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담아둔 일이 너무 많은 탓에 덕비는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옷을 걸치고 일어나 청이와 함께 이황자의 침실로 가서 밤시중을 드는 내시를 내보내고 침대 옆에 앉아 이황자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황자는 악몽을 꾸었는지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의 공포를 느낄 수가 있었다. 덕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마음속으로 노여움이 일었다. ‘종개? 태부가 이황자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다니. 그에게 인심을 품고 다투지도 빼앗지도 말라는 뜻이야 뭐야? 왜 그래야 되는데? 우리 아들이 적장자가 아닌 것 빼면 대황자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내가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빼앗지 않으면 살 길이 없어서 그런 거야. 황후가 마음이 좁고 극도로 이기적이어서 조금의 위협도 용납할 수 없지. 그런데 우리 아들이 어리석다면 그만인데 하필이면 천성이 총명해서 세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 어떡하냐고. 침대 옆까지 왔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가 있어? 대황자가 지금 예전처럼 교활하고 악랄하지 않다고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대체 누가 알겠어? 그들 모자는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어. 빼앗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거야. 그러니 내일 반드시 이겨야 해!’ 덕비는 자신의 계획이 치밀하니, 대황자와 수빈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렇게 반 시진 동안 앉아 있다가 아무 기척 없이 떠났다. 그러자 청이는 밤시중을 드는 내시를 불러들인 후 덕비를 쫓아갔다. “마마,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주무십시오.” 덕비는 망토를 당겨 얼굴을 가리고는 싸늘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오늘 밤은 불면의 밤이 될 것이다. 아마 황후도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걸? 분명 내일 대황자가 우수한 모습을 보여서 대신들의 지지를 받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이는 고개를 저었다. “황후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할 것 같습니다. 대황자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황후와 서먹서먹해졌으니까요. 황후가 자안궁으로 대황자를 만나러 갔는데 대황자가 상대해주
다음날 아침 일찍, 대황자와 서우는 기운과 자신감이 넘친 반면 이황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빛도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이황자는 어제 밤새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거나 황형의 다리가 부러져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어제 묶여 있던 내시가 한 말도 꿈속에서 반복되었다. 꿈에서든 깨어 있을 때든 그는 두려워서 온몸을 끊임없이 떨었다. 덕비는 청이를 데리고 와서 이황자에게 직접 옷을 갈아입힌 후, 그의 귀에 오늘 해야 할 일을 반복하고 대황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작게 위로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덕비는 계속해서 권력의 좋은 점을 말하며 권력을 얻으면 상국을 맑고 평안하게 다스려 천고의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덕비는 자신의 아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야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태후가 일부러 그들을 모아서 함께 놀고, 공부하고, 무술을 익히며 형재애를 키워서 그런 것이었다. 아이들은 감정을 중시하기에, 그런 계략에 창창한 미래를 저버린다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덕비와 청이가 함께 설득하자 이황자의 눈빛이 점점 굳어졌다. 그들은 옷차림을 단정히 한 후에 손을 맞잡고 문을 나섰다. 숙청제는 날이 밝기도 전에 조정의 문무들을 데리고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궁비와 황자, 공주들의 행렬이 도착했을 때, 그들도 모두 도착했다. 황실의 정원은 도처에 붉게 물들어 있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숙청제는 오늘 아주 기뻤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그는 아마도 몇 년 더 살 수 있도록 빌었을 것이다. 심지어 국사는 점을 치며 숙청제에게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의 말과 단신의의 치료에 그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그는 황자와 공주들을 모두 불러들여 먼저 생신 축복을 받고 그들에게 상을 내렸다. 오늘 태후께서는 오지 않으셨기에, 날씨가 추워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황제는 궁을 나가기 전에 태후에게 찾아가 절을 올렸다.
마구간의 말들은 이미 검사를 마친 상태라, 먹이도 먹었다. 네 명의 아이들은 재잘재잘거리며, 각자 자신의 말을 어루만졌다. 삼황자는 어머니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은 듯 환하고 활기찬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오늘 수빈도 따라왔다. 후궁에서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지 대외적으로 그녀는 여전히 삼황자의 모비이고 존귀한 수빈마마였다. 오히려 복소의가 몸이 좋지 않아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을 끌고 나가서 산책하려고 했다. 삼황자는 원래 혼자 올라탈 수 없었는데 다시 시도해 보니 뜻밖에도 순조롭게 말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는 기뻐서 소리쳤다. “대황형, 이황형, 서우 형. 나 좀 봐, 나 혼자 올라탔다고!” 그러자 모두 그의 득의양양한 태도를 보고 웃으며 연신 그가 대단하다며 칭찬해주었다. 이황자는 소매를 움켜쥐고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 말이 작아서 그런 거잖아. 우리 말을 한 번씩 다 타봐야 능력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러자 삼황자는 자존심이 긁힌듯 말 위에서 내려와 서우의 말에게 다가갔다. 사실 네 필의 말이 비슷해 보였지만 대황자와 서우의 말이 조금 더 높았다. 다만 다른 말들은 삼황자와 익숙하지 않아 약간 저항했다. 삼황자는 지지 않고 몇 번 시도한 끝에 결국 서우의 말에 올라탔다. 그는 신나서 고삐를 잡고 소리쳤다. “이것 봐. 서우 형의 말도 나랑 친해서 올라탈 수 있어.”말은 달가닥 달가닥 거리며 제자리에서 돌아다녔다. 사실 말은 여전히 삼황자를 저항했다. 서우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황급히 말했다.“그래, 너 대단하다. 그러니까 어서 내려와.”그가 앞으로 손을 뻗어 삼황자를 끌어안았다.삼황자는 다른 말들도 모두 시험해 보았는데 마지막으로 올라탄 게 대황자의 말이었다. 그는 기뻐서 이황자에게 소리쳤다.“이황형, 이제 날 인정해주는 거야?”이황자가 그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래, 우리 삼황자가 참 대단하네.”그는 삼황자를 안고 내려올 때 힘이 모자라 두세 번
송석석은 오늘 특별히 바빴는데, 한동안 바삐 움직이더니 지금은 사람들을 데리고 마장에 나타나서 사방에 경계를 쳤다.승마 경기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많은 무장들과 명문가 자제들이 말을 끌고 경기장 밖에서 기다렸다.승마 경기는 복잡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세 바퀴를 도는데 각 바퀴마다 두 자 높이의 난간이 있었다. 경주자는 난간을 뛰어넘기 위해 말을 세워야 하며 난간을 넘어뜨릴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세 바퀴를 완주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었다.사실 이건 승마 경기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마술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두 자 높이의 장애물을 넘는 건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난간을 두 자 높이로 설정한 건 세 황자를 위해서였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대황자와 이황자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삼황자는 반드시 경기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기에, 설령 참가하더라도 송석석이 사람을 파견해 말을 끌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경기 일정에 따르면 세 황자는 모든 참가자가 경기를 마친 후에야 경기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건 숙청제가 그들을 위해 배치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대기 구역에서 기다리며 진정한 경마 선수들이 그들을 위해 앞장서는 것을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들은 말들이 뛰는 모습을 보며, 긴장되고 기대되며 흥분하기까지 해서 즉시 말을 타고 달리고 싶을 것이었다.긴장감과 자극도 그들의 경험 중 하나이니 그들은 이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을 것이었다.숙청제와 대신들은 이미 높은 관람석에 앉아 있었고 위치가 좋아서 마장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한편, 사여묵과 목 승상은 숙청제의 양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후궁의 빈비는 황후가 이끌고 오른쪽에 앉아 숙청제와 대신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마당에는 큰 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큰 북의 선반 위에는 붉은 비단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방시원과 주 장군도 각각 큰 북의 좌우에 서서 심사를 보았다. 송석석도 경기장 안에 서 있었는데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마침 숙청제와 마주한 위치였다. 자객
송석석은 먼지를 한 입 먹었다. 모래장은 풀밭과 달라서 하늘 가득 퍼지는 먼지 외에는 전혀 볼거리가 없었다. 심지어 경기장 내에 있어도 누가 1등인지 볼 수 없었지만, 진청 장군의 막내아들인 진소인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난간을 넘을 때 진소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다른 말들보다 빨리 달려 이미 격차를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경마 대결은 정식적인 것이 아닌, 단지 황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1등을 해도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너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면 황자들이 긴장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쫓아가지 않았다. 세 번째 바퀴가 되었을 때 서우와 세 황자도 말을 끌고 앞으로 나가 대기를 했다. 경기장의 대결이 끝나면 그들이 말을 타고 뛰어들어갈 수 있었다. 삼황자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는데 그의 얼굴엔 제법 위엄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고삐를 잡고 몸을 앞으로 숙여 말과 대화를 했다. 이때 서우와 이황자도 각각 말에 오른 후 대황자를 바라보았다. 서우의 눈빛은 격려로 가득 차 있었고, 이황자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 보였는데 고삐를 잡은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대황자는 그가 긴장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이황자, 겁내지 마. 넌 나보다 훨씬 기술이 좋잖아. 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네가 왜 긴장을 해?” 하지만 이황자의 손바닥에선 여전히 땀이 났고, 매서운 모래바람이 그의 눈시울까지 붉히게 했다. 그로 인해 결국 대황형이 어떻게 말에 오르는지 보지 못했고, 깔끔하게 말 위에 올라타 안장 위로 무겁게 앉는 그의 그림자만 볼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황자가 타고 있던 말이 처량하게 울부짖더니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대황자는 급히 고삐를 잡고 사람들이 와서 살펴보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마부가 와서 말 머리에 손을 닿기도 전에 말이 울부짖더니 미친 듯이 경기장을 향해 돌진했다.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모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대황자는 심하게 땅으로 내
황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사람들을 뿌리치고 커튼 안으로 뛰어들었다.그렇게 피투성이인 아들을 본 순간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다행히 태의가 있어서 그녀를 급히 부축하여 치료해주어 바로 깨어날 수 있었다. 깨어난 황후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사여묵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끌고 미친 망아지를 가로 채 신속하게 조사를 펼쳤다.커튼 안에서 숙청제는 땅에 웅크리고 앉아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인 대황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단신의는 신속하게 침을 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지혈해야 하니 황제에게 한쪽으로 옮기라고 했다.침을 놓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고, 몸에 지니고 있던 약은 먹일 수 없어서 송석석에게 지혈산 한 병을 주며 대황자에게 먹이도록 했다. 가루약을 삼킬 수만 있다면 내장 출혈 속도를 잠시 늦출 수 있을 것이었다.단신의는 말발급이 그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데다 말에 사람의 무게를 더했으니 내장이 손상되고 출혈이 발생할 수 있었다. 만약 침을 놓지 않으면 생명의 위험이 있을 것이지만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서 치료하기 쉬운 건 아니었다.대황자의 의식이 아직 남아 있었던 덕분에 숙모의 초조한 목소리를 듣고 무언가를 삼켰다.그는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온몸이 다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나 죽는 건가…?’그는 순간 무서워졌다.그는 숙모의 말을 듣고 삼키려고 애썼지만 너무 힘들었다.힘이 없는 탓에, 입안의 쓴맛과 피비린내가 가득해서 토하고 싶었지만 토해낼 수도 없었다.그는 부황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부황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곧 죽겠다고 생각했다. ‘부황, 또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을 뜰 수가 없었다. “대황자, 정아, 자지 말고 일어나거라.” 송석석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 눈을 떠서 숙모를 보거라. 너의 부황과 모후도 여기 계시니 어서 눈을 떠보거라.” 숙청제
대황자는 황실 정원에 있는 전당으로 옮겨졌다. 지금 당장은 궁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가까운 곳에서 치료해야 했다.그리고 그의 상태가 어떤 지는 단신의의 안색만 보아도 희망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사여묵은 우선 사람들을 대비시킨 후,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즉시 보고하지 않고 사람을 파견해 계속 조사하도록 했다.황후를 포함한 후궁의 빈비들은 모두 궁으로 보내졌다. 황후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들어가서 대황자를 한 눈 본 후 다시 기절해서 숙청제가 그녀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서우는 대황자와 함께 있겠다며 떠나지 않으려고 때를 써서 사여묵이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그날 밤 숙청제는 황가원림에 머물렀고, 태후는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당연히 태후에게로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었다.태후는 오자마자 송석석을 대신해서 대황자를 지켰다.처음엔 태후가 어쩔 수 없이 대황자를 자안궁으로 데리고 갔었는데, 대황자에게 냉담하게 대했던 것도 큰 손자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나쁜 버릇을 고치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그녀의 강한 태도와 절대적인 위엄은 대황자의 마음이 아무리 불쾌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그땐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척했는데, 생각과 행동이 습관이 되자 그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후는 서우를 궁으로 데려와 그와 함께 공부를 하게 해서 우정을 느끼게 했다.서우가 궁에 들어온 후, 그의 변화가 가장 컸다. 태부께서 엄격하신 데다 자안궁으로 돌아가도 압박감을 느끼니, 서우가 들어온 후에 그의 마음속은 점점 평안해졌다. 서우는 훌륭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도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침을 놓은 대황자를 보며 태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태의는 단신의의 분부에 따라 약을 달여왔는데 아주 진하게 달여져 있었다. 그래서 한두 모금만 마실 수 있어도 약간의 효과가 있을 것이지만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라 도저히 삼킬 수가 없
숙청제가 그렇게 묻자, 단신의는 한참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가쁜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외에 공기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고요함 속의 절망은 모든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이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단신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태후는 숙청제보다 더 조급해서 말했다. “어서 말해 보시오.” 단신의는 침울한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위험하기에 3일이나 버텨야 합니다. 3일이 지나면 제가 신약산장으로 데리고 가서 신약산장에서 자란 단속초로 물을 끓여 대황자에게 매일 몸을 담글 것인데 그렇게 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승산이 아주 낮아서 신약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송석석이 물었다. “단속초를 캐오는 건 안됩니까? 대황자의 부상이 이렇게나 심각한데 대체 어찌 옮긴 단 말입니까?” 송석석의 말에 단신의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린 단속초도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이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려면 캔 지 반 시진 안에 물을 넣고 끓여야 하는데…… 아무리 기효라고 해도 대황자의 부상이 너무 심해서 살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도 최소한 1년 동안은 진성으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숙청제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숙청제의 병은 제자들이나 태의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숙청제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로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말했다. “단신의, 승산은 얼마나 있소?”그러자 단신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승산이 얼마 없습니다. 일 성의 승산마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숙청제는 절망스러운 눈물을 흘렸다.그가 눈물을 흘리자 태후도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사여묵과 송석석도 마음이 아팠지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