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교위가 와서 사망인수는 356명이고 부상인수는 1732명이라는 전투 사상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모두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궁수들은 현재 성을 지키는 입장이라 모두 성벽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에, 사국인들이 사닥다리를 치고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대규모로 성을 공격하지 않았고, 그저 병력과 군심의 응집력을 시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국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상대방의 심리를 잘 알아서 바로 대군이 쳐들어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강군의 투지가 아무리 약해도 생사를 겨루게 되면 반드시 최강의 실력을 가지고 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런 탐색을 몇 차례 반복해서 사상자 수가 계속 늘어나게 된다면 남강군의 의지와 심리적 방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투지가 없는 상태라다시 싸워봐야 헛수고일 것이었기에 작전을 말해도 소용없었다. 군사는 담배 반 대를 다 피울정도로 고민했지만 다른 방법이 차마 생각나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해도 누구를 보낼 지 모르니 지금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내일 군사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해서 사기를 북돋아줘야겠소.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소.” 방천허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더니 먼지와 피딱지를 문질러냈는데 그건 그의 피가 아니라 오늘 그의 곁에 서 있던 병사들이 투석기에 머리를 맞아 그의 얼굴에 튄 피였다.그의 기분은 아주 나빠진 상태였다. “지금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소. 원수도 사라진 마당에 아직 누구를 임시 원수자리에 앉힐 명령도 내려오지 않았지 않소? 게다가 모두가 왕야님께서 죽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왕야께서 남강 전장에 나타나지 않는 한 전사들이 전투에 대한 사기는 계속 저조할 것이며 조정에 대한 원한은 날로 고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왕표가 탈출한 후 마음이 무너졌으니, 이길 수 없다고 믿어 전쟁터에 나가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말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연기와 먼지가 자욱하게 나 있었는데 말을 탄 사람은 따스한 햇볕에 싸여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제린과 방천허는 고개를 돌려 보더니 순간 눈 밑이 붉어지고 울컥해서 소리를 낼 수 없었다.사여묵은 갑옷을 입지 않고 평범한 백성의 옷을 입고 있어 멀리서 보면 특별한 점은 없었다.그가 말을 멈추고 사람들 앞에 서자 군사들은 그제야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현장에서 열광적이고 기쁜 외침소리가 터져 나왔다.“사 원수야, 사 원수께서 오셨어!”“사 원수께서 아직 죽지 않았다니!”“사 원수께서 계시니 우린 반드시 승리할 것이야.”“필승!군사들은 지난 전쟁의 억울함과 왕표에 대한 분노를 모두 외치려는 것 같았다.장군들은 눈 앞의 상황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왕표가 도망친 후로 그들도 이렇게 높은 사기를 본 적이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그저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큰 힘과 자신감을 줄 수 있었다.동시에 북명왕이 여기에 서 있다는 건 소문들에 대한 가장 좋은 비판이었다.하나의 소문이 헛소문으로 되자, 병사들은 다른 소문도 거짓일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여묵은 손에 있는 장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고작 이십만의 적군일 뿐이고 우리에게 패배한 군대인데, 우리 남강군이 그들을 두려워하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크게 외쳐보거라. 그들이 두렵느냐?” 그러자 병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사여묵은 말을 타고 행렬 사이를 거닐며 목소리를 높였다. “큰 소리로 말해보거라. 사국을 이길 수 있겠느냐?” 그러자 병사들이 천지가 진동할 것 같은 소리로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어디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있느냐? 있으면 나와보거라!” “없습니다.” 사여묵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굳건함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햇빛이
이때 칼국수 한 그릇을 내왔는데 사여묵의 배를 채우기엔 부족해 보였다. 그러자 제린이 사람들에게 양고기를 구우라고 시켰다. 지금의 군영은 예전과 달리 식량이 많이 있어 백성들도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여묵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릇을 들고 국물을 다 비워냈다. 국물이 짜고 맛이 강해서 그는 물 한 주전자를 마시고 나서야 체력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아직도 말 위에서 흔들리고 있어, 눈앞의 사람들이 다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그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께서도 많이 지치셨지요?” 사여묵이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군의를 불러와 내 얼굴에 침을 놓으라고 하거라. 하도 바람을 맞아 얼굴이 돌아간 것 같아.” 눈을 똑바로 떠 보니 사여묵의 얼굴은 확실히 약간 삐뚤어져 있었다. 그때 제린이 물었다. “원수께서 여기까지 오는데 조금도 휴식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 쉬겠어?” 이어서 사여묵이 중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꾀병을 부려서 몰래 전장으로 온 것이야.” 그는 허약한 손으로 한 무더기의 약을 꺼내더니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사실 꾀병을 부린 게 아니라 진짜 아팠지. 여기로 오는 길에 이 약들을 먹어야 하는데 가끔은 잊어서 먹지를 못했어. 지금이라도 먹지 않으면 송 장군이 날 때려죽일 것이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사람을 보내 군의를 불러와 왕야의 몸을 진단한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군의가 먼저 맥을 짚더니 말했다. “어찌 이렇게… 허약하십니까?” 그러자 방천허가 다급하게 물었다. “심각합니까?”군의가 말을 하지 않자 사여묵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천천히 회복하면 되니까 다들 긴장하지 말거라.”그러자 군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원기를 상했으니 아마 단기간엔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여묵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전쟁 체질인 사람이 있다. 전장에서의 사여묵은 진성에서보다 훨씬 과감했는데, 심리적으로 속박을 받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일동안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 모두 체포했다. 그들을 연병장으로 끌고 가서 곤장으로 20대 때리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들은 누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돈을 받고 소식을 퍼뜨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까지는 상관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국의 80만 대군이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문과, 북명왕이 바로 이 자리에 있으니 숙청제가 북명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역시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왕 원수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망갔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었다. 헛소문이 하나둘씩 밝혀지자 병사들은 격분해서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헛소문을 퍼뜨려 군심을 흔들었으니 당연히 때려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여묵은 차가운 눈빛으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애초에 헛소문을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반성하거라. 반성한 후엔 남은 전투에 최선을 다하고.” 군심을 흔드는 자는 적군이니, 적군의 피는 첫 전투의 패배로 인한 좌절을 씻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소문을 퍼뜨린 자를 곤장으로 때려죽인 후 사여묵은 제린에게 북명왕이 남강에 왔다는 급보를 진성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황제의 지시가 없어도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인지 물었다. 하지만 급보를 보낸 지 사흘 만에 황제의 지시가 도착했다. 사여묵은 조금 의외였지만 송석석이 한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왕표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진성으로 전해지마자 송석석이 반드시 성지를 청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제린에게 진성으로 급보를 보내라고 한 이유는 황제에게 남강군은
염 선생이 휘황실을 조사한 결과, 요 몇 달 사이에 휘황실의 하인 몇 명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염 선생은 진성의 모든 중매업에게 물어서 그들이 중매업에서 사들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떠난 사람들에겐 다른 출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관청에 달려가 노예 제도 문서를 조사했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 논의 끝에 시만자가 스스로 휘황실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우리가 노 휘왕과 오랫동안 왕래했으니 나는 그를 믿어. 만약 그가 정말 황작이라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송석석은 시만자를 혼자 보내지 않고 만두와 신신을 함께 보냈다. 만약 노 휘왕이 정말로 위협을 느꼈다고 하면,만두와 신신까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그가 시만자를 부른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송석석이 직접 그들을 휘황실까지 데려다줬는데 노 휘왕이 반갑게 마중 나오더니 친구 두 명을 더 데려왔다는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나는 시끌벅적한 것을 가장 좋아한단다.” 그러자 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내 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준다면 나야 좋지.” 노 휘왕은 즉시 주방에 오늘 밤 요리를 더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송석석도 웃으며 함께 들어갔다. 그녀는 이전에도 노 휘왕을 몇 번 보았었는데 특히 오늘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다만 그 기쁨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송석석은 점심을 먹고 다시 경위부로 돌아갔다. 시만자는 고청영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다. 휘황실의 꽃은 아주 잘 피었다. 매산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의 꽃도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청영은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며 시만자에게 황실의 곳곳을 소개해주었는데 원래는 그녀와 노 휘왕 두 명의 주인 뿐이었고, 관백이라는 집사가 한 명 있었는데 반쯤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시만자가 놀라며
시만자는 그들을 훑어보았는데 두 사람은 비록 키가 크지 않았지만 팔뚝이 유난히 굵어 보였고 목까지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 숨소리를 들어서는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였는데, 신발을 내려다보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심법을 연마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심법을 깊게 수련하면 할수록 호흡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있는데 그들의 호흡으로 봐서는 수련이 얕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을 할 줄 아느냐?” 시만자의 물음에 그들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만자는 다시 그들을 훑어보더니 갑자기 키가 작은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키가 작은 사람을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시만자는 손을 거두었고 무술을 익힌 자의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서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폭로한 셈이 되었다. 무술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군가 얼굴에 주먹을 날리면 손으로 막게 되어 있는데 그는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만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고, 몇 몇 사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곤 천천히 물러났다. 머리를 받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청영의 표정은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전처럼 담담해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모두 노 휘왕의 옥경원 옆에 배치되었다. 그곳은 장미가 가득한 마당이었는데 이름은 장미원이라고 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방이기 때문에 옥경원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하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고청영도 옥경원에 거주하지만 같은 방에 있지는 않았다. 원래는 장공주가 그녀를 노 휘왕에게 첩으로 보냈는데 노 휘왕은 첩이 필요 없다며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 친구로 삼았다. 그녀에게도 따로 거처가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줄곧 옥경원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몰랐는데 옥경원에 거주하고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시만자는 웃으면서 재미없다고 말하더니 만두와 신신을 만나 정보를 교류한 후 황실을 나왔다. 그녀는 황실에서 나오자마자 경위부로 가서 송석석을 찾았다. 송석석은 그녀를 보자마자 관아로 끌고 가서 조용히 물었다. “어때? 뭐 좀 알아냈어?” 그러자 시만자가 휘황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순찰하는 것 같았는데 날만 밝으면 그 사람들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어져. 내가 황실의 많은 정원을 관찰해 보았는데 확실히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어. 하인들의 침대 수량도 고청영이 말한 하인 숫자와 일치하고.” 송석석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혹시 땅굴이나 암실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 밤이 되면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어. 게다가 밤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잘 수는 없으니 네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휘황실에 거주하고 있을 거야.”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하지만 만약 땅굴이나 암실이 있다면 조사하기 더욱 어려워질 거야.” 그녀는 순간 만두가 주방 상황을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만두가 주방에도 수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군.” 송석석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이 음식들을 어디로 보내는지 눈여겨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네.” 시만자는 송석석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급해서 그 점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건 만두가 지켜보고 있을 거야. 만두가 지금 얼마나 믿음직한지 넌 모를 거야.”친구들이 모두 성장한 것 같자 송석석은 정말로 기뻤다. “노휘왕과 고청영에게는 다른 문제 없었어?” “없는 것 같았어. 어제 우리가 정원을 구경할 때 다섯 명의 남자가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모두 무공을 익힌 사람들 같아 보였어. 그래서 고청영에게 물어보니 왕야님이 우릴 보호해 주려고 파견해 온 사람들이라고 하더군.” “그 다섯 사람들은 뒷 채에 거주하던가?” “맞아.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 그 다섯 명 외에는 이상한
숙청제와 평무종의 조사 결과는 같았는데 영군왕은 봉지를 떠난 적이 없었고 거의 매일같이 처자를 데리고 연극을 보러 다녔다. 영주에 있는 자유원이 몇 곳도 모두 그가 설립한 것이었다. 그곳은 그가 고아들과 의지할 곳이 없는 노약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었는데 그는 대부분 곡을 들은 후엔 자유원에 가곤 했다. 하지만 평무종은 숙청제가 찾지 못한 한 가지 정보를 찾아냈다. 바로 영군왕이 시 씨 가문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7~8년 전의 일이었다. 시만자의 아버지가 가주가 되기 전에 목장에 순찰하러 갔다가 습격을 당했는데 마침 영군왕이 사람을 데리고 지나가다 그를 구해준 것이었다. 영군왕은 사람이 겸손한 데다 시 씨 가문과 왕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 씨 가주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고 보답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함께 습격을 당한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시 씨 가문의 가주와 심복인 마삼만이 목숨을 건졌다. 평무종도 마침 마삼이 화물을 호송하다가 도적떼의 습격을 당했을 때 그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에 그가 알려준 것이었다. 평무종의 편지가 전해온 후 송석석이 시만자에게 묻자 시만자는 오히려 아연실색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몰랐는데.” 7~8년 전이면 시만자가 매산에 있을 때였기에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시만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아버지한테 편지라도 쓸까…?” ‘아버지께 그가 생명의 은인이니깐 만약 그가 황작이라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지 않을까?’ 전에도 여러 번 시 씨 가문에 연루되었지만 시만자는 아버지가 조정에 충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황궁의 상인으로서 조정을 위해 군마를 키우고 병부의 무기를 주조하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 역적을 도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생명의 은인이라면 장담하기 어려웠다.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도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는 도리는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