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시몬성 밖에서 삼황자를 만났다. 지금 서경태자인 그는 상국사람들을 매우 증오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면, 녹분성의 일이 매우 골치 아파질 것이다.송석석은 외조부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이미 회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릉관을 지키고 있었다. 경성으로 돌아와 편안히 지낼 수도 있는데 말이다.보통 무장들은 이 나이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마땅했다. 송석석은 황제가 젊은 무장들을 기용하려는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지만, 근래 몇 년간 중책을 맡을 만한 자들은 별로 없었다. 황제는 또 사여묵의 병권을 회수했다. 서경과 사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장군였으니 그가 병권을 쥐고 있으면 사방을 진정시킬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안정된 시기라 왕표에게 병권을 맡겨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겠으나,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왕표로는 부족할 것이다. “일찍 쉬어. 이 사건은 경조부로 넘어갈 것이니, 내일 경조부에서 와서 두루 물을 거야. 그러면 황제께서도 궁으로 부르실지도 몰라.”장군부에 다녀온 후 송석석은 마음이 어딘가 찝찝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전북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다고 말했을 때는 정말 우스꽝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사여묵이 진성에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폭발했을 것이다. 다음 날은 날이 좋았다.막 떠오른 해는 하늘을 비단으로 아름답게 물들였다. 준비를 마친 송석석이 서우가 왜 오지 않는지 물으려는 그때, 보주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심 아가씨께서 서우 도련님을 서원에 보내셨습니다.”“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말이냐?” “네, 심 아가씨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훈련하셨고, 서우 도련님은 어제 배운 것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일찍 가서 훈장님께 물어보겠다고 하셨습니다.”“오? 첫날부터 이렇게 어려운 것을 가르쳤단 말인가?”송석석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는 훈장님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물어보는 것을 깜빡 잊었다. “노
한창 이야기하던 중에 송석석이 물었다. “그 귀걸이, 상태는 어떻습니까?”“어머님께서 이미 사람을 시켜 금경루에 맡긴 상태입니다. 아마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이렇게 소중한 물건은 그냥 두는 게 좋겠습니다. 밖은 위험할 수 있으니깐요.”귀걸이 하나 때문에 그토록 마음 쓰는 그녀의 모습에 그 귀걸이가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그러자 이석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착용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다만 어제는 위국이를 서원으로 보내는 날이라 귀걸이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함께 위국이를 서원에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혼인할 때 평생 해야 할 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기만이라는 걸 알지만, 가끔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정말로 버텨내기 힘들더군요.”송석석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연민 중 반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고, 반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왕비님처럼 강한 분은 저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겠지요.” 아마도 이석은 오랫동안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다. 혹은 그녀의 남편이 송국공의 휘하에 있었고, 송국공의 일곱 용사들이 남강 전장에서 희생되었기에 그녀는 마음속의 고통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큰 뜻도 없었고, 재능이나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둔하고, 일을 할 때도 결단력이 없지요. 하지만 제 남편은 달랐습니다. 어린 나이에 영웅이 되었고 외모도 출중하였으며, 게다가 후작부의 명문가 출신이었지요. 그런 그가 누군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같이 평범한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열일곱에 그와 혼인하였고, 지금 스물다섯입니다. 혼인한 지 팔 년이 되었으나, 그동안 거의 함께하지 못해 아이를 낳지 못하였지요. 다행히 지금은 위국이 있으니, 친자식은 아니지만
시몬성. 왕표는 이미 매우 짜증이 나 있었다. 네 번의 협상 동안, 빅토르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서몬을 내주어야만 치석을 돌려보내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포로들은 이미 교환되었지만, 그마저도 손해였다. 두 나라 포로 인수도 맞지 않았고, 사국의 포로는 송씨 가문의 두 배에 달했다. 포로 숫자가 맞지 않았으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포로를 죽였는지를 알 수 있는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이제는 치석 한 사람의 목숨으로 시몬성을 맞바꾸겠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이다.얼마 전 북명왕이 와서 협상을 지연시키라고 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빅토르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방천허와 제린도 치석이 남강 수복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계속해서 말했지만, 왕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본 송 씨 가군 명단에는 치석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병참 정보에 누락되었다고 하더라도, 치석 한 사람만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치석이 가져온 정보는 단지 전방의 정찰병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협상은 이미 너무 오래 끈 상태라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포로들은 이미 교환되었고, 치석이 충신이라면 자신 한 사람 때문에 조정이 서몬을 내어주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가 사여묵을 보내 협상에 참여하게 했고, 사여묵이 도착한 후 협상을 지연시키라는 명을 내리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왕표는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치석를 희생시키게 된다면, 그 비난의 화살을 자신이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다. 사여묵이 모습을 들어내지 않으니, 여전히 그가 협상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치석를 희생시키거나 서몬성을 버리거나 그 중의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백성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대상은 그가 될 것이고, 사여묵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그
진성. 송석석은 자객이 장군부에 침입한 지 나흘 만에 궁으로 소환되었다. 경조부에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경위와 순방영에서도 오지 않았다. 송석석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군부의 정보를 토대로 경조부와 순방영이 조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은 상태에서 황제께 보고드린다. 그제서야 황제께서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을 것이라 예상했다. 한편, 송석석이 궁에 들어갈 즈음, 전북망은 며칠간의 부상 치료 끝에 침상에서 겨우 일어나 이방에게로 갔다.그는 며칠 동안 감정을 억누르느라 고통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였으나, 검에 맞은 터라 침상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이 병으로 몸져누우면 그 가치는 완전히 사라지고, 경위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이방도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상처는 가벼워서 진작 일어날 수 있었으나, 그녀는 침대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이가 그녀를 원수로 보고 있었고 하인들조차도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루 세 끼에 약은 끊기지 않았으나, 황제께서 내린 혼례였기에 이방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는 전북망이 마음을 완전히 닫았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정 또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여 전북망이 분노에 가득 차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이방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북망은 그녀를 침대에서 거칠게 끌어 올리고 분노와 울분이 가득한 얼굴로 고함쳤다. “어떻게 나를 밀어서 칼을 피할 생각을 한 것이오?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신이 내린 결정이 나를 희생시키는 것이오? 이것이 당신이 계획한 우리 미래요?”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객의 목표는 당신이 아니기에 밀어냈던 것입니다. 제가 정말로 저를 대신해 죽으라고 밀쳤겠습니까? 그날 밤 자객은 저를 노리고 왔고 당신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북망
전북망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빈정거렸다.“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우리의 미래만을 생각한다고 내게 가식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믿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개를 믿을지 언정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소.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속였소. 녹분성 사건도 내가 몇 번이나 물어보았건만 당신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나에게 숨기더니 이젠 나를 부추겨 송석석을 의심하게 하다니?”그는 이방에게 몸을 숙이며 다가가 냉담하게 말했다.“내가 당신을 믿을 것 같았소? 혹시 그날 밤의 추태를 기억하오? 당신은 혼자 살자고 곧장 문희거로 달려가 왕청여와 두 시녀를 문밖에 막고 그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지. 아니,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소. 그건 추태가 아니라 당신의 이기심과 냉혹함이었소. 당신이 왕청여에게 했던 말을 모두가 믿을 줄 알았소? 틀렸소. 난 한 글자도 믿지 않소. 오월과 유월, 그리고 그 시위들은 원래 죽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었소. 당신이 문희거에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싸웠다면 우리가 자객에게 죽더라도 나는 원한이 없었을 것이오.”그는 천천히 허리를 펴며 계속 말했다.“하지만 당신은 문희거로 도망을 갔고 저택에 누를 끼치는 쪽을 선택했지. 왜? 당신의 목숨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은 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오월과 유월도 여자인데 여자에 대한 당신의 위대한 사랑은 어디로 간 것이오? 큰소리를 칠 땐 언제고 정작 닥치니 아주 매섭게 변하더군. 그게 바로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었소. 이기적이고 뱀처럼 독한 사람.”이방의 얼굴은 순간 경직되었다. 그녀는 이젠 전북망도 속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방은 콧방귀를 뀌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뭐라고 하든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깊게 생각할 것입니다. 송석석이 어떻게 장군부에 위험이 있는지 알고 구하러 온 것인지. 그녀가 무인이라 예전의 원한을 품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의 일가족을 구하러 왔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위험을 무릅쓰고?” 전북망은 경멸하는
전북망은 왕청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잃은 두 시녀가 떠올라 괴로운 말투로 말했다.“오월과 유월의 일은 미안하오. 내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소.”“말 돌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속에서 난 어떤 위치인지 물었습니다.”왕청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집착하여 물었다.전북망은 옆에 있던 나무를 붙잡고 심호흡을 하더니 그제야 화를 가라앉히고 가볍게 말했다.“말을 돌리지 않았소. 다만 그들의 죽음에 대해 유감스럽고 안타까움을 표현했을 뿐이오. 그리고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당연히 본처의 위치에 있지 않겠소?”“그냥 본처의 자리뿐입니까?”왕청여는 눈을 붉히며 끈질기게 캐물었다.“당신은 나에게 흔들린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입니까?”그녀의 말을 들은 전북망은 멍해져서 왕청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의 혼사는 목씨 부인이 중매한 것이고 황제의 뜻이기도 하니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공경하면 된다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청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그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왕청여가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그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본 왕청여는 그의 뜻을 알아채고 참담하게 웃었다.“그러니까 사랑은 조금도 없고 부부의 정 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전북망은 힘겹게 말했다.“난 당신의 부군이니 당신을 존경하고 지켜줄 것이오.”“자객이 오월과 유월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고 할 때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날 구하러 온 게 책임감 때문이었습니까?”왕청여는 한 발짝 물러서더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책임뿐이었습니까?” “난…… 당신은 내 부인이니 당신을 보호하는 건 당연한 도리요.” 전북망은 자신이 송석석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다시금 떠올라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왕청여는 실망이 극에 달한 듯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쳤다. “내가 당신의 집에 시집와서 가문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를 참으며 당신의 그 추하고 악독한 평처까지 참아줬는데 이제 와서 나에게 조금도 애정이 없다고 하시
송석석은 밤에 무기를 가지고 나간 데다 장군부에 자객이 침입할 것을 미리 알고 찾아간 것이니 황제의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현갑군의 부지휘사라고 하지만 그래도 함부로 밤중에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니 자객의 행방을 안다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녀가 곳곳에 정탐꾼을 분포했다고 의심했고 그녀를 의심하는 건 곧 북명황실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송석석은 눈을 들어 직언했다. “황제폐하께서도 송씨 가문이 멸문을 당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우를 찾아온 후부터 저는 그가 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 사저에게 상경한 사람 중 행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에 상경해서 롱주에 묵은 몇 사람이 있었는데 무공도 대단한 데다 객잔에 입주한 후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서우를 해칠까 봐 사람을 붙여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그날 밤 그들은 야행복을 입고 롱주의 2층에서 뛰어내렸는데 황실이 아니라 청작거리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묵 승상과 태부의 저택이 그쪽에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이 중신에게 해를 가할까 봐 쫓아갔는데 그들이 청작거리로 간 것이 아니라 장군부로 향할 줄은 몰랐습니다.” 숙청제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웃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넌 장군부와 원한이 있을 텐데 왜 구하려 나섰느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무고한 생명이기도 하고 장군부와 사람을 죽일 만큼의 원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갑군의 지휘사이기도 하니 못 본 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숙청제는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너의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날 밤 자객의 목표가 이방이었다는 건 알고 있느냐?” 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 “그건 모릅니다. 제가 그들의 손과 발을 부러뜨리자 전 씨 둘째 어르신께서 그들을 묶었고 필명이 경위들을 데리고 달려와 저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숙
전쟁 후로부터 사국의 변성에는 줄곧 중병이 주둔해 왔다. 특히 지금은 상국과 협상해서 인질로 시몬성을 바꾸려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인질을 가둔 감옥에도 중병을 파견해서 지키고 있었다. 사여묵 등인이 변성에 들어간 지 며칠이 지났다. 그들은 드디어 척사가 갇힌 곳을 알아냈는데 변경의 관문을 지키는 위소였는데 금성탕지처럼 견고했다. 그리고 그 높은 벽 안의 감옥 구조도 낱낱이 밝혀졌다. 왕표에겐 5일의 기한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일이 5일 기한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몰랐다. 사여묵은 내일 빅토르가 왕표와 다시 협상할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5일의 기한은 모르지만 사여묵은 왕표가 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협상을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여묵은 내일 빅토르가 아당산으로 협상하러 가는 동안 척사를 구출해 낼 예정이었다. ‘빅토르의 신변에는 고수들이 많아서 아당산으로 갈 때 대부분의 고수들을 데리고 갈 것이야. 전쟁에 오랫동안 시달리다 북명군에게 패배를 당해서 빅토르는 북명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아당산에 가서 협상을 하는데 만약 왕표가 직접 거절한다면 빅토르는 오래 머물지 않고 다음날 밤늦게라도 돌아올 것이야. 하지만 왕표가 협상할 때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하는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빅토르를 잡고 있으면 모레쯤 돌아올 것이야. 그럼 구조 시간은 충분할 텐데.’ 염 선생은 구출 전략을 세웠다. 한 명은 밖에서 호응하고 세 명은 침입해서 사람을 구하는 전략이었다. 밖에 남아 있는 사람은 장대성으로 정하고 시간은 내일 밤 유시로 정했다. 유시로 정한 이유는 그 시간에 수비를 바꾸기 때문이었다.세 사람은 비록 무공이 높지만 금성탕지처럼 높은 벽을 뚫고 지하 감옥까지 들어가 사람을 구출하기에는 난도가 높았다. 하지만 사여묵과 그의 사부님은 밤을 틈타 몇 번이나 침입했었다. 비록 지하감옥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지형에 익숙하고 수비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승산은 있었다. 한편 변성 인근 벨강 옆 통나무집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