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도망친 쌍둥이 동생 대신 재벌가의 신부가 된 한서율. 며칠이면 끝날 거라 믿었던 대역은 차태혁의 의심과 집착 속에서 점점 진짜가 되어 간다. 빼앗긴 이름과 삶을 되찾으려는 그녀 앞에 사랑과 욕망, 가족의 비밀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Ver más“서우 대신 네가 들어가.”
서율은 붓을 든 채 아버지를 보았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온 한진규는 아직도 낮의 예식에서 입었던 정장 차림이었다. 가슴에 달렸던 꽃만 없어져 있었다.
“어디를요?”
“차태혁 방.”
붓끝에서 먹이 떨어졌다. 서율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고서 가장자리에 검은 얼룩이 먼저 번졌다. 사흘 동안 붙여 놓은 종이가 젖어 들었다.
“서우가 도망갔다. 그놈이랑.”
오늘 결혼한 신부가, 오늘 밤 다른 남자와 달아났다는 뜻이었다.
서율은 붓을 내려놓고 손에 묻은 먹을 닦았다. 손수건을 두 번 접은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식까지 올렸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가야 한다는 거야. 신랑은 급한 일 때문에 먼저 나갔고, 서우는 피곤해서 친정에서 쉬고 있다고 둘러댔다. 밤에는 데려다 놓겠다고 했어.”
책상 위로 휴대전화가 내던져졌다. 한서우가 남긴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빠, 나 못 해. 그 사람 눈 보고 어떻게 살아. 며칠만 나 찾지 마.]
그 아래로 한진규가 보낸 욕설과 부재중 통화 기록이 이어졌다. 서율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없었다.
“찾아오세요. 아직 멀리 못 갔을 거 아니에요.”
“인천항으로 빠졌어. 패물까지 싹 챙겨서.”
“그럼 차태혁 씨한테 설명해야죠.”
“내가 지금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한테 딸을 보냈겠냐?”
한진규가 책상을 내리쳤다. 물그릇이 흔들렸고, 서율은 종이에 닿기 전에 그릇을 옮겼다. 아버지는 그 손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깟 종이가 눈에 들어와?”
“남의 물건이에요. 내일 돌려줘야 하고요.”
“내일 우리 회사가 없어질 판이라고!”
한양유통이 부도 직전이라는 건 서율도 알았다. 며칠째 정문 앞에 낯선 차들이 서 있었고, 주방에서는 물품 대금을 언제 주느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진규는 같은 이름을 찾았다.
태영캐피탈의 차태혁.
돈을 빌려주는 조건보다 돌려받는 방식으로 더 유명한 남자였다. 한진규는 그에게 회사 지분과 딸의 혼사를 함께 내밀었다. 그 딸은 늘 그렇듯 서우였다. 서율에게는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말만 전해졌다.
“오늘 밤만 넘겨. 서우 돌아올 때까지 사나흘이면 돼.”
“오늘 밤만이라면서 왜 사나흘이에요?”
“말꼬리 잡지 마.”
“그다음에도 안 돌아오면요?”
한진규가 입을 다물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서율은 그 표정을 잘 알았다. 서우가 망가뜨린 도자기를 붙일 때도, 서우 이름으로 작품을 낼 때도 아버지는 늘 저렇게 굴었다.
잘되면 서우가 한 일이고, 잘못되면 서율이 책임질 일이었다.
“싫어요.”
목소리가 작아 다시 말했다.
“못 해요. 저는 그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몰라요.”
뺨이 먼저 돌아갔다.
서율은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입술 안쪽이 이빨에 찍혔는지 피 맛이 났다. 마루에 떨어진 붓이 발밑까지 굴러왔다.
“먹여 살린 값을 이렇게 갚아?”
서율은 손등으로 입가를 눌렀다. 오늘 오전에도 복원 대금이 본채 계좌로 들어갔다. 그 돈이 자신의 식비보다 적은지, 많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문밖에 선 경호원 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얼굴 똑같지, 목소리도 닮았지. 불만 어둡게 해놓으면 알아볼 수가 없어.”
“서우랑 같은 엄마한테서 태어난 건 필요할 때만 기억나세요?”
“뭐?”
“밖에서는 딸 하나라고 하셨잖아요.”
쌍둥이 가운데 공식 가족으로 소개된 건 서우뿐이었다. 서우가 본채에서 친척들의 인사를 받는 동안 서율은 어머니와 별채에 살았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이면 서율은 서재 문을 닫았다.
한진규의 손이 다시 올라왔다. 서율은 이번엔 얼굴을 피하지 않고 아버지를 보았다. 잠시 허공에 머물던 손이 내려갔다.
“네 어미 자리, 계속 지켜주길 바라면 말 잘 들어.”
서율의 손이 멈췄다.
한진규는 그걸 보자 목소리를 낮췄다.
“납골당 계약도 내 이름이야. 네가 거기 혼자 찾아가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니 사진 앞에 두고 온 작은 꽃병이 떠올랐다. 다음 주에는 새 꽃으로 갈아드리려 했다. 아버지는 그곳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으면서 위치와 계약 명의만은 잊지 않았다.
서율은 터진 입술을 눌렀던 손을 내렸다.
“어머니한테는 손대지 마세요.”
“그러니까 네가 잘하면 돼.”
한진규가 문밖으로 손짓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커다란 옷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서율이 대답하기 전부터 준비돼 있던 것들이었다.
붉은 슬립, 실크 가운, 구두. 목에 뿌릴 장미 향수까지.
서율은 옷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막았다.
“제가 입을게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율이 옷을 받아 쥐자 그제야 한진규가 등을 돌렸다.
“늦지 마라.”
문이 닫힌 뒤 서율은 거울 앞에 앉았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터진 입술을 보고 잠깐 손을 멈췄다.
“여긴 덧바르면 따가우실 텐데요.”
“괜찮아요. 피만 안 보이게 해주세요.”
목 뒤의 붉은 점 위로 컨실러가 덧발라졌다. 어머니는 어릴 적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그 점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옷이 같고 머리 모양이 같아도 엄마는 너를 찾는다고 했었다.
서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울 속 여자는 한서우처럼 보였다. 입술에 바른 색이 너무 진했고, 가운 끈을 움켜쥔 손만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가방은 이걸로 드릴까요?”
서우의 작은 검은 가방이 내밀어졌다. 서율은 안을 열어보았다. 화장품과 휴대전화, 지갑이 들어 있었다.
“본채 화장대에 두고 가신 물건들이에요. 회장님이 그대로 가져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서우는 새 전화까지 준비해서 나간 모양이었다. 서율은 낡은 천 파우치를 그 틈에 밀어 넣었다. 보존지로 감싼 붓과 손수건, 어머니의 향낭이 들어 있었다. 가방 지퍼가 간신히 잠겼다.
마지막으로 책상으로 돌아가 고서를 덮었다. 먹이 번진 가장자리에 흡수지를 대고, 아직 마르지 않은 보수 부위는 눌리지 않게 받쳤다. 내일 돌아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함부로 책을 접지 않도록 메모를 남겼다.
[건조 중. 손대지 말 것.]
이름을 적으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서율은 펜을 내려놓았다.
***
밤 11시 40분, 한남동.
전용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한진규의 전화가 두 번 울렸다. 아버지는 받을 때마다 서율을 등지고 목소리를 바꿨다.
“예, 거의 다 왔습니다. 애가 긴장이 좀 돼서요.”
긴장.
서율은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뺨이 유난히 붉었다. 화장이 아니라 손자국이었다.
최상층에 도착하자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도윤입니다. 대표님 비서입니다.”
강 비서는 한진규보다 서율을 먼저 보았다. 정확히는 서율이 가운 위에 걸친 코트와, 발끝을 잘못 디딜 때마다 구부러지는 무릎을 보았다.
“구두가 불편하시면 실내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한진규가 대신 답했다. 강 비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안쪽에 준비돼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서율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턱으로 침실 쪽을 가리켰다.
“먼저 들어가 있어.”
“회장님은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강 비서의 말에 한진규가 웃음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애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복도 끝에 이르자 한진규가 서율의 팔을 당겼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넌 한서우야.”
서율은 팔을 잡힌 자리를 내려다보다 아버지 손을 떼어냈다.
“제가 들키면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실 거죠?”
“지금 농담할 때야?”
“알아두려고요.”
서율이 먼저 문고리를 잡았다. 더 서 있으면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침실은 어두웠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침대 끝만 희미하게 비췄다. 서율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소파 옆에 섰다. 가방 속 휴대전화가 한 번 진동했지만 꺼내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구두 소리가 들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였고, 손에는 전화가 들려 있었다.
“원금이 아니라 빠져나간 돈부터 찾아. 그 사람 식구한테 전화하지 말고.”
통화를 끝낸 남자가 서율을 보았다.
서율은 사진에서 본 얼굴을 알아봤다. 그런데 눈높이가 생각보다 훨씬 위였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문을 닫은 뒤였다.
“한서우.”
서율은 가방 끈을 놓지 못했다.
“네.”
차태혁이 벽의 조명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방에서 숨을 곳을 찾듯 고개를 돌리자 그가 멈춰 섰다.
시선이 서율의 입술에 닿았다.
“고개 좀 들어봐.”
서율은 억지로 턱을 들었다. 차태혁이 가까이 와 손을 뻗었다. 몸을 움츠리자 손이 뺨 앞에서 멈췄다.
남자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피로한 기색이 사라졌다.
“내 신부 얼굴에 손댄 게 누구지?”
“이 보증서로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정 팀장이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발급처에서 보내온 원본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서율이 먼저 표시했던 먹선 옆의 작은 빈틈이었다. 실물에서는 그 자리가 검게 메워져 있었다.“발급 당시 확인한 작품과 현재 출품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품이라고 입증할 자료가 올 때까지 거래를 중단하겠습니다.”민 여사는 손님들이 앉은 쪽을 먼저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번호판을 만지던 노인이 수행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얇아졌다.“보관하면서 수리했을 수도 있잖아요. 소장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시네요.”“요청한 기록에 그 수리가 없습니다.”서율이 파일을 펼쳤다. 민 여사는 그녀를 보지 않고 정 팀장에게 말을 이었다.“이사장인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박 선임이 서류 한 장을 받침 위에 놓았다. 갈라 전에 출품 담당자에게 보냈던 검토 의견이었다. 수신 확인 옆에는 이사장실로 전달했다는 회신이 붙어 있었다.민 여사의 시선이 그 종이에 닿았다.“제게 올라오는 문서를 제가 일일이 다 읽을 수는 없죠.”“그럼 담당자가 설명하면 되겠습니다.”태혁이 대답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민 여사가 서율에게로 돌리려던 화제를 다시 종이 위로 가져왔다.“오늘 실물을 무대로 바로 옮긴 이유도 같이 듣죠. 약속된 확인 시간을 없앤 사람이 누군지.”진행자가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출품 담당자는 무대 옆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태혁은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라고 몰아붙이는 대신, 거래 중단부터 손님들
“공개 감정을 하라는 말씀이세요?”서율이 묻자 민 여사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감정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고. 우리 새아가 안목이 어떤지 손님들도 궁금해하시잖니.”“작품을 아직 못 봤어요. 먼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요.”“단상에 올라가면 보일 텐데.”민 여사는 서율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다정한 동작이었지만 놓아주는 시점은 자신이 정하려는 손이었다.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감정팀하고 약속한 확인 절차부터 진행하시죠.”“태혁아, 오늘은 손님들 모신 자리지 회의실이 아니야. 그 정도 인사도 못 해주겠다는 거니?”서율은 팔을 빼며 먼저 대답했다.“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는 감정팀에서 확인하셔야 하고요.”민 여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음을 되찾았다.“그래.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으니 잘하겠지.”그녀가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자 태혁이 서율을 봤다.“거절해도 돼.”“알아요. 그런데 자료하고 다른 물건이면 누군가는 말해야 하잖아요.”“네가 꼭 그 사람일 필요는 없고.”서율은 파일을 내려다봤다. 검토자 이름이 적힌 첫 장은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밖에서 자기 이름을 바로 밝히지 않기로 한 일과, 본 것을 말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다.“제가 발견해서 확인하자고 했어요. 마지막도 보고 싶어요.”태혁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강 비서에게 확인실의 두 사람을 무대 가까이 안내해달라고 했다.객석에 앉은 뒤에도 서율은 물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컵을 들면 손이 떨리는 게 보일까 봐 한 모금씩만 넘겼다. 태혁이 조용히 속삭였다.“물잔하고 싸우지 말고.”“떨리는 걸 어떡해요.”“나도 조금 떨리는데.”서율이 돌아봤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거짓말.”“지금 저기 올라가라고 하면 나보다 네가 잘할 테니까.”서율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태혁은 웃는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물잔을 들었다.경매는 순서대로 진행됐다. 누군가 번호판을 들 때마다 객석의 시선이 움직였다. 서율은 사람
갈라를 사흘 앞둔 오후, 서율은 정 팀장에게 보냈던 비교 사진을 다시 열었다.처음 의문을 적어 보낸 뒤로 2주가 지났다. 출품자는 보수 전후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했지만, 그 말에 필요한 작업 기록은 아직 다 오지 않았다. 보증서를 발급한 쪽에서 보낸 원본 사진은 오히려 다른 부분을 더 보이게 했다.서율은 두 사진의 같은 글자 옆에 표시했다. 태혁은 맞은편에서 그 자리를 봤다.“사진만 보고 다르다고 할 수 있어?”“그래서 실물을 봐야 해요. 사진 찍은 각도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그런데 왜 자꾸 답을 미루는데.”“그건 제가 모르죠.”서율은 받은 회신을 읽어주었다. 작품은 별도 장소에 보관 중이고, 행사장에 입고된 뒤 지정된 시간에만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장자가 정한 일정이라고 했다.태혁의 표정이 굳었다.“거래 전에 확인부터 해야지. 사람 모아놓고 보여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정 팀장님도 그 말 하셨어요. 확인 끝나기 전에는 낙찰 확정하지 말라고요.”그날 저녁 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실물 확인은 갈라 당일로 잡혔고, 감정팀 검토가 끝나지 않으면 거래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서율은 확인 메일을 받아 폴더에 넣었다.당일 준비할 자료 목록이 늘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고르기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었다.“발언하라고 하면 어디까지 할 거야?”태혁이 물었다.“제가 본 차이만요. 누가 가짜를 만들었다는 말은 못 하죠.”“민 여사가 그런 말만 하고 내려오게 둘 사람은 아니야.”서율은 초청장을 내려다봤다. 그 여자는 술 한 잔을 못 받는 것도 집안 예의의 문제로 바꿨다. 오늘은 어떤 말을 꺼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럼 안 나가는 게 나을까요?”“내가 싫은 건 네가 망신당하는 거지, 나가는 게 아니야.”태혁이 파일을 덮었다.“네 판단으로 말할 자리면 가. 한양유통 딸 노릇하러 가는 거면 가지 마.”서율은 그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사람들 앞에 서는데 두 가지가 나뉠 수 있을까.그녀가
“수리한 적이 있네요.”서율이 족자 아래쪽을 가리켰다. 정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는 상태표를 봤다.“그럼 위작입니까?”“아직은 모르죠.”서율은 새로 보강된 부분과 그림이 그려진 부분을 나눠 표시했다. 뒤에 댄 종이가 새것이라는 이유로 앞의 글씨까지 가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손을 거친 책들도 이전보다 새 종이가 붙어 돌아갔다.“여기 고친 건 맞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고쳤는지부터 보고 싶어요.”박 선임이 소장자가 보낸 이력표를 내밀었다. 보수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다. 다만 함께 붙어 있는 사진이 너무 작았다.서율은 돋보기를 내려놓고 청자 쪽으로 옮겨갔다. 입구의 작은 흠과 바닥 사진을 번갈아 봤다. 금동불상도 자료에 표시된 부분을 차례로 확인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두고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에 물음표를 그렸다.“금속 쪽은 제가 판단할 범위가 아니에요. 여기 흔적이 수리인지 제작 때 생긴 건지 구분이 어렵네요.”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전문 담당자 의견을 받겠습니다. 서율 씨는 의심되는 부분만 남겨주세요.”서율은 다시 족자 앞에 섰다. 다른 두 점을 보는 동안에도 두 번째 줄의 먹선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글씨가 서툴러서는 아니었다. 잘 쓰려고 멈춘 자리가 이상하게 같은 곳에 모여 있었다.그녀는 작가의 다른 서첩 자료를 부탁했다. 정 팀장이 화면을 열어주자 이번에는 앉아서 오래 봤다.원본 자료에서 빠르게 흘러간 획이 족자에서는 중간에 한 번씩 멎었다. 종이 탓일 수도, 붓 상태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 서율은 한 글자만 골라 말하지 않고 비슷한 흔적을 세 군데 더 찾아 표시했다.“이건 손이 망설인 것 같아요.”박 선임이 가까이 왔다.“왜 그렇게 보시죠?”“앞의 획을 끝내고 다음으로 가는 방향이 여기서 꺾여요. 그런데 다른 글자에도 같은 식으로 멈춘 곳이 있어요. 원래 이런 글씨를 쓰는 분인지부터 확인해야겠지만요.”서율은 자기 손으로 허공에 한 번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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