다.

서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울 속 여자는 한서우처럼 보였다. 입술에 바른 색이 너무 진했고, 가운 끈을 움켜쥔 손만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가방은 이걸로 드릴까요?”

서우의 작은 검은 가방이 내밀어졌다. 서율은 안을 열어보았다. 화장품과 휴대전화, 지갑이 들어 있었다.

“본채 화장대에 두고 가신 물건들이에요. 회장님이 그대로 가져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서우는 새 전화까지 준비해서 나간 모양이었다. 서율은 낡은 천 파우치를 그 틈에 밀어 넣었다. 보존지로 감싼 붓과 손수건, 어머니의 향낭이 들어 있었다. 가방 지퍼가 간신히 잠겼다.

마지막으로 책상으로 돌아가 고서를 덮었다. 먹이 번진 가장자리에 흡수지를 대고, 아직 마르지 않은 보수 부위는 눌리지 않게 받쳤다. 내일 돌아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함부로 책을 접지 않도록 메모를 남겼다.

[건조 중. 손대지 말 것.]

이름을 적으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서율은 펜을 내려놓았다.

***

밤 11시 40분, 한남동.

전용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한진규의 전화가 두 번 울렸다. 아버지는 받을 때마다 서율을 등지고 목소리를 바꿨다.

“예, 거의 다 왔습니다. 애가 긴장이 좀 돼서요.”

긴장.

서율은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뺨이 유난히 붉었다. 화장이 아니라 손자국이었다.

최상층에 도착하자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도윤입니다. 대표님 비서입니다.”

강 비서는 한진규보다 서율을 먼저 보았다. 정확히는 서율이 가운 위에 걸친 코트와, 발끝을 잘못 디딜 때마다 구부러지는 무릎을 보았다.

“구두가 불편하시면 실내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한진규가 대신 답했다. 강 비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안쪽에 준비돼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서율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턱으로 침실 쪽을 가리켰다.

“먼저 들어가 있어.”

“회장님은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강 비서의 말에 한진규가 웃음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애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복도 끝에 이르자 한진규가 서율의 팔을 당겼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넌 한서우야.”

서율은 팔을 잡힌 자리를 내려다보다 아버지 손을 떼어냈다.

“제가 들키면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실 거죠?”

“지금 농담할 때야?”

“알아두려고요.”

서율이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더 서 있으면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침실은 어두웠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침대 끝만 희미하게 비췄다. 서율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소파 옆에 섰다. 가방 속 휴대전화가 한 번 진동했지만 꺼내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구두 소리가 들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였고, 손에는 전화가 들려 있었다.

“원금이 아니라 빠져나간 돈부터 찾아. 그 사람 식구한테 전화하지 말고.”

통화를 끝낸 남자가 서율을 보았다.

서율은 사진에서 본 얼굴을 알아봤다. 그런데 눈높이가 생각보다 훨씬 위였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문을 닫은 뒤였다.

“한서우.”

서율은 가방 끈을 놓지 못했다.

“네.”

차태혁이 벽의 조명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방에서 숨을 곳을 찾듯 고개를 돌리자 그가 멈춰 섰다.

시선이 서율의 입술에 닿았다.

“고개 좀 들어봐.”

서율은 억지로 턱을 들었다. 차태혁이 가까이 와 손을 뻗었다. 몸을 움츠리자 손이 뺨 앞에서 멈췄다.

남자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피로한 기색이 사라졌다.

“내 신부 얼굴에 손댄 게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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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동생 대신 신부가 되다
“서우 대신 네가 들어가.”서율은 붓을 든 채 아버지를 보았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온 한진규는 아직도 낮의 예식에서 입었던 정장 차림이었다. 가슴에 달렸던 꽃만 없어져 있었다.“어디를요?”“차태혁 방.”붓끝에서 먹이 떨어졌다. 서율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고서 가장자리에 검은 얼룩이 먼저 번졌다. 사흘 동안 붙여 놓은 종이가 젖어 들었다.“서우가 도망갔다. 그놈이랑.”오늘 결혼한 신부가, 오늘 밤 다른 남자와 달아났다는 뜻이었다.서율은 붓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먹을 닦았다. 손수건을 두 번 접은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식까지 올렸잖아요.”“그러니까 네가 가야 한다는 거야. 신랑은 급한 일 때문에 먼저 나갔고, 서우는 피곤해서 친정에서 쉬고 있다고 둘러댔다. 밤에는 데려다 놓겠다고 했어.”책상 위로 휴대전화가 내던져졌다. 한서우가 남긴 메시지가 떠 있었다.[아빠, 나 못 해. 그 사람 눈 보고 어떻게 살아. 며칠만 나 찾지 마.]그 아래로 한진규가 보낸 욕설과 부재중 통화 기록이 이어졌다. 서율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없었다.“찾아오세요. 아직 멀리 못 갔을 거 아니에요.”“인천항으로 빠졌어. 패물까지 싹 챙겨서.”“그럼 차태혁 씨한테 설명해야죠.”“내가 지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한테 딸을 보냈겠냐?”한진규가 책상을 내리쳤다. 물그릇이 흔들렸고, 서율은 종이에 닿기 전에 그릇을 옮겼다. 아버지는 그 손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이 와중에도 그깟 종이가 눈에 들어와?”“남의 물건이에요. 내일 돌려줘야 하고요.”“내일 우리 회사가 없어질 판이라고!”한양유통이 부도 직전이라는 건 서율도 알았다. 며칠째 정문 앞에 낯선 차들이 서 있었고, 주방에서는 물품 대금을 언제 주느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진규는 같은 이름을 찾았다.태영캐피탈의 차태혁.돈을 빌려주는 조건보다 돌려받는 방식으로 더 유명한 남자였다. 한진규는 그에게 회사 지분과 딸의 혼사를 함께 내밀었다. 그 딸은 늘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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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은 잠그지 마요
“넘어졌어요.”차태혁은 서율의 입가를 보다가 손을 거뒀다.“결혼식 날?”“구두가 불편해서요.”시선이 발끝으로 내려갔다. 동생의 구두는 치수가 같아도 발볼이 맞지 않았다. 서율이 발가락에 힘을 주자 그는 소파 옆에 놓인 실내화를 발로 밀어주었다.“벗어.”명령하는 말투가 귀에 걸렸지만 서율은 이번만큼은 따르기로 했다. 뒤축에서 발을 빼는 순간 살갗이 쓰렸다. 두 발을 나란히 실내화에 넣고 나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느껴졌다.“낮엔 괜찮던데.”“지금은 안 괜찮네요.”차태혁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한서우는 넘어지면 바닥부터 바꾸라고 한다던데.”가운 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낮에 예식장에 섰던 진짜 신부를, 이 남자는 바로 몇 시간 전에 보았다.“그런 얘기 듣고도 결혼하셨어요?”“결혼할 이유가 성격은 아니었으니까.”돈과 지분. 서율은 아버지가 떠들던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한서우가 조금 달라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 몰랐다.“저도 마찬가지예요.”“내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아직 모르죠. 처음부터 다리를 다친 사람한테 서 있으라고 하시는 걸 보면 좋지는 않겠지만요.”차태혁이 옆으로 비켜섰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서율은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불편한 구두를 벗었는데도 어깨는 풀리지 않았다.그가 인터폰을 눌렀다.“강 비서. 한 회장 내려가셨나?”서율이 고개를 들었다.“가시라고 해. 더 기다리실 일 없어.”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율은 닫힌 문을 보았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안도감보다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이 늦게 밀려왔다.차태혁은 코트를 받아주려다 서율이 물러나는 걸 보고 손을 내렸다.“계속 입고 있을 건가?”“추워요.”거짓말이었다. 코트 아래 붉은 옷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그가 가방 옆을 흘끗 보더니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두꺼운 가운 하나가 소파 등받이에 걸렸다.“그럼 이걸 입어. 젖은 코트보다 나으니까.”빗방울이 묻은 어깨를 보고 한 말이었다. 서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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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워지지 않는 흔적
서율은 손가락을 접었다.“어제 화장이 묻었나 봐요.”차태혁의 시선이 손톱 끝에서 손가락 옆으로 옮겨갔다.“이건?”“굳은살이죠.”“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닌데.”서율은 가운 소매를 당겼다. 손을 빼려는 기색에 그가 놓아주었다. 그런데 이미 살펴볼 것은 다 본 뒤였다.“손을 많이 쓰나 보네.”“사람이 손 안 쓰고 사나요.”차태혁이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그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웃는 바람에 서율은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어젯밤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이 남자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아침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인터폰이 울렸다.“대표님, 한양유통 한 회장께서 통화 요청하셨습니다. 두 번째 전화입니다.”“연결해요.”서율이 돌아보자 차태혁이 전화기를 집었다. 그는 서율에게도 들리도록 스피커를 켰다.“예, 한 회장.”아버지의 목소리는 밤새 딸을 걱정한 사람처럼 다급했다.“간밤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서우가 워낙 철이 없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진 않았는지…….”“불편한 일은 없었습니다.”서율은 소파에 내려놓은 가방을 집었다. 지금이라도 욕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고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그럼 약속하신 자금 건도 오늘 중에?”“회사 얘기는 담당자 통해서 하시죠.”“아, 예. 물론이지요. 그냥 안부 여쭈려고 전화드렸습니다.”차태혁은 서율의 손을 한 번 보고 물었다.“따님 요즘 뭐 배우십니까?”짧은 침묵이 흘렀다.“배운다니요?”“손에 굳은살이 있던데요.”서율이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버지는 매일 복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도 자신이 어느 손에 붓을 쥐는지 모를 것 같았다.“아, 골프요. 요즘 하도 열심히 쳐서 그렇습니다. 한번 재미 붙이면 밤낮이 없는 애 아닙니까.”차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율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밝아지는 걸 들었다.“대표님하고 같이 다니려고 레슨까지 받았습니다. 잘 보여야 한다고 어찌나?”“네. 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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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신부의 잔
차태혁은 잔보다 서율을 먼저 보았다. 서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죄송하지만 술은 못 마시겠어요.”민 여사의 눈썹이 올라갔다.“못 마셔? 어제는 와인이 부족하다고 하더니.”테이블 건너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서율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어제의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대답하기 전에 자꾸 남의 기억부터 찾아야 했다.“오늘은 속이 좋지 않아서요.”“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몸 사리면 되겠니. 우리 집에서 처음 받는 잔인데.”집사가 술병을 든 채 서 있었다. 서율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마음만 받겠습니다.”민 여사가 웃음을 거뒀다.“마음만.”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하는 동안 누구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서율은 접시 옆에 놓인 수저를 내려다봤다. 집에서도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면 가장 먼저 자신의 잘못부터 찾곤 했다.손이 잔 쪽으로 움직였다. 마시면 끝날 일이었다. 조금만 넘기고, 아프면 나중에 혼자 참으면 됐다.차태혁이 잔을 가져갔다.“안 마신답니다.”“네가 왜 대답하니?”“본인이 두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민 여사는 차태혁을 잠시 노려보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제야 집사가 술병을 들고 물러났다. 서율은 무릎 위의 손을 꼭 맞잡았다.“태혁이 네가 결혼하면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유난스러울 줄은 몰랐구나.”“달라진 건 없습니다. 저도 싫은 술 안 마십니다.”“네 얘기 하는 게 아니잖니.”“제 아내 얘기여서 하는 말입니다.”맞은편 남자가 웃으며 끼어들었다.“형님, 식사 자리에서 너무 날 세우지 마세요. 어머니도 새 식구한테 잘해주시려는 거죠.”차정민이었다. 차태혁의 이복동생. 아침에 강 비서가 전달한 참석자 이름 옆에 성진물산 상무라고 적혀 있었다.서율은 그제야 그를 보았다. 차정민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형수님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가족끼리인데.”가족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서율은 고개만 끄덕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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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 손을 내게 맡겨요
차태혁이 피 묻은 냅킨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거 치우면 차 더러워질 텐데.”“시트 걱정은 나중에 해요.”서율은 손수건을 남자의 손 아래 받쳤다. 접힌 냅킨 사이로 깨진 유리 조각이 보였다. 무심코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강 비서를 불렀다.“병원으로 가는 거죠?”조수석의 강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네. 진료실 준비 중입니다.”“지금은 이대로 대고 계세요. 자꾸 들여다보지 말고요.”“내 손인데 구경도 못 하나?”“네. 지금은 안 돼요.”서율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앞좌석에서 짧게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차태혁이 강 비서를 흘끗 봤다.“웃었습니까?”“아닙니다.”“앞이나 봐요.”차가 저택을 빠져나왔다. 서율은 상처에 손대지 않은 채 냅킨이 밀리지 않도록 그의 손을 받쳤다. 생각보다 무겁고 큰 손이었다. 어젯밤에는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었는데 지금은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게 먼저 신경 쓰였다.차태혁이 맞잡힌 손을 내려다봤다.“피 봐도 안 무섭나 봐.”“무서워요.”“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해?”“제가 놀라면 피가 멎나요.”남자가 서율을 보았다. 장난스럽던 기색이 사라지자 서율도 늦게 자신의 말투를 의식했다. 동생은 어땠더라. 손톱이 깨졌다고 집안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이런 건 알아두면 좋잖아요. 집에서도 다치는 사람이 있으니까.”뒤늦게 설명을 붙였지만 차태혁은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겠지.”믿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서율은 그 어중간한 틈이 제일 어려웠다.강 비서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했다. 서율이 손을 놓으려 하자 차태혁이 먼저 물었다.“같이 들어갈 거지?”“그럼 저 여기 두고 가시게요?”“혹시 질렸을까 봐.”서율은 피 묻은 냅킨을 보았다.“질릴 건 본가에서 다 질렸어요.”차태혁의 입에서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서율도 모른 척하지 않았다.***진료실 앞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의료진이 차태혁을 안으로 안내하는 동안 서율은 가방을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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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림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한다
서율은 가습기부터 껐다.기계음이 멎자 복도에 있던 직원이 들어왔다. 직원은 서율과 벽의 족자를 번갈아 보며 걸음을 멈췄다.“사모님, 이 방은 대표님 허락 없이 물건을 옮기시면 안 됩니다.”“옮기려는 게 아니에요. 이쪽 좀 봐주세요.”서율은 그림에 손을 대지 않고 벽을 가리켰다. 가습기 바로 위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작품 밑단은 들떴고, 바닥에는 아주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직원이 무릎을 굽혔다.“청소하면서 주워버릴 뻔했네요.”“버리지 마세요.”서율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직원의 손이 멈췄다.“그림에서 떨어진 조각일 수도 있어요. 다른 것하고 섞이면 찾기 어려워요.”서율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붓을 감싸두었던 깨끗한 보존지를 펴고, 떨어진 조각을 받칠 작은 판을 찾았다. 찻상 위에 놓인 차 도구 상자의 빈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이것 잠깐 써도 될까요?”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 도구를 치웠다. 서율은 떨어진 조각을 따로 받쳐두었다. 그림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손대기 전에 어디가 들떴고 어떤 부분이 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했다.“담당하는 분 계시면 불러주세요. 가습기는 다시 켜지 마시고요.”“그렇게 심각한 건가요?”“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게 해야죠.”짧은 대답을 마친 서율은 족자의 아래쪽을 다시 보았다. 갈라진 곳 위로 가지가 이어져 있었다. 한쪽 획의 끝이 떨어져 나가 꽃잎과 나뭇가지의 경계가 끊겼다.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저런 그림 앞에서 같은 말을 했었다. 작은 조각이라고 먼저 버리지 말라고. 잃어버린 뒤에는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원래 것을 붙여놓을 수 없다고.“그만.”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서율은 손을 멈췄다. 차태혁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차 안에서 보았던 표정이 아니었다. 웃음이 걷힌 얼굴보다, 문턱을 넘지 않고 방 안의 물건부터 확인하는 눈길이 더 낯설었다.“거기서 뭐 하는 거지?”“습기가 너무 많이 닿고 있어서요.”“누가 만져도 된다고 했어?”서율은 들고 있던 보존지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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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번에는 네가 책임져
서율은 사진 속 동생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옆에 선 남자의 팔만 남았다. 낮의 결혼식에서는 다른 남자의 팔을 잡았을 텐데, 서우는 벌써 옷까지 갈아입고 웃고 있었다.[아빠한테 연락해.]답장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왔다. 서율은 거실을 둘러보고 창가로 옮겨 앉았다.“언니, 지금 통화 돼?”“돈 없다고 말하려고 받았어.”“없긴 왜 없어. 그 사람 집에 있잖아.”전화기 너머로 음악이 흘렀다. 서우는 소리가 덜 나는 곳으로 움직였는지 잠깐 숨을 골랐다.“언니가 달라면 주겠지. 아빠는 지금 돈 얘기만 하면 소리 질러.”“그래서 나한테 하는 거야?”“그럼 내가 누구한테 해. 거기 내 전화 두고 갔지? 은행 앱 열어봐. 아빠가 보내둔 돈이 있을지도 몰라.”서율은 손바닥 아래의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동생의 지갑과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도 그 안의 돈을 쓰지는 않았다. 돌아올 때 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안 열어.”“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나도 장난 아니야. 차태혁 씨한테 돈 달라고 못 해.”“잘해주나 보네. 벌써 그 사람 편 들어?”그 말에 서율은 붙잡고 있던 커튼을 놓았다. 낯선 집에서 보낸 하루를 동생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이 왜 터졌는지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더더욱.“네가 돌아와서 해결해.”“나 돌아가면 언니는?”서우가 웃었다. 아까 사진에서 보았던 표정이 저절로 떠올랐다.“아빠가 그냥 나가게 해줄 것 같아? 차태혁이 언니한테 속았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 건데.”서율은 대꾸를 못 했다. 서우는 그 침묵을 거절이 끝난 신호로 받아들였다.“그러니까 서로 좋게 하자. 내가 계좌 보내줄게. 오늘 다 못 보내면 우선?”“안 보낸다고.”이번에는 동생 쪽에서 말이 끊겼다.“나 그 사람하고 어제 결혼식도 안 올렸어. 회사 일도 몰라. 그런데 네가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무슨 돈을 받아내?”“언니.”“이 전화도 네 거잖아. 네 돈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알아봐. 나는 남의 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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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겨진 동선
강도윤이 집무실 문을 닫았다. 태혁은 화면에 떠 있는 예식장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낮의 신부는 왼손으로 꽃다발을 받쳐 들었고, 드러난 오른손에는 보석 반지가 두 개나 끼워져 있었다.“한양 쪽 설명하고 맞지 않습니다.”강 비서가 태블릿을 탁자에 놓았다.“식이 끝난 뒤 신부가 친정에서 쉬었다고 했는데, 예식장에 남은 차량 배차에는 인천행으로 적혀 있습니다. 한 회장님 수행기사는 본인이 데려다주지 않았다고 하고요.”“차는 누가 불렀습니까?”“신부 측에서 직접 예약했습니다. 정확히 누가 타고 어디까지 갔는지는 운전기사 확인이 필요합니다.”태혁은 사진을 넘겼다. 신부가 고개를 돌린 옆모습이 나왔다. 목걸이 장식 뒤로 맨살이 조금 보였지만, 점이 있고 없고를 가려낼 정도는 아니었다.그는 화면을 확대하다 멈췄다. 어젯밤에는 코앞에 있는 신부의 얼굴보다 입술의 상처를 먼저 봤다. 그 상처를 확인하려 하자 여자는 손부터 피했다.“인천항 쪽 제보는?”“한서우 씨와 닮은 여자를 봤다는 연락입니다. 동행한 남자가 카지노 손님을 데려가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자료는 없습니다.”“그럼 확인된 것하고 나눠서 적어요. 닮았다는 이유로 끝내지 말고.”강 비서는 다른 화면을 열었다. 이번에는 펜트하우스 출입 시각이었다. 한진규와 서율이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모습이 보였다.“밤에 이쪽으로 들어온 차는 별채에서 출발했습니다. 운전기사는 한 회장님 지시로 모셨다고 합니다.”“별채.”태혁이 낮게 되뇌었다. 여자에게 필요한 물건은 옷이나 보석이 아니었다. 오래 쓴 붓통과 남의 책, 어머니가 남긴 서책이었다.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망설이지 않고 설명했다.한서우가 잠깐 쉰 방에서 챙겨 올 짐치고는 생활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한진규 집에 같이 사는 딸이 더 있는지부터 확인해요.”강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가족관계 서류를 다시 요청할까요?”“한 회장이 골라준 종이 말고. 행사에 온 가족 명단이나 오래 일한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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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가면을 쓰고 갈 마지막 자리
“오늘 한 회장 만나기로 했어.”서율은 책을 싸던 손을 멈췄다. 태혁이 식탁 끝에 서 있었다.“갑자기요?”“확인할 게 생겨서.”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보여주지 않았다. 서율도 어떤 일이냐고 묻지 못했다. 어젯밤 서우의 메시지와 아버지가 상자에 넣어 보낸 메모가 차례로 떠올랐다.“저도 가요?”“같이 가겠어?”물어오는 말이라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 자리에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간다고 하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앞에서 듣게 될 것이다.서율은 받침을 댄 책을 상자 안에 넣었다. 태혁이 기다리는 동안 포장 끈을 두 번이나 잘못 넘겼다.“그거부터 해.”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끝내라는 말을 듣자 서율은 꼬인 끈을 풀 수 있었다. 의뢰인이 보내온 주소를 적고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기사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건 받으시면 연락 달라고 해놨어요.”“강 비서한테 주소 줘. 돌아오는 길에 전해드리면 돼.”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일만 남았다. 상자 뚜껑을 덮고 나니 아버지를 만날 일이 더 크게 눈앞으로 다가왔다.“저도 갈게요.”“한 회장이 부담되면 따로 이야기해도 돼.”“저 없는 데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요.”태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놨다. 부정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서율은 젖은 손을 마른 천에 닦았다. 오늘 여기서 고개를 젓는다고 아버지와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은 더 많은 말을 대신 외워야 할지 몰랐다.“제가 할 말도 있어요.”“그래.”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율은 그제야 억지로 붙들고 있던 것을 하나 내려놓은 듯 숨을 쉬었다. 태혁이 식탁 모서리에 놓인 메모를 보고 물었다.“책 보내고 나면 뭐 해야 해?”“별채 물건 더 챙겨야죠. 의뢰받아 둔 것들도 있고요.”“목록부터 챙겨. 돌아올 때 잊지 말고.”돌아올 때.서율은 그 말이 일부러 나온 건지 살폈다. 그는 이미 직원에게 상자를 부탁하고 있었다. 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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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한서율입니다
한진규의 손이 메뉴판 위에서 멈췄다.“붉은 점이요?”“네. 목 뒤에.”태혁은 덧붙이지 않았다. 서율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가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만졌던 점이었다. 같은 집에서 스물네 해를 지낸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있을까.한진규가 억지로 웃었다.“어릴 때 다쳐서 남은 겁니다. 애가 워낙 조심성이 없어서요.”“어디서 다쳤는데요.”“집 정원이죠. 성북동 살 때. 대여섯 살이었나, 나뭇가지에 긁혀서 제가 병원에도 데려갔습니다.”말이 길어질수록 서율의 속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까지 거짓이었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갔다는 대목에서, 서율은 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태혁이 서류 한 장을 펼쳤다.“보내주신 자료에는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미국에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다고요.”한진규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제가 나이를 잘못 기억했나 봅니다. 다 큰 딸 어릴 때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습니까.”“그럼 예식 날 일로 여쭙죠.”태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식 끝나고 따님 데리고 어디 가셨습니까?”“집이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쉬다가 밤에?”“예식장에서 인천으로 간 차가 있습니다. 신부가 직접 불렀고요. 회장님 수행기사는 같이 귀가한 적이 없다는데요.”룸 밖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멀지 않은 식탁에서 누군가 웃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들릴 만큼 방 안은 조용했다.한진규가 서율을 봤다. 왜 이걸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눈이었다.태혁은 서류를 한진규 앞으로 밀었다.“밤에 데려오신 사람은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대표님.”“한 회장. 딸이 하나 더 있습니까?”서율은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아버지가 입을 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그 얼굴을 똑바로 봤다.한진규는 물을 마시려다 잔을 내려놓았다.“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애는…… 집안에 걱정을 좀 많이 끼치는 애라.”“여기 있는 분입니까?”아버지가 고개를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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