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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색 2화

Author: Ms.10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30 19:21:02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원이 뒤를 돌아보자, 로비 쪽으로 난 응급실 출입구에서 막 나오는 재영이 등 뒤에 서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러 올 때면 혹시나 선생님을 만나지는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그를 찾아다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오….’

자주 만날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비에 젖어 못 볼 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그러니까 반갑기도 하고 또 반갑지 않기도 했다.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비에 홀딱 젖은 데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표정을 찡그리고 다가오지 못하는 세원이 이상해 재영은 세원을 향해 먼저 걸어갔다.

“이 시간에 병원에 왜 왔어. 비 맞았어?”

“선생님…….”

평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물어 오는 재영의 말에 복잡한 감정은 쏙하고 들어가 버렸다. 이내 재영이 자신의 앞에 서자 안도감이 몰아쳐 오며 세원의 눈가가 빨개졌다.

“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더니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세원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항상 선머슴 같아 보이던 세원이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자, 재영도 급격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감정 없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그가 보기에 평소 세원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공의인 자신도 모르는 직원들과 친분을 쌓는, 그러니까 연구 대상 급의 쾌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예민한 심사로 좋은 소리를 못 해도, 기가 죽나 싶다가 조금 지나면 생글생글 웃었다. 하여튼 2년을 봐 왔고 몇 번이나 밀어냈지만 도저히 얘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하여튼 오늘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많이 젖었으니까, 당직실로 가자. 거기에서 갈아입을 옷이 있는지 보고 줄게.”

*

재영이 기억하는 세원과의 첫 만남. 그날은 아버지 생신 기념 저녁 먹는 시간을 갖겠다고 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본가에 갔던 날이었다. 재영의 집 분위기는 아들만 있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다 모여도 말수가 많지 않았다. 분위기메이커 준영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한집에서도 같은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적었다. 각자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다가 다시 병원 앞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법조계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가로 살고 계신 아버지와 의료계 집안에서 태어나 외교관을 지내고 현재는 외교부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의 영향 중 성격적인 면에서 재영은 어머니 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듯했다. 두 돌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아르헨티나로 발령받아 떠나는 바람에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은 크게 없는 편이었지만 피를 통해 유전으로 이어지는 영향은 무시를 못 하는지 어머니처럼 말수가 적고 매사에 신중하며 감정에 휩싸이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준영은 달랐다. 준영과 재영은 같은 배속에서 나온 형제지만 성격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천지 차이였다. 재영이 내성적이라면 준영은 외향적이고 친구가 많지 않은 자신에 비해 준영은 전 세계 각국 어디서 만났는지도 모르는 친구들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이런 준영의 성격을 우려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남자가 바깥에 많이 돌아다녀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사업을 물려받는다면 장남보다는 차남이 더 어울리는 자리라고 덧붙이셨다. 그 말씀은 옳았다. 재영은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으므로 사업은 준영에게 물려질 것이다.

“형, 이따 세원이 올 거야.”

노크도 하지 않고 재영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벌러덩 누운 준영이 책상에 앉아 한창 자료 작성 중인 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은 불쑥 들어온 준영이 익숙한 듯 시선을 주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 아버지 생신인데 걔가 왜 와?”

“우리 식구들 입 짧아서 많이 먹지도 못하잖아. 세원이는 엄청 잘 먹어….”

“알아서 해.”

준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재영이 말했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교수님 포럼 자료 논문이 사실 더 급해서 집에 누가 오건 말건 크게 관심 둘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재영이 시큰둥 하자 준영은 침대에 누워있다가 언제 일어났는지 책상에 엉덩이를 기대고 재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형 세원이 잘 봐봐. 공부는 잘 못하는데 쪼끄만 게 의리가 있어. 몇 달 전에 입가가 좀 찢어져서 온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 친구가 일진 애들한테 끌려갔는데… 형 요즘도 일진이 있더라? 하여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같이 따라가서 실컷 맞고 왔대.”

“그게 의리냐? 멍청한 거지.”

“도덕 없고 의리 없는 신민혜보다 낫지! 촉이오니까 오늘 세원이 보고 한번 잘 키워 봐.”

재영은 이 전에 몇 번 준영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준영이 심심해서 영어 과외를 하는데 담당하는 학생이 공부는 좀 못해도 귀엽고 성격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긴 했었다. 그는 혹시 준영이 고등학생 제자를 상대로 이성적인 감정이 있나 싶어 쇠고랑 차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미성년자는 건들지 말라고 충고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부 못한다고 욕하면서 자신에게 들이미는 꼴이 우스웠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 고딩한테 무슨 감정이야… 재영은 일어나 자료를 찾으러 옆 서재 방으로 향했다.

*

그가 서재에 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포럼 논문에 넣을 자료를 뒤지던 재영이 누군가의 인기척에 책을 넘기던 손길을 뚝 하고 멈추었다. 힘을 많이 주지 않고 조용히 문을 여는 소리만 들어도 가족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온 사람은 한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들어오자마자 “우와, 이게 무슨 서재야 도서관 같은데?”라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해리포터 어쩌고저쩌고 뭐라 구시렁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책을 꺼내서 뒤적이고 다시 꽂고 또 책을 빼서 뒤적이고 다시 꽂고를 반복했다.

‘더럽게 부산스럽네.’

재영은 반갑지 않은 이방인을 속으로 조소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혼잣말을 많이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준영 샘은 이렇게 부잔데 왜 과외를 하지?”

성가시게 부스럭거리던 사람이 진짜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하는 소리에 이제 재영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아까 준영이 말했던 과외 학생인 듯싶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학생은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집이 으리으리하면 뭐 해! 손님 대접이 꽝인데. 아오, 배고파 죽겠네.”

혼자서 쫑알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재영은 이제 학생의 얼굴이 조금 궁금해졌다.

“이따가 확! 거덜 내버려?”

“풉.”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온 자신의 웃음소리에 재영이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멘트의 주인공은 이제 혼잣말과 움직임을 멈췄다. 인기척을 발견하며 멈칫 놀라 예민하게 공기의 움직임을 감지하려는 것 같았다.

“누… 누구 있어요?”

학생의 물음이 들렸지만,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던 사이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귀신… 아니죠? 무… 무섭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요!”

고민하던 재영은 어쨌든 이곳에 사람이 있다고는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아 책장을 덮고 밝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하얀색 커튼이 열린 창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휘날리고 그 바람에는 정원의 소나무 향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 이내 재영의 눈앞에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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