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좋아해요! 좋아한다고!!" 몇 년을 따라다녀도 꿈쩍하지 않던 은재영. 그가 어느 날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세원은 결심했다. 놓아주기로. 그를 위해서. 나만 아프면. 나만 힘들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겠지? 선생님....안녕....
View More‘보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이코노미 좌석에서 세원은 창가에 고개를 기대고 조용히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 우연히 본 앞 좌석에 앉은 남자가 선생님과 너무나 비슷해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바람에, 가슴 한구석에 밀어 넣어놓고 겨우겨우 잊고 살았던 그때의 추억들이 원치 않게 꿈틀꿈틀 기어 올라왔다.
그는 언제나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원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때에도 그랬다. 피로감이 가장 친한 친구요, 과로는 그보다 더 가까운 베프 같았다. 또 밥을 많이 먹으면 몸이 둔해져 민첩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없다고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쉐이크를 타서 마시고, 단 건 질색해서 당도가 높은 과일은 먹지 않았다. 정말 지독하게 짧은 입이었다. 이런 생활 습관 탓에 그는 군살이 하나도 붙지 않았다. 평균을 훨씬 웃도는 키에 마른 몸매라 오고 가는 사람이 많은 병원이라고 해도 멀리서부터 그를 온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세원은 원래 오랫동안 그를 차가운 인간으로 평가했었지만, 그의 사람이 된 이후에는 달랐다. 그는 타인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언제나 잠이 부족한 자신이었지만 고작 여덟 시간만 자서 피곤하다는 세원의 엄살을 다 받아 주었다.
분명 그를 많이 좋아했다. 성격은 너무나 달랐지만 달라서 좋았다. 그가 가진 신중하고 이성적인 면은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그를 얻는 것은 세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년을 넘게 매달려 그를 쟁취했다. 그런데….
조여 오는 답답한 기분을 참을 수 없어진 세원은 그에 대한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지던 바다 멀리 이내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안전 벨트를 잘 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1년 반 만에 세원은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목 : 나 임도현이다]
[내용 : 너한테 전화했더니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라. 파견인지 뭔지 간다고 하더니 갔냐? 잘 갔다. 존나 부럽다. 누구는 병원에서 이렇게 삽질하는데 누구는 중국 가서 짜장면 먹고 중국 남자 만나겠네? 거기 우리나라 인구만큼 부자가 많다며 그중에 하나 잡으면 너 신세 피겠군ㅋ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 자식이랑 좀 깔끔하게 끝내고 가지 그랬냐? 내가 남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는 거 너도 알 거 아니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 다 떨어진 거 알겠는데 은재영한테 전화 한 통만 해줘. 그래야 쟤도 마음 접을 거 아니야. 하여튼 너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메일이라도 보낸다. 잘 지내고 올 때 오빠 거 선물 사 와라! 술은 빼갈이지.]
삐비빅. 삐비빅.요란하게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기계처럼 일어나 재영이 핸드폰 액정을 껐다. 4시. 언제나처럼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다 어제 새벽 일이 기억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거기엔 아직 세원이 있었다. 완전히 잠에 빠진 얼굴로.“악몽 꿔서 잠 못 잔다더니.”남은 잠 못 자게 뒤흔들어 놓고는, 자기 집처럼 퍼져서 쿨쿨 잠에 빠진 세원이 밉고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옛날 언젠가 본과 후배가 집 앞에서 냥줍을 했다고 어린 고양이 사진을 들이밀며 귀엽다고 말하라며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딱 그 꼴이다.재영은 조심스럽게 세원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매일 수도 없이 만지는 사람의 피부지만 달랐다. 세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굴러들어 온 건 너야.”재영은 몇 번 더 세원의 볼을 쓸고 땀이 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빗물에 핸드폰과 노트북이 다 젖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자연스럽게 사 줄 방법 있나?’세원의 옆에 다시 눕고 싶지만 이제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 재영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세원이 재영의 집에서 지낸 지도 며칠이 지났다. 선생님과 같은 집에 있으면 뭔가 그렇고 그런, 그러니까 영화에서나 보던 야시시한 일이 분명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룸메이트도 아니고 그냥 세원의 1인 자취방 수준이다. 선생님에게 집은 잠만 자는 방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는 집 자체를 잘 오지를 않는다. 병원에서 자는 건가? 세원은 재영에게 물어보고 싶었다.[선생님 왜 안 오세요? 오늘 늦으세요?] (어제) 오후 10:47방과 후 눈치껏 장을 봐놓고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리던 세원은 결국 기다리다 못해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요새는 병원에서도 선생님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당직. 왜?] 오후 11:21[늦었는데 안 오시길래요. 근데 당직이면 아침에 오세용?] 오후 11:23[아니, 내일 근무하고.] (오늘) 00:01[선생님 혹시 제가 선생님 집에 있어서 저 꼴 보기
재영은 다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세원은 재영의 한숨을 거부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연했다. 대학생이나 됐는데 악몽을 꾸었다고 혼자 못 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원도 재영의 당황스러운 반응이 이해가 갔다.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반응 없는 태도에 괜히 잘 자는 사람 깨웠다는 미안함이 들어 세원은 재영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몸을 돌려 얼른 방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너… 들어와.”재영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세원은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다시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들어와 있는데요?”“바닥에서 잘 거야? 침대로 들어오라고.”“에?”세원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가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 한껏 치켜 올라간 한쪽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제야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해했나 싶어 머릿속으로 상황을 설명할 좋은 단어를 고르기 시작했다.“아니… 선생님이랑 같이 그런… 의미로 자… 자고 싶다는 게 아니고요…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다… 엥?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아 아니… 혼자 있는 게 무섭다는 말이에요! 여기에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어도요! 저는 그 사람한테 갔을 거예요! 엥? 이건 더 아닌데… 하아….”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뒤죽박죽인 문장을 내뱉는 세원이 재영의 눈에 퍽 귀여워 보였다. 대학에 와서 혹시나 남자 손을 탔을까 걱정했는데 세원은 여전히 남자를 모르는 숙맥이었다.재영은 입가에 생기는 미소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더더욱 차갑게 말했다.“그래서 들어올 거야? 말 거야.”“가… 가요.”세원은 재영의 눈치를 살살 보며 천천히 그가 누워 있는 침대의 반대 방향으로 올라갔다. 세원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도 넓은 침대는 약간 꿀렁였다.그에게서 멀찍이 자리 잡고 관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정 자세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눕자, 그의 무심한 말이 들려왔다.“조용히 자.”“넹.”재영에게 대답만 잘한 후
찰싹찰싹 파도치는 소리에 세원이 눈을 뜨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뭐야…?’눈앞에 보이는 이질적인 풍경에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은 바닥이 다 보일 것처럼 투명하고 파란 바다 위에서 커다란 튜브를 타고 있었다.‘사람들은 어디 있지?’주위를 둘러봐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 모래사장도, 해안선을 따라 즐비한 불빛들도,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과 바다뿐이었다. 이상했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바다와 자신뿐인 이 상황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세원은 일렁이는 파도를 침대 삼아 부드러운 몸짓으로 큼직한 튜브에 몸을 맡겼다.‘역시 이런 게 삶이지… 지금까지는 너무.’쿠와앙.달콤한 휴식을 깨우는 커다란 엔진 소리에 찡그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저 멀리서 고장 난 것같이 비틀대는 비행기의 형체가 보였다. 술에 취해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 꼬리 부분에서 작게 연기가 나는 것 같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마가 비행기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놀라 얼어붙은 세원은 비행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며 불길에 휩싸인 비행기는 점점 더 세원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튜브에서 내려와 그녀는 비행기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끙끙대며 움직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커다랗고 시뻘건 비행기는 이제 더 큰 굉음을 내며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쿠와아아아아.’지구 종말의 날에 울려 퍼질 듯한 소리에 동공이 커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렇게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행기는 세원의 머리 위를 지나쳐 수면 위로 부딪혔다.어떻게 된 일이지?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이 만신창이가 된 기체에 부딪힌 바다가 집채만 한 파도를 내뱉었고 먹잇감을 삼키는 악어의 입처럼 세원을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다.“으악!”파도가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렸을 때, 눈이 확 떠지며 현실로 돌아왔다.‘꿈이었어… 하… 다행이야… 꿈이
“야.”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세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오전에 세원은 선생님의 집에 왔다는 벅찬 감정에 잠이 안 와서 한참 동안 눈을 뜨고 있다가 해가 중천에 뜬 걸 보고 겨우겨우 눈을 감았다. 오늘 같은 날 잠이 올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바깥이 어두우니 아마 깊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누구야?”비몽사몽간에 세원이 대답했다.“집주인.”그가 왔다는 소리에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선생님이에요?”앉긴 앉았는데 너무 피곤해 눈을 뜨지도 못하고 찡그리며 세원이 물었다.“너… 왜 안방에서 자고 있어? 침대는 작은 방에도 있는데… 아, 일단 불 좀.”세원이 깬 걸 확인한 후 재영은 조심스럽게 안방의 불을 켜고 겉옷을 벗었다. 불을 켜자 눈이 부신 듯 표정을 더 찡그리더니 아기처럼 투덜거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몸짓이 귀엽다고 느껴져 재영은 옅게 웃었다.우산을 쓰고 왔는데도 비가 많이 와서 겉옷에 빗물이 많이 묻었다. 재영은 화장실에서 탈탈 털고 옷걸이에 걸어 에어드레서에 넣었다.“신생아 수준으로 자. 밥 먹었어?”침대로 가서 앉은 재영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세원에게 물었다.“지금 일어났는데…….”세원은 이불 밖으로 졸린 눈만 빼꼼 내놓았다.“집에 먹을 게 없을 텐데 어떡할래?”그의 말에도 세원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재영만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재영이 나지막이 세원에게 말했다.“왜.”“선생님 갑자기… 왜 이렇게 자상해요?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잘해 줘도 난리네.”그 말을 듣고 잠도 덜 깬 얼굴로 할 말이 있는지 세원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베개에 눌렸는지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눈은 다 졸렸는데 입만 살아 있었다.“흠흠… 아, 목소리가… 있잖아요, 들어 봐요? 지난번에 근로 장학 붙었다고 문자 보내니까 장장 48시간 만에 ㅊㅋ 이렇게 답장한 거 나 기억하는데… 그리고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도 안 받아 줬잖아요! 그리고! 또! 아, 샘 이달의 직원으로 뽑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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