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신신이 관백을 공격해서 무술 실력을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안하자 시만자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그건 안 돼.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게 더 나아. 상대방이 눈치라도 채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거야. 내일 아침 바로 이곳을 떠나서 석석이와 염 선생한테 얘기해줘야 돼.”“우리가 과연 무사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만두가 의미심장하게 묻자 모신신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휘왕이 우리를 이곳에 가둘 수도 있다는 말이야? 조금 전에 휘왕이 분명 우리에게 가도 된다고 했잖아...”“휘왕이 왜 만자를 이곳에 불렀는지, 다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시만자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에도 송석석과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제 보니 구조 신호는 아닌 것 같고 그럼 휘왕은 그들을 가두려고 하는 걸까?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휘왕의 행동으로 보면 뭔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왕야와 관백이 한통속이 아닌 게 아닐까?”그러자 시만자는 순간 휘왕 저택에 있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관백은 늘 휘왕 곁에 있었지만 그 존재가 눈에 띄지 않았다.‘설마 관백 그자가 위장술을 쓴 건가? 관백이 바로 영군왕인 건가?’하지만 시만자는 자신의 추측까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 얘기하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시만자는 이곳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관백의 무술 실력이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매우 강하다면 세 사람이 합쳐도 관백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그럼 오늘밤 우리 셋이서 같이 자자. 혹시 모르잖아.”모신신이 만두와 시만자의 팔을 잡으며 말했고 이내 세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다.만두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고 모신신과 시만자는 침대에 꼭 붙어있었다.“너희들은 자.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만두의 말에 모신신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지금 상황이 우리한테 위험하다면, 왜 오늘밤엔 몰래 도망가지 않는 거야?”“저녁
휘왕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는데, 긴 기럭지에 건장한 몸매를 자랑하는 영군왕은 관백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아들이 부왕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수로 공사로 잘 마무리 지을 것이고 죄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도 않겠습니다. 진성 백성들을 다치게 하지도 않고 근처 마을에도 피해를 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부왕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천하를 얻으면 부왕은 반드시 황제가 되실 겁니다.”영군왕의 말에 휘왕이 코웃음을 쳤다.“아주 대단한 효자구나.”“아들이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부왕을 황제의 자리로 올리겠다고요. 부왕이 이 나라의 황제가 되면 저희는 더 이상 사국의 협박을 받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변경을 위해 서경과 대치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백성들과 우리 상국은 태평 성세를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휘왕이 침을 툭 뱉으며 대꾸했다.“사국 서경과 손잡은 역적 주제에 대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한 말을 할 수 있는 게냐? 듣기만 해도 역겨워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구나.”“그건 그저 이 나라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부왕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그 적들을 확실하게 물리칠 것입니다!”휘왕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뻔뻔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도대체 어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지? 내가 어쩌다가 저런 악마 같은 놈을 낳았단 말이냐…’남강이 얼마나 힘들게 이 나라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장군과 병사들의 뼈와 살이 그 땅에 묻혔는데 영군왕은 지금 그 땅을 적들에게 그냥 내어주려고 한다.남강이 사국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돌려받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영군왕에게 있어서 국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는 건 그저 황제 자리 뿐이었다.“너만 역적인 것이지, 여기저기 내 이름까지 팔 생각은 하지도 마. 백성들은 결국 나를 욕하고 나에게 손가락질할 거야. 난 역사에 길이 남은 역적이고 넌 효자라
휘왕은 바닥에 깨진 찻잔 조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비록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그 조각으로 손목을 긋기에는 충분했다.휘왕이 바닥에서 찻잔 조각을 하나 주워 손목에 댄 순간, 누군가가 휘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왕야, 그러다가 다치실 수도 있으십니다!”손목이 꽉 잡힌 휘왕은 순식간에 찻잔 조각을 빼앗겼고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그 사람은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도 여전히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이 저택에 이런 사람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것인지, 이자들 모두 실력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내공이 깊고 암살에 능한 사람들이었기에 휘왕은 어디로 가든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압박감이 느껴졌다.심지어는 시만자 일행과 함께 가도 마찬가지였다.휘왕은 시만자 일행도 이자들의 존재를 발견해주기를 바랐지만, 공기 마냥 여기저기 곳곳에 다녔던 탓에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휘왕은 퍼렇게 멍이 든 자신의 손목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결정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았다.다음날이 되자마자, 시만자 일행은 휘왕 저택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시만자는 저택 사람들 모두와 작별 인사를 했다.휘왕과 고청영에게 인사를 하고 정삼숙한테까지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관백 앞에 섰다.“저희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제일 고생한 분이 관백이시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주시고 여기저기 데리고 돌아다니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왕야와 여러분들을 모시고 왕경루에 가서 거하게 한 턱 쏘겠습니다.”그러자 허리를 살짝 굽힌 관백이 자상하고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괜히 저희에게 돈을 쓸 필요 없습니다.”“돈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관백은 환하게 웃으며 시만자 일행을 저택 대문 밖까지 바래다 주었다.시만자는 고개를 돌려 휘왕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입을 꾹 다문 채
한편, 매산 만종문에서.며칠 전부터 임양운은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했지만 무소위는 오늘이 아니라고 했다.하지만 생일이 맞든 아니든 큰 상관은 없었다. 임양운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하고 싶다는 말에 무소위가 며칠 전부터 매산의 각 파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총 30석 정도 초대했기 때문이다.무소위가 직접 임양운의 생일 잔치를 준비했는데, 그가 평소에도 만종문의 일들을 친히 처리한 덕분에 고생하는 건 괜찮았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임양운이 초대장에 절대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말라고 명확하게 적었고 무소위는 사형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만종문에 돈이 많은 게 사실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함부로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다른 종파의 잔치에 참석할 때마다 단 한번도 빈손으로 간 적이 없는데 그만큼의 선물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상하기도 했다. 평소에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임양운인데 이번에는 잔치를 크게 벌였을 뿐만 아니라 취기가 조금 오르자 경화파 장문인의 손을 덥석 잡고는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내일 제가 진성에 다녀올 건데 저랑 같이 가지 않으실 겁니까? 가서 몽동이랑 아라도 좀 보고. 경화파 제자들도 데리고 저와 함께 다녀옵시다!”그러자 경화파 장문인이 슬쩍 손을 빼더니 젓가락을 들고 반찬을 집으며 대답했다.“경비가 부족합니다.”“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경비는 당연히 제가 다 책임집니다. 왕경루 아시죠? 저희 집에서 차린 건데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시켜셔도 되고, 원하시는 만큼 지내셔도 됩니다. 절대 다른 손님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경화파 장문인이 입에 음식을 씹고 있었기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고 말을 하려고 했을 때에 임양운은 이미 돌아서서 떠났다.돌아선 임양운은 바로 적염문 장문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쪽 제자 시만자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보고 싶지도
만종문은 제자를 받는 기준이 엄격하여 임양운의 정식 제자는 많지 않았다. 이미 사문을 떠난 제자를 포함해도 총 15명뿐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떠난 제자들 모두 사문을 배반한 것이 아닌,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임양운은 고지식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제자들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했다. 단 전제가 있었는데, 이는 백성과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며칠 전, 그는 사문을 떠난 제자들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이 제자들은 현재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부가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진성으로 달려가 소사매를 돕기로 했다.만종문에는 다른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단순히 제자라고만 불릴 뿐, 임양운이 몸소 가르친 제자는 아니었다. 임양운이 아주 가끔씩 그들을 지도하긴 했지만, 이들의 주된 지도는 만종문의 두 명의 무술 장로들이 담당했다. 때로는 임양운의 직계 제자들이 지도하기도 했다.이들의 실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평소에 잡일도 도맡아 해야 하므로 무술에만 몰두할 수 없었기에 임양운의 직계 제자들의 실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하지만 임양운이 필요한 것은 정예 병력이기 때문에 이번 일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생신연회를 가장하여 각 문파의 장문인까지 초청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체면을 세워준 이상 그 정을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한다. 무림인들은 뜨거운 의리로 의기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들이기에, 받은 은혜를 가볍게 흘려보내는 법이 없었다.무소위가 그에게 물었다.“사형, 조정의 일엔 관심도 없으시면서 왜 이번에는 이렇게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움직이십니까? 송석석과 현갑군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임양운은 무기고에 앞에 서서 손에 맞는 무기를 고르며 말했다.“네가 만약 영군왕이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무소위가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겠지요?”“시기도 기다려야 하지.”임양운은 말하면서 부채를 하나 골라 들었
송석석은 며칠 동안 의논에 참석하며 승상이 했었던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의견이 제각각이고, 모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탓에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찬반이 몇 번이고 오갔지만, 일의 방향은 여전히 명확해지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순간 자신이 더는 이 의논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 여러 의견에 휘말리다 보니,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황제의 병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계속 기침을 하며 억지로 정신을 버티는 상황이었는데, 일부는 이런 상황을 틈타 태자를 책봉하자는 주장을 펼쳤다.이 말을 꺼낸 이들은 제상서의 문생으로, 젊은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황후가 포섭했던 인물들로, 태자 책봉을 위해 힘쓰기로 했었는데, 황제의 병이 악화되고 내우외환이 겹친 틈을 타 후계 문제를 조속히 확정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제상서는 화가 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어전에서 극히 반대했으나,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퇴로를 확보하려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이 일로 인해 숙청제는 또다시 분노를 참지 못해 피를 토할 정도로 격노하자, 조정은 모두 난감해하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그래서 송석석은 훈련을 핑계 삼아 논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곤 돌아가 이 일을 염선생과 대사형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염선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황후는 금족 중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파란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시기에 그러한행동을 벌이다니, 이는 자신과 제씨 가문을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제씨 가문과 황후가 어떻든, 송석석은 둘다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조정의 문무 백관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있었는데 이 일이 그 흐름을 끊어버리고 만 것이다.이때 심청화가 입을 열었다.“나는 오히려 이번 태자 책봉 문제를 꺼낸 것이 영군왕의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황후가 포섭한 사람들이 사실 영군왕의 사람
한편, 영주 쪽에서 가짜 영군왕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본래 영군왕과 외모가 닮은 일반 백성일 뿐이었는데, 영군왕의 눈에 들은 후 그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배우도록 훈련받았었다. 그렇게 영군왕이 영주를 떠난 후, 그는 영군왕의 분신이 되어 그가 자주 가던 곳에 가서 대신 모습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이전 조사에서 사람들이 영군왕이 봉지를 거의 떠나지 않는다고 여겼었던 것이다. “그 자를 제압했느냐?”송석석이 급히 물었다.“안심하십시오. 이미 붙잡아갔습니다.” 염선생이 답하자 송석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군. 영주에는 더 이상 영군왕이 나타나선 안 돼. 이제야 영군왕의 속내를 알겠어. 그는 관백의 신분으로 숨어서 모든 지령을 휘황실에서 내렸지. 그래서 모두가 휘왕을 역적이라고 여긴 거야. 그는 줄곧 영주에 머물렀으니, 역모를 꾀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염선생이 말했다.“맞습니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휘왕에게 돌아갈 테이니, 그는 대의를 위해 친족을 죽이는 것처럼 휘왕을 처단하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공하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들어오겠지요.”그러자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 “추몽은 지금 영주에 있나?”염선생이 답했다.“아뇨, 추측하건데 그는 이미 연왕의 대부분의 세력을 인수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미 방시원에게 연왕이 투항하더라도 결코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며 혹시 모를 속임수에 대비하라고 전했습니다.”송석석은 추몽이 간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다. 방시원이 그를 대적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해이 들어 염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면 선생이 직접 방 장군을 도와주러 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건… 안됩니다.”염선생은 단칼에 거절하며 곧이어 말을 덧붙였다.“연주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설령 추몽이 연왕을 위협해 거짓 항복을 시도하더라도 방시원은 이미 준비를 했을 겁니다. 그는 쉽게 속지 않을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그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 뒤, 마침 또 다른 상단이 도착했다. 필명은 그들도 철저히 검사했고, 똑같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들여보냈다.하지만 곧이어 필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상단이 그들을 쫓아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중 한 명의 뒷모습이 매우 익숙했는데, 마치 만종문의 그 사숙과도 같게 느껴졌다.그 사숙은 무소위라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뒷모습만 닮았을 뿐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다.그래도 이 상단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필명은 몇 사람을 시켜 그들의 뒤를 쫓아 이상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그들이 동란 거리에 있는 한 저택에 머물렀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지역 일대는 전부 권력자와 훈작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아무리 부유한 상인이라 해도 쉽게 그곳에 저택을 구입할 수 없었다.결국 필명은 사람을 더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들이 묵고 있는 집은 과거 이성왕의 저택으로,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 저택의 소유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했다.무엇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이미 복잡해져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매일같이 사람들을 조사하느라 어떤 정보든 다 머리에 담고 있었던 탓에, 필명의 머릿속은 마치 복잡한 실타래같이 뒤엉켜 있었다. "그 저택은 휘황실과 인접해 있습니다."이때 부하가 보고했고, 이 말을 들은 필명의 눈빛이 즉시 날카로워졌다."그럼 감시를 강화하거나, 직접 방문해 조사해 보도록 하지."송대감께서 말씀하시기를, 휘황실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철저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밤이 되어서야 조사를 마친 후 보고가 올라왔다. 그들은 과거 이성왕의 후손으로, 세습된 왕위가 박탈된 뒤 줄곧 외지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최근의 전란을 피해 잠시 숨기 위해 진성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내용이었다.필명은 순간 상단이 운반하던 물품을 떠올렸다. 모두 비단과 보물 같은 귀중품들이었기에, 그들이 값비싼 물건을 챙겨 진성으로 피
시만자는 그제야 송석석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 부인이 사람을 데리고 왕 씨 저택으로 가서 추태를 부렸으니, 당연히 사죄도 왕 씨 저택으로 가서 해야한다. 이렇게 소 세자의 일로 약점을 잡고 있으면 지아가 시집을 가더라도 감히 박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아에게는 이제 후원자도 있고 소 씨 가문의 약점도 쥔 셈이 되었다. 하시만 시만자는 오늘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일 뿐, 소 부인을 상대하러 온 것이니 쉽게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필명 등 인이 모두 떠난 후에야 소 부인에게 말했다. “안백작부가 명망가라니, 정말 뻔뻔하군요. 어느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이 양첩을 유괴하고 다른 가문으로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겠어요? 오늘 원래는 당신들의 가면을 모두 뜯어내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민이 진심으로 지아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두 아이가 민망해할까 봐 참았습니다. 하지만 지아가 당한 억울함을 계속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키운 아이가 당신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볼 순 없습니다. 당신이 백작부를 믿고 작위가 없는 왕 씨 가문을 괴롭혔으니, 다른 이가 같은 방식으로 갚아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작 백작부 따위, 내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소 세자가 고주의 용서를 빌든 말든 내 알바 아니지만, 지아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한다면 일을 크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까지 당신들의 보귀한 작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요.” 소 부인은 시만자의 말에 얼굴이 금새 붉어졌지만, 감히 그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시만자는 진성에 오래 머물며 문제가 생기면 이치를 따지는 성향이었으나, 상대가 막무가내라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소 세자의 양첩 유괴는 사실이었고, 이미 경위부에 압송된 상태라 시만자가 이를 빌미로 소동을 일으킬 수 있음을 소 부인도 알았다. 그러자 소 부인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고, 안 백작만 계속 사죄하며 두 아이가 원래 천생연분이라고 말하며, 소 부인이 다른 사람의 헛소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