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제가 오자 덕비는 마치 적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송석석이 계속 깊이 파고들며 조사를 한 탓에 안그래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덕비는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요행을 품었다. 대황자는 이미 죽었고 삼황자는 나이가 어리고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니 천성이 총명하고 지능이 뛰어난 이황자만이 가장 적합한 태자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황자가 아니라면 설마 삼황자인가?’ 만약 정말로 이황자를 선택했다면, 황제는 태자의 생모에게 오점을 남기지 않을 것이기에 덕비는 죄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채릉궁에 오자 덕비의 마음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황제가 직접 올 가능성은 두 가지일 뿐이었다. 하나는 이황자의 상황을 보러 온 것이고, 두 번째는 대황자의 일을 조사해 내 죄를 물으러 온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든 오늘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그녀는 궁인을 이끌고 가서 무릎을 꿇으며 황제를 영접했다. 그러자 황제가 손수건을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 “날씨도 추운데 무릎 상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황제의 말을 들은 덕비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폐하께서는 몸이 괜찮습니까?” “많이 좋아졌다.” 숙청제는 덕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갑자기 범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와봤다. 그는 좀 나아졌는가?” 숙청제가 이황자에 대한 관심을 보이자 덕비는 마음속으로 기뻐했지만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다. “태의가 그러는데 두세 달 몸조리를 해야 완쾌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숙청제는 앉아서 상냥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황자를 불러오거라. 내가 있는 걸 보면 그도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자 덕비는 급히 청이를 불러 이황자를 데려오라고 분부했다. 요 며칠 이황자는 보기에 많이 좋아졌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외에는 모두 정상이었다. 그래서 덕비는 미리 황제에게 알리기로 했다. “황제폐하, 요즘 범이가 말
이황자는 깜짝 놀라했다. 마치 꿈에서 방금 깨어난 듯 숨을 헐떡이며 귀를 막고 소리쳤다.“싫어요. 어마마마, 전 대황형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싫어요.”덕비는 순간 녹초가 된 듯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마름쇠를 꺼내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숙청제는 그녀를 무시하고는, 이황자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네 대황형은 이미 죽었단다.”이황자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덕비의 배에 머리를 박으며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날 속였습니까? 어마마마께서는 대황형이 죽지 않고 다리만 부러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속였습니까? 내가 대황형을 죽인 것입니다.”이황자에게 부딪쳐 덕비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통을 참고 달려들어 이황자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황자는 미친 듯이 달려가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자 오 대반이 그를 잡고 목 뒤를 때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이황자를 데려가 치료하라고 분부했다.이때 대문이 닫혔는데, 오 대반은 숙청제 옆에 서 있었고, 덕비와 청이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덕비는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기껏해야 죽는 것뿐이니 두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숙청제가 그녀의 배를 걷어차며 호통을 쳤다.“이런 독한 년! 너의 심보는 독사보다 더 독한 것 같구나.”덕비는 통증으로 인해 동작이 둔해져 힘겹게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가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전 독사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방법이 없었을 뿐입니다. 범이가 황후의 배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외에 대황자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왜 대황자만 태자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숙청제는 손을 들어 오 대반에게 태자를 세우는 조서를 내려놓으라고 했다.그러자 오 대반이 조서를 펼쳐 덕비 앞에 놓았고, 내용을 본 덕비의 입꼬리가 갑자기 굳어져 버렸다.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뻗어 조서를 들었는데, 조서에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사범’이
숙청제는 덕비를 직접 죽이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녀의 두 다리를 부러뜨리게 하고 한바탕 괴롭힌 후에야 냉궁으로 던졌다.그러고는 직접 이황자를 데리고 냉궁으로 가서 몸을 웅크린 채 계속 울부짖는 덕비를 가리키며 말했다.“네 황형이 낙마한 후, 너의 어마마마보다 훨씬 더 아파했단다.이황자의 얼굴엔 눈물과 후회로 가득했고, 땅에 풀썩 주저앉아 덕비의 비명을 듣지 않게 귀를 막았다.숙청제는 청이를 때린 후 냉궁으로 들여보내 덕비를 돌보게 했다. 그리고 덕비가 죽으면 그녀도 죽을 테니 잘 보살피라고 했다.청이는 덕비를 따라다니며 인심을 모해하고 흉악한 일을 많이 했지만 이런 잔인한 장면은 황가원림에서 딱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었는데 바로 대황자가 낙마했을 때였다.그땐 통쾌하기만 했지만 지금 남은 건 고통뿐이었다.제 황후 또한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내 아들을 해친 게 덕비라니?’그녀 자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송석석과 오 대반이 반쯤 정신이 나간 이황자를 데리고 왔다.이황자를 보는 제 황후의 이황자는 눈빛에 증오와 원망이 가득했다.“네가 정말 우리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냐?”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이황자의 뺨을 갈겼고 이황자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의식이 없는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제 황후가 그런 그를 다시 때리려고 하자, 송석석이 참지 못하고 막았다.“막지 마. 내가 이 천한 자식을 때려죽일 것이다.”제 황후는 험악한 얼굴로 송석석을 향해 소리치며 모든 분노를 두 사람에게 쏟아내려는 듯했다.이때 오 대반이 말했다.“황후마마, 황제폐하께서는 마마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셔 이황자를 장춘궁으로 보내 마마께서 키우도록 명하셨습니다.”황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나보고 원수를 키우라는 말인가?!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내가 키울 리가 없지 않느냐?” “황후마마께서 수빈이 대황자를 모해했다고 생각했을 땐 삼황자를 키우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그 말에 제황후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정이가 정말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장례까지 치렀는데 어떻게…….” 숙청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상처가 매우 심각해. 다리가 부러져 이번 생엔 일어나지 못할 것이야. 단신의가 그를 치료하기 위해 신약산장으로 데리고 갔으니 치료가 성공하면 그는 이름을 숨기고 살 것이고 치료가 실패하면 신약산장 같은 아름다운 곳에 남아있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황후는 황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자 마음속에서 갑자기 희망과 광희가 솟아올랐지만 곧이어 의혹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가 죽지 않았는데 왜 장례를 치른 것입니까? 왜 진성에서 치료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쩌면 사실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고 황제폐하께서 그 신의에게 속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신의는 송석석의 백부이고, 송석석은 줄곧 삼황자를 태자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숙청제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송석석이 삼황자를 태자로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러자 제 황후는 급히 말했다. “공방을 차릴 때 저의 어머니가 저 보고 솔선수범하라고 했는데 제가 허락하지 않아 송석석의 체면을 구겼지만 수빈과 그녀의 어머니는 은자와 가게까지 선물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송석석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숙청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송석석이 그렇게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왜 애초에 공방을 위해 나서지 않았느냐? 그럼 송석석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았느냐?” 제 황후의 얼굴은 금새 창백해졌다. ‘내가 진작에 공방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왜 도와주지 않았겠어? 하지만 그땐 모두들 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내가 어떻게 나서서 욕을 먹고 명성을 잃겠어?’ 황후도 지금은 후회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다는 듯이 황자의 안부를 물었다. “황자는 지금 어떻습니까
황후는 긴장한듯 땀을 뻘뻘 흘리다가, 목덜미를 감을 백릉을 보고 또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황제폐하께서 대황자를 얼마나 아끼는데 대황자가 어머니를 잃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내가 직접 가서 그를 돌봐야 하니 아무도 내가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어. 그리고 송석석이 그랬어, 대황자가 날 사랑한다고 했다고. 그건 대황자가 직접 한 말이다. 그는 지금 중상을 입어 고독하게 신약산장으로 갔는데 어떻게 내가 돌보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 난 그를 돌보러 가야 한다고…….” 하지만 백릉은 이미 목에 휘감아진 뒤였다. 황후는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폐하, 왜 저한테만 이렇게 잔인하신 겁니까? 덕비는 대황자를 모해하고도 처형당하지 않았는데 왜 저만 처형하시려는 것입니까? 제가 성격이 오만할 뿐 사람을 해치진 않았습니다.” 오 대반은 잠깐 멈추었다. 사실 그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중상을 입은 대황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왜 사람을 해치지 않았습니까? 복소의의 태아를 죽인 건 물론이고, 대황자께서 이렇게 된 것도 황후마마께서는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제 황후는 눈을 부릅뜨고 목에 감긴 백릉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그러자 오 대반이 말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마마께서도 마음속으론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겠지요. 덕비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썼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 수빈과 함께 복소의의 태아를 모해하러 갔다가 덕비에게 약점을 잡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마께서 어리석게 계란궁으로 가서 소란을 피웠으니 덕비가 소문을 내기에 딱 좋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희생양을 찾았으니 감히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제 황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언행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잘못을 한 건 덕비이다.” 오 대반이 말했다. “그래서 황제폐하께서는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 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건
덕비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녀는 이황자가 치매로 절에 가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버틸 수 없었다. 고통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계속 그녀를 괴롭힌 탓에, 결국 어느 추운 밤에 견디지 못하고 사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태후는 손을 써서 사건과 연루된 궁인들을 모두 처리했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송석석 등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후궁에 황후를 포함한 두 명의 지위 높은 빈비가 사라졌고, 태후의 건강도 좋지 않아 공비에게 후궁을 관리하도록 했다. 숙청제는 다시 황후를 세울 계획이 없었다. 그는 후궁이 복잡하지 않으면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비가 능력이 부족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생겼는데 후궁의 봉록과 하인들의 월례를 주는 것 때문에 소란을 피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검소하고 양보하는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궁 안의 은냥을 아끼고 월례를 삭감했으며 빈비들의 봄 옷도 한 벌씩만 만들어 지출을 아끼려고 했다 하지만 후궁은 원래도 충분히 검소했고, 예전엔 누가 돈을 쓸 일이 있어도 모두 친정에서 준 돈을 썼는데 지금 또 줄이니 모두 마음이 내키지 않은듯 했다. 숙청제는 후궁에 갈 때마다 이런저런 불평만 들리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비들의 은자까지 많이 삭감되었기에 이 일은 금새 태후에게까지 알려졌다. 태후는 어쩔 수 없이 숙청제를 불러 상의했다. 공비만 지위가 높은 탓에 다른 사람을 발탁해도 그녀를 초월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빈비를 뽑자니 너무 떠들썩해질 것 같기에, 차라리 다시 재능 있고 현명한 사람을 뽑아 황후로 세우면 태자도 돌볼 수 있어서 좋을 것 이었다. 숙청제가 그 말에 어짜피 자신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자 태후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대로 되기 마련이다. 본인을 믿고 단신의를 믿거라.”숙청제는 결국 황후를 다시 선택하는 걸 동의했지만 신약산장에서 소식이 온 후에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송석석은 절사약을 보고 마음속으로 몹시 놀랐다. “황제폐하께서 또 당신을 의심하셨습니까?” 그러자 사여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의심하지 않아. 오히려 더 신뢰하게 되었지. 지금은 많은 상주문이 나와 승상의 손을 거쳐 황제폐하의 앞으로 가거든.” “그럼 왜 대체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더욱 의혹스러웠다. 사여묵은 알약을 놓고 송석석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게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황제가 지금 나에게 준 신뢰와 권한은 방금 많은 일을 겪었고 병세도 안정적이어서 의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준 것이지만 병세가 안정적이지 못한 데다 내 권력이 너무 크고 자식까지 낳게 되면 반드시 날 위험하다고 여길 것이야.”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더 있다가 아기를 가져도 되지 않습니까? 당신이 원래 먹었던 게 5년 동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약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 약을 한 번 더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사여묵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게 바로 5년짜리오. 청작이 그러는데 처음 먹을 땐 5년 동안 아기를 가질 수 없지만 다시 한번 먹으면 다신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더군. 하지만 내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당신이 피임약을 먹어야 하는데 그 약은 몸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조건 임신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하더군.” 송석석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물었다. “그럼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여묵이 계속 말했다. “두 번째는 당신이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소. 의서에서 통계한 바에 따르면 출산하는 여성 중에서 삼분의 일이나 난산을 겪고,아무리 순조롭게 출산을 한다고 해도 다른 합병증이 생겨 평생 고생을 한다고 하더군.”송석석은 그의 말에 감동한듯 그의 손을 꽉 잡고 위로했다. “여자는 항상 고통스러운 법이지요.” 사여묵은 한참 후에야 세 번째 이유를 말했다. “세 번째는 난 아버지가 되는 법을 잘 몰라. 자식이 생기면 앞으로
봄비는 기름만큼이나 귀중해서 4월에 내리는 비도 늦지 않았다.숙청제는 황실 서재 밖의 복도 앞에 서서 비바람에 흔들리는 풍등을 보며 눈앞의 화면이 꿈결 같기도 하며 현실 같기도 했다.사여묵의 그림자는 벌써 빗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음속으로 씁쓸했다. 사여묵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약을 복용할 때,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내가 사여묵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들 부부는 아직 젊어서 첩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를 두 세명을 낳을 수 있을 텐데. 그 약을 먹으면 다신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인데. 설령 양자로 들일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니 어찌 후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형으로서 그는 더없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지만 황제로서 그는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모순적인 생각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혼자 중얼거렸다.“세상에 어찌 완벽한 방법이 있겠는가? 어떻게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고 빗소리에 가려져 그의 뒤에 서 있던 오 대반조차도 듣지 못했다.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음력 12월 8일이 되자 집집마다 팥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청제는 새로운 황후를 들였다.새로 들인 황후의 이름은 진의춘이었는데 그녀의 오라버니가 바로 대리사 소경인 진이였다.진 씨 가문이 귀한 집안은 아니었다. 조상들이 사업을 했었고 진 황후의 할아버지가 독서를 좋아했기에 진 씨 가문에서 그녀를 키워낸 것이어서 뿌리가 깊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진이가 대리사 소경이 되어서야 진 씨 가문이 서서히 번창하기 시작했다.진 씨 가문의 방계가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긴 했지만 숙청제는 조사한 결과 진 씨 가문은 관리와 결탁한 정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가문은 숙청제의 요구에 꼭 부합했다. 진 황후는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는데 집안일에 지장을 받아 줄곧 혼담을 나누지 않았다. 진모는 몸이 좋지 않아 집안일을 책임질 수 없었고 진이의 부인은 몇 년 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