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성 안의 역병은 이미 통제되었습니다. 왕부 역시 안에서는 나갈 수만 있고 들어올 수는 없게 막아 두었던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매일 왕야께 안부를 전하러 나갔던 하인들 역시 밖으로 나간 뒤에는 격리되어, 더 이상 왕부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었다.“허락 없이 밖에 나간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니냐?”청하는 유모 품에 안긴 이준우를 바라보았다.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그 모습을 본 청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혔다.“저도 모르겠습니다. 성이 봉쇄된 뒤로 저희는 줄곧 이 뜰 안에만 있었고, 단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장풍은 손을 뻗어 이준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뜨겁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열이 높았다.고열 때문인지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잠든 듯하면서도 잠들지 못했고, 깨어 있는 듯하면서도 의식이 흐릿했다.평소 사람만 보면 방긋방긋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지금 당장 왕야께 알려야겠다.”장풍은 곧바로 왕야를 찾으러 근정전으로 향했다.하지만 다급히 왕야를 뵙겠다고 하자, 내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좌시위 대인, 폐하께서 병을 얻으셔서 고열이 계속되고 계십니다. 왕야께서는 폐하의 침전으로 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급한 일이시라면 제가 대신 가서 전해 드리겠습니다.”“수고를 끼치겠습니다.”그 내관은 궁 안에서 이도현의 심복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혹여 섭정왕의 일을 지체시킬까 염려한 그는 곧장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하지만 도착했을 때, 이도현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진하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녀는 이도현 곁의 내관이 찾아온 것을 보고 말했다.“폐하께서 병을 얻으셨는데, 궁의 어의들도 속수무책인 상황입니다. 왕야께서 몹시 마음을 태우고 계셨지요. 저도 왕야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병을 고칠 방법을 찾으러 가신 것 같습니다.”“왕야께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아니요. 다만 저희에게 폐하를 잘 보살피라고만 하셨습니
이도현이 어린 황제의 침전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듯했다.근정전으로 돌아가던 그는 오늘 왕부에서 아직 아무런 소식도 전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근정전에 도착하면 내관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하려고 생각했던 차에, 윤수혁이 급히 찾아왔다.“왕야, 황성에 역병이 번진 근원을 찾아냈습니다.”“어디냐?”“용거 수원지입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도현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장안성은 여덟 갈래 물줄기가 둘러싸고 있어 물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는 물은 일반 백성들과 달랐다.선황이 이곳에 도읍을 세운 뒤, 황형이 재위하던 십 년 동안 황성의 시설을 더욱 정비하면서 황실 전용 수로를 하나 만들었다.산골짜기의 샘물을 끌어와 별도의 수로를 통해 황성으로 공급했는데, 이를 용거라 불렀다.혹시라도 누군가 수로에 손을 쓸까 염려해 용거는 밤낮으로 엄중히 지켜졌다.“가 보자.”이도현은 윤수혁과 함께 용거 수원지로 향했다.하지만 최근 역병 사태로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수비는 눈에 띄게 허술해져 있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마침 교대 시간이라 자리를 지키는 병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물어보니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 역시 모두 병에 걸린 상태라고 했다.윤수혁이 상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저곳에서 대량의 동물 분뇨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수원이 오염된 원인인 듯합니다.”“올라가 보자.”두 사람은 곧장 상류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지 아래로 이어지는 수로 곳곳에 동물 분뇨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이도현은 한눈에 그것이 말똥임을 알아보았다.전장을 누비는 사람으로서 평생 말을 상대해 왔으니 모를 리 없었다.이곳은 용거 수원지였다. 늘 사람이 지키는 곳인 만큼 누군가 말을 방목할 리도 없었다.황실의 어마원 역시 뒷산에 있을 뿐, 이 수로의 유역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었다.그런데도 이곳에 말똥이 나타났다는 건, 누군가 고의로 가져다 놓았다는
그러다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더는 병든 척을 이어 갈 수 없었던 그녀는 곧장 황제를 보러 가겠다며 나섰다.하지만 진하빈과 황 상궁이 필사적으로 그녀를 막아섰다.“태후 마마, 부디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쯤 왕야께서도 폐하 곁에 계실 터입니다. 이때 태후 마마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그동안 병을 가장해 오셨다는 사실을 왕야께서 반드시 알아차리실 것입니다.”“그래도 가야 한다! 어쩌면 내 아들을 해친 것도 그 사람일지 모른다. 스스로 황위를 차지하려는 속셈 아니겠느냐! 내가 분명히 말해 두마. 어림도 없다. 설령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선황께는 아직 황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사람 차례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태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때 진하빈이 태후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청했다.“태후 마마, 소인을 믿어 주신다면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폐하를 곁에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반드시 폐하를 무사히 지켜 내겠습니다!”태후는 진하빈을 바라보았다.진하빈이 어떤 경위로 궁에 들어왔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그래서 태후는 그녀가 자신과 한마음이라고는 믿지 못했다.태후의 의중을 읽은 듯 진하빈이 서둘러 말했다.“태후 마마, 소인은 책사 어르신의 사람입니다. 지난번 궁에 들어오셨을 때 책사 어르신께서 약 한 병을 주시며, 폐하께 위급한 일이 생기면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야 알겠습니다. 분명 폐하께 이런 액운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약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그 말에 태후의 눈이 커졌다.“정말이더냐?”“태후 마마께서 소인을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헌데 책사 어르신은 믿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말을 마친 진하빈은 늘 지니고 다니던 약병을 공손히 바쳤다.태후는 그 약병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지금 자신이 가 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오히려 진하빈이 가면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좋다. 내가
“그건 황성시가 일을 소홀히 한 탓이지, 아주버님 잘못은 아닙니다.”신수빈이 그렇게 말하자, 윤수혁은 그녀의 미간에 어린 근심을 바라보다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제가 그 사람을 호국사에서 데려와 경성으로 호송하던 중이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한 차례 잠깐 눈을 뜬 적이 있었습니다. 다만 머리를 크게 다친 탓에 오래 의식을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때 한마디를 남겼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무슨 말을 했나요?”신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마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그녀는 면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밖으로 드러난 눈매는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빛나는 듯 생동감 있는 그 눈빛에 윤수혁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글쎄요... ‘산속에 병이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산속에 병사가 있다’는 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충 그런 느낌이었습니다.”신수빈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윤수혁은 그녀의 길고 고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스친 놀라움의 빛은 보는 이의 심장까지 울릴 만큼 선명했다.그는 그 찰나의 모습을 거의 탐하듯 바라보다가 더는 바라볼 수가 없어,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신수빈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이 ‘산속에 병사가 있다’는 뜻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장씨 가문이 그토록 많은 돈을 모을 이유가 없었다.“장씨 가문이 병사를 기르고 있었군요. 사병을 말이에요.”윤수혁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곧바로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만약 사실이라면 즉시 왕야께 알려야 합니다.”신수빈은 눈을 내리깔았다.이도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장한월이 아들을 죽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그것이 자신의 죄를 감추고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사실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끝내 못 본 척하며 장한월을 감싸 주었다. 그만큼 장씨 가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
왕부는 무사했고, 아이도 무사했으며, 그 역시 무사했다.신수빈은 매일 편지를 받아서 볼 때, 비로소 하루 중 가장 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내관에게서 윤수혁이 남쪽에서 약재를 운송하자는 계책을 내놓았고, 이도현이 그 기회를 이용해 소문을 퍼뜨려 장안 인근의 약값을 폭락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밀려왔다.이도현은 현명한 군주감이었고, 윤수혁은 재능 있는 인재였다.이런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나라의 엄청난 복이었다.원래 호국사로 약을 운반하던 장수가 역병에 걸리는 바람에, 이후부터는 윤수혁이 직접 약재 수송을 맡게 되었다.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약재를 호송해 호국사까지 왔다.십여 걸음 거리를 둔 채, 윤수혁은 신수빈에게 성 안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지금은 백성들의 상태가 차츰 나아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매일 사망자가 나오긴 하지만, 며칠 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습니다. 왕야께서 선견지명 있게 대처하신 덕분에 장안 백성들이 큰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역병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그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왕야께서 현명하신 건 사실이지만, 아주버님과 예왕, 그리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 또한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특히 아주버님의 공이 가장 크지요.”“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왕야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윤수혁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듯 말했다.“왕야께서는 정말 결단력이 대단하십니다. 이번에도 그 몇몇 사족들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 집들 대문 앞에는 시체가 매달려 있어 감히 밖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신수빈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남의 비난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해냈다.하지만 그 사족들 역시 혼이 나도 싸긴 했다.역병이 창궐해 사람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감히 그런 일에 끼어들었으니.이도현
장안성 안에서는 곧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조정이 역병이 본격적으로 번지기 전부터 이미 남쪽 지방에서 대량의 약재를 사들여 두었으며, 지금 그 약들이 수로를 따라 장안으로 운송되고 있다는 것이었다.머지않아 장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사약감 역시 일부러 소문을 흘렸다.사약감에는 아직 장안 백성 전체가 사용할 만큼의 약재가 남아 있으며, 앞으로 닷새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그리고 닷새 뒤면 남쪽에서 운송된 약재도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그 소식이 퍼지자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약값은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하지만 처음부터 지나치게 비싸게 팔았던 탓에, 값을 내린 뒤에도 선뜻 사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장한월은 부하에게서 보고를 받았다.그들이 풀어 놓은 약재상들이 연일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약재는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데, 조정의 약이 장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들의 물건은 더더욱 팔리지 않을 것이었다.약재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지금 처분하지 못하면 고스란히 손해로 남게 된다.장한월은 곧장 사람을 보내 책사를 불러들였다.그날 밤, 책사가 장부에 도착했다.“그대는 이 약재로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네. 그래야 산속의 병사들을 먹여 살릴 은자도 마련할 수 있다고 했고. 헌데 이제 조정의 약이 곧 장안에 들어온다면 이 약들은 전부 내가 떠안게 생긴 것 아닌가?”책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저 역시 이도현이 처음부터 남쪽에서 약재를 사들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조정의 약이 들어오기 전에 최대한 싼값에 모두 처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금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수민이 아직 우리 손안에 있으니 다른 돈줄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습니다.”장한월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도현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네. 예전에 군영에 있을 때도 그가 아끼던 장수가 술 때문에 군기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목이 날아갔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