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재영의 말에 다시 한번 방이 조용해졌다. 다들 먹던 술을 내려놓고 재영의 눈치만 보았다. 세원은 더 죽을 맛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 불편한 자리에 오자마자 역정을 내는 재영에 여러모로 세원은 그가 미웠다.‘잠깐. 신민혜?’세원의 뇌리에 한 장면이 스쳤다.“멍충아! 너 신민혜가 누군지 아냐? 지금 비상 사이렌 켜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고 엉? 신민혜는 은재영 전 여친이야. 너 이제 와서 재영이 오빠 뺏길 거야? 확실하게 하라고.”이제 알았다. 그녀였다. 재영의 전 여자 친구. 도현이 미리 경고했었던 바로 그 여자. 생각이 거기에 닿으니, 그녀의 차가운 눈매가 퍽 다르게 보였다.아까까진 그냥 같은 자리에 있는 여자 정도로 그녀를 보았는데, 이제는 달랐다. 세원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뜯어보았다. 티도 나지 않을 눈길이었다.신민혜 그녀는 얼굴이 예쁘장했다. 세원의 시야에 들어오는 재영과 신민혜 두 사람의 그림체가 맞았다. 약간 까칠하고 차가운 얼굴인 재영과, 매서운 눈빛이나 부드러운 얼굴선의 신민혜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세원은 고개를 내려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멀끔한 아나운서 같은 옷을 입은 언니들에 비하면 자기는 너무 수수했다. 아니, 나름대로 꾸민다고 꾸미긴 했지만 하필이면 클럽 복장이라 꼭 서울 쥐 앞에 시골 쥐 꼴이었다.“무슨 말이야? 둘이… 사귄다는 거야?”신민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진 감출 수 없었다. 선생님이 과연 저 물음에 뭐라고 말할지 세원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그때였다.“야! 할 말 있으면 둘이 나가서 해.”“그래 얼마만의 오프냐? 좀 쉬자. 우리.”반대편 선생님들의 원망 섞인 원성이 큰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재영은 깨끗한 유리잔에 양주를 따르며 그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자신의 양주잔에 양주를 다 따른 재영은 세원의 잔도 가져다가 얼음을 채우고 술을 조금 따랐다.그냥 한 모금 입만 축일 수 있는 양이었다.“선생님
“오리 같애.”세원의 입술을 보며 재영이 말했다. 오늘 광란과 환락의 밤을 흠뻑 즐기고 오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입술이 댓 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의 말에 무슨 대꾸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오리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친구들은 지금쯤 클럽에 들어갔겠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을 마시면서 형형색색 조명 아래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잘생긴 오빠들한테 번따 당하고? 하… 오늘 누구보다 재미있게 놀 자신 있었는데! 옆에서 걷고 있는 눈치 없는 누구 때문에 다 망쳐 버렸다.삐진 세원의 속마음이 티가 났는지 옆에서 걷던 재영이, 답지 않게 계속 세원에게 말을 걸었다.“가면 술도 다양하고 도현이도 있으니까 불편하지 않을 거야.”“그래도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선생님 혼자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아무리 재영 바라기인 세원도 모르는 사람이 잔뜩 있는 술자리는 영 내키지 않았다.“너 낯 안 가리잖아.”“낯 가려요!”표정을 구기며 과하게 부정하는 세원을 본 재영은 피식 웃었다.‘나도 모르는 우리 병원 사람들한테 먼저 다가가서 친해진 게 누군데?’“그리고 나 취하면 놓고 갈 놈들이라 챙겨 줄 사람이 없어.”“아니! 그러면 저를 마무리 수습용으로 데려온 거였어요?”“어.”“흥! 두고 봐요. 오늘 마무리 수습용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 될 테니까! 까짓거 인생 술 한번 마셔 보죠!”“다 왔어.”재영이 안내한 곳은, 외관만 봐도 고급 술집이었다. 까만 대리석으로 전체를 깔고 골드로 장식해서 지금까지 세원이 친구들과 다닌 술집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들어가자마자 연예인처럼 예쁜 언니가 입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세원은 왠지 자신이 작아지고 있음을 느꼈다.‘이런 술집은 술값도 엄청 비쌀 텐데… 이따가 엔빵 하자고 하면… 나 카드에 얼마 있지?’재영이 2층 VIP 룸의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니 안에서 사람들이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원은 재영의 뒤에 있다가 이내 그를 따라 쭈뼛쭈뼛 방으로 들
[이세원 전화 안 받네.][세원이 병원 알바 중일걸?][이거 보면 오늘 저녁에 클럽 갈지 말지 정해서 보내 놔.][근데 세원쓰 요새 친척 집에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늦게 나오는 거 좀 눈치 보이지 않을까?][그럼 우리끼리 가ㅋㅋㅋㅋㅋ][나 지금 끝남! 클럽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갑니다! 갈게요! 갑시다!][그럼 10시까지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하고 나와.]“펀, 쿨, 섹시라….”고민하던 세원은 짧은 테니스 치마에 역시 조금 짧은 듯한 티셔츠를 골랐다. 가슴 부분에 ‘ARE U ON CRACK?’이라는 글씨가 있고 몸에 붙는 타입이라 보는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머물게 될 것 같은 옷이었다. 다 입고 나서 베란다 문에 비친 자신을 보니 대단히 예쁘진 않지만 뭐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아까 병원에서 선생님의 여자 친구에 대해 듣고 나서 텐션이 낮아진 상태였는데 클럽 생각을 하니 우울감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나 오늘 좀 괜찮은데? 화장도 잘됐어! 머리도!”혹시 화장이 뜬 부분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렇게 예쁘게 화장하고 차려입은 모습을 선생님한테 보여주고 싶은데… 선생님은 오늘도 늦는 것 같다. 언제는 빨리 왔나? 오면 다행이지… 바쁜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만 세원은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근데 선생님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클럽 가고 좀 찔리네.’하여튼 더 지체하면 지각이었다. 아끼는 향수도 칙칙 뿌리고 지갑과 핸드폰을 넣은 가방도 착착 멨다. 기분 좋게 현관으로 나가자, 천장에 달린 센서 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기분이 들떠서 그런가? 켜지는 불빛이 꼭 왕이 행차할 때 울리는 팡파르처럼 보였다.삐릭.세원이 열심히 힐을 신고 있을 때 현관 도어 록을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재영이었다.“오! 선생님!”세원은 타이밍 좋게 들어온 그가 너무 반가워 큰 소리로 반겼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온 그는 힘든 하루였는지 기운이 다 빠져서는 지쳐 보였다.“옷… 뭐야?”재영은 집에
“요 흰둥.”오후 늦은 시간에 커피 심부름을 온 세원이 뒤를 돌아보자, 재영의 같은 과 동기 임도현이 생긋 웃으며 서 있었다. 그녀를 흰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이 인간 한 명이므로 돌아보기 전에 이미 그가 서 있을 것을 알았다.“안냐하세여.”그에게 큰 관심 없는 세원이 웃지도 않고 대충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이 박장대소했다. 재영에게는 그렇게 찰싹 달라붙던 녀석이 자기 앞에서는 이토록 무심하다니. 생각할수록 웃겼다.“푸하하하핫! 와따 마! 확실하네. 어? 은재영 아니라 이거지? 흰둥! 너 은재영 생일 선물 뭐 할 거야?”“샘 생일이에요?”“야, 너 은재영을 그렇게 따라다녀 놓고 생일을 몰라?”“아…. 아니, 다음 달인 건 아는데….”생각해 보니 밸런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이나 챙겼지, 선생님의 생일인지 언제인지도 몰랐다는 자각이 들어 세원은 도현 앞에서 조금 민망해졌다.“신민혜가 도와달라면서 미리 걔 생일날 당직 좀 바꿔 달….”평온하게 말하던 도현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급발진을 했다.“멍충아! 너 신민혜가 누군지 아냐? 지금 비상 사이렌 켜고 달려도 모자랄 판에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고 엉? 지가 좋아하는 사람 생일도 모르고 어휴.”“누가 멍충이에요? 아 이제 알았으니까 멍충이 아니에요!”그때, 주문한 커피가 다 나왔다는 진동 벨이 울렸다. 세원이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담은 캐리어를 손에 들었을 때 뒤따라온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신민혜는 은재영 전 여친이야. 너 이제 와서 재영이 오빠 뺏길 거야? 확실하게 하라고.”“전 여친이에요?”얼음장같이 차가운 선생님에게 전 여친이라니 참으로 이질적인 단어였다.‘하긴, 선생님 저 외모에 저 키에, 저 직업에 절대로 모태 솔로는 아니겠지. 선생님이 좋아한 여자라면 엄청 예쁘겠지? 직업도 좋을 거고. 그리고 어쩌면… 유복한 집안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강남 8학군 출신의 부잣집 영애일지도 몰라.’세원은 괜히 심통
삐비빅. 삐비빅.요란하게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기계처럼 일어나 재영이 핸드폰 액정을 껐다. 4시. 언제나처럼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다 어제 새벽 일이 기억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거기엔 아직 세원이 있었다. 완전히 잠에 빠진 얼굴로.“악몽 꿔서 잠 못 잔다더니.”남은 잠 못 자게 뒤흔들어 놓고는, 자기 집처럼 퍼져서 쿨쿨 잠에 빠진 세원이 밉고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옛날 언젠가 본과 후배가 집 앞에서 냥줍을 했다고 어린 고양이 사진을 들이밀며 귀엽다고 말하라며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딱 그 꼴이다.재영은 조심스럽게 세원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매일 수도 없이 만지는 사람의 피부지만 달랐다. 세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굴러들어 온 건 너야.”재영은 몇 번 더 세원의 볼을 쓸고 땀이 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빗물에 핸드폰과 노트북이 다 젖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자연스럽게 사 줄 방법 있나?’세원의 옆에 다시 눕고 싶지만 이제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 재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세원이 재영의 집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 지났다. 선생님과 같은 집에 있으면 뭔가 그렇고 그런, 그러니까 영화에서나 보던 야시시한 일이 분명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룸메이트도 아니고 그냥 세원의 1인 자취방 수준이다. 선생님에게 집은 잠만 자는 방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는 집 자체를 잘 오지를 않는다. 병원에서 자는 건가? 세원은 재영에게 물어보고 싶었다.[선생님 왜 안 오세요? 오늘 늦으세요?] (어제) 오후 10:47방과 후 눈치껏 장을 봐놓고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리던 세원은 결국 기다리다 못해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요새는 병원에서도 선생님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당직. 왜?] 오후 11:21[늦었는데 안 오시길래요. 근데 당직이면 아침에 오세용?] 오후 11:23[아니, 내일 근무하고.] (오늘) 00:01[선생님 혹시 제가 선생님 집에 있어서 저 꼴 보기
재영은 다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세원은 재영의 한숨을 거부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연했다. 대학생이나 됐는데 악몽을 꾸었다고 혼자 못 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원도 재영의 당황스러운 반응이 이해가 갔다.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반응 없는 태도에 괜히 잘 자는 사람 깨웠다는 미안함이 들어 세원은 재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몸을 돌려 얼른 방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너… 들어와.”재영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세원은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다시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들어와 있는데요?”“바닥에서 잘 거야? 침대로 들어오라고.”“에?”세원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가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한껏 치켜 올라간 한쪽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제야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해했나 싶어 머릿속으로 상황을 설명할 좋은 단어를 고르기 시작했다.“아니… 선생님이랑 같이 그런… 의미로 자… 자고 싶다는 게 아니고요…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다… 엥?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아 아니… 혼자 있는 게 무섭다는 말이에요! 여기에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어도요! 저는 그 사람한테 갔을 거예요! 엥? 이건 더 아닌데… 하아….”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뒤죽박죽인 문장을 내뱉는 세원이 재영의 눈에 퍽 귀여워 보였다. 대학에 와서 혹시나 남자 손을 탔을까 걱정했는데 세원은 여전히 남자를 모르는 숙맥이었다.재영은 입가에 생기는 미소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더더욱 차갑게 말했다.“그래서 들어올 거야? 말 거야.”“가… 가요.”세원은 재영의 눈치를 살살 보며 천천히 그가 누워 있는 침대의 반대 방향으로 올라갔다. 세원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도 넓은 침대는 약간 꿀렁였다.그에게서 멀찍이 자리 잡고 관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정 자세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눕자, 그의 무심한 말이 들려왔다.“조용히 자.”“넹.”재영에게 대답만 잘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