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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작가: 정대천
“누가 어진 인재인지를 밝게 가려낼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합당한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도현은 열 살 남짓한 어린 황제를 바라보며 말할 때 자연스레 몸에 두른 차가운 기운을 거두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했다.

황제는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차가운 얼굴의 이 숙부와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미가 굳이 묻도록 강권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선 일이었다. 물음이 끝나자마자 대답도 막혀 그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후는 이를 보자 황제 곁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어린 황제와 이도현 사이에 바짝 다가앉아 목소리를 한층 더 유순하게 낮추며 유도하듯 말했다.

“어제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무왕이 주왕을 토벌한 고사를 숙부에게 묻고 싶다고. 네 어미와 태부가 들려주는 것은 재미가 없다 하였지 않았느냐? 전쟁터를 직접 겪은 너의 숙부의 이야기가 더 생생하다 했었지.”

황제는 마지못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무왕이 주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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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7화

    신수빈은 내시가 성지를 모두 읽어 내리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눌러 담았다.이도현은 윤서원이 호국사에 온 걸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조서를 내린 게 틀림없었다.“윤 대인, 성지를 받드십시오.”윤서원은 고개를 숙인 채 음침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결국 이도현은 어마원의 목마 일을 그에게 “하사”해 버렸다. 윤서원은 속이 뒤집힐 만큼 분했다.“내관께 아룁니다. 소인은 아직 상중이라 조정의 벼슬을 받기 어렵습니다.”그러자 내시가 곧바로 답했다.“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지난해 장안성 전란으로 죽은 자가 많아 지금 조정은 사람이 부족한 때라 하셨습니다. 많은 관리들 역시 상복을 입은 채 직무를 보고 있으니, 윤 대인께서도 사양하지 마십시오.”“받들겠습니다.”내시는 곧 시선을 신수빈 쪽으로 돌렸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호국부인께서도 짐 정리를 하시고 노신과 함께 입궁하시지요. 폐하를 알현하신 뒤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예, 수고를 끼쳐 드리겠습니다.”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내시를 먼저 쉬게 한 뒤, 은보와 금자를 데리고 짐을 챙기러 갔다.어차피 내일 다시 돌아올 예정이라 많이 챙길 필요는 없었다.그때 은보가 낮게 물었다.“마님, 객방의 그 사람은 어찌할까요?”신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지금은 중상이 심해서 치료가 가장 중요한 때다. 함부로 옮기긴 어려우니 금자는 남고, 넌 나와 함께 돌아간다. 암위들도 절반은 여기 남겨 두고.”“예.”윤서원은 남고 싶다면 남으라지. 어디서 자든 그녀 알 바 아니었다.내일 윤서원이 어마원으로 가면,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됐다.신수빈은 내시를 따라 호국사를 떠났다. 윤서원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음침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는 어젯밤 그 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그녀를 이곳에서 떠나게만 만들면 된다고.호국사 주변에는 이도현의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자신이 굳이 남겠다고 버티고, 신 씨에게 집착하며 가까이하려 드는 모습을 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6화

    “게다가 거기서 묵고 갈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이도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장풍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왕야, 지금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저쪽은 엄연히 정실 부군인데 왕야께서는 지금 명분도 없고 순서도 없으니... 끼어든 외실 같은 처지 아닙니까...”장풍은 이도현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끝내 마지막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정말 장풍의 말을 들은 듯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네 말이 맞다. 본왕은 명분도 없고 순서도 없지.”장풍은 속으로 슬며시 기뻐졌다.역시 왕야는 자기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왕야 같은 명군은 원래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법이었다. 그런데 장풍이 다 기뻐하기도 전에, 그 명군께서 담담히 입을 열었다.“보아하니 네가 요즘 꽤 한가한 모양이구나. 뒷마당 마구간에 말 먹일 사람이 부족하다더라. 가서 한 달쯤 말이나 먹이고 있어라.”장풍은 눈을 크게 떴다.“…예?”‘형은 말을 받고, 나는 말 먹이를 주라고? 같은 어미 배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차이가 이렇게 심한 것일까?’장풍은 급히 해명했다.“왕야, 속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속하는 왕야께서 외실이라 한 적 없습니다! 왕야와 마님께서는 서로 마음이 통하시고, 마님 마음속엔 왕야뿐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야말로 끼어든 사람 아닙니까…”“두 달.”장풍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이도현은 그 멍청한 놈이 물러난 뒤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원래도 짜증났는데, 윤서원이 지금 호국사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게다가 뻔뻔하게 거기서 묵고 갈 생각까지 한다니, 생각할수록 열이 치밀어 올랐다.이제 춘위도 끝났겠다, 슬슬 봄 사냥도 준비해야 했다. 저 눈엣가시 같은 놈부터 빨리 처리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그리고 우선은 당장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신수빈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을 보러 갔다.상처가 워낙 심해 요 며칠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5화

    민유하 모녀가 경성에 들어오기 전, 장녕은 이미 그녀들의 지난 세월을 모두 조사해 이도현에게 보고해 두었다.이도현은 여 귀비의 여동생이라는 그 여인의 삶을 적어 놓은 내용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그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있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왕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없다.”이도현은 손가락 마디로 탁자를 천천히 두드리다가 잠시 뒤 물었다.“장 가와 저 모녀 사이에 접촉은 있었느냐?”“없었습니다. 황성시가 양주에 마침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민 마님은 양주에서 이름난 인물이라 드나드는 권세가와 귀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헌데 장 가는 관중 귀족이고 양주와는 천 리나 떨어져 있어 본래 접점이 없었습니다. 이번 일 역시 장한월이 말한 것처럼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닙니다. 장한월의 장남, 본래 세자였던 자가 색욕을 못 버리고 거금을 들여 미인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민 마님의 딸 초담 아가씨가 장부로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막 들어온 그녀를 장한월이 우연히 보게 되었고, 생김새가 여 귀비 마마의 젊은 시절과 꽤 닮아 그제야 의심하게 된 겁니다.”장녕은 왕야가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왕야, 그럼 민 마님과 초담 아가씨는 어떻게 안배하실 생각이십니까?”이도현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했지. 경성 안에 저택 하나 사 두고, 눈치 빠른 시녀 몇을 붙여라. 사람들이 도착하면 그리로 들여보내면 된다.”장녕은 순간 멈칫했다.이도현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속하가 우둔하여 여쭙습니다만, 민씨 모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여 귀비 마마는 생전에 오랫동안 여동생을 찾았고, 왕야 역시 수년 동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낸 뒤 이렇게 무심히 한쪽에 따로 두는 건 이상했다.장녕은 왕야가 분명 직접 왕부로 데려와 극진히 대할 줄 알았다.“문제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정말 본왕의 친이모일 수도 있고, 모비께서 평생 그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4화

    “역병.”그 검은 옷의 사내는 낮고 쉰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 뒤, 이어 다른 일까지 덧붙였다.“태후 마마 곁의 진하빈 아가씨는 이미 섭정왕의 총애를 잃었습니다. 측비라는 이름을 유지해 봐야 이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도 영민하니 차라리 태후 마마 곁에 남겨 두고 소식을 전달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도현은 호국부인 신 씨를 맞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혼인 전에 지금의 측비 마마부터 손보려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차라리 스스로 신분을 내려놓고 태후 마마 곁에 남는 편이 좋겠습니다.”태후는 방금 전 그의 분석과 계책을 들으며, 이 사람이 범상치 않은 재주를 지녔음을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자연히 그의 안배에 이견이 없었다.“책사께서 준비한 모든 일은 서둘러야 하네! 이도현 그 자는 지금 신 씨에게 마음이 가 있어 언제든 호국사로 갈 수 있네. 게다가 그는 분명 전대 황성시 좌우사를 알아볼 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끝이네!”그러나 검은 옷의 사내는 담담히 말했다.“그럴 일은 없습니다. 요즘 조정 일이 워낙 바빠 그는 시간을 낼 수 없거든요. 게다가 신 씨 역시 그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이도현은 그 아이가 자기 친자라는 걸 믿지 않고 있고요. 곧 그 곁에 또 다른 일이 생길 것이니 당분간은 호국사로 갈 여유가 없을 겁니다.”태후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도했다.“헌데 그대는 어찌 이도현의 일을 이토록 잘 알고 있는 겐가? 애가 몇 번이나 그의 곁에 사람을 심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거늘.”검은 옷의 사내는 태연하게 답했다.“왕부 후원 안에는 이미 저희 쪽 눈이 들어가 있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모든 일을 정리한 뒤, 장한월과 그 사내는 밀도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장한월이 경성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단 하루뿐이었지만, 이도현은 곧바로 소식을 들었다.지금 순방영은 전부 이도현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장 가 사람들의 움직임은 금세 그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3화

    장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독에 중독된 일 역시 이분께서 알려 주신 거고, 네 곁 사람들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게 손까지 써 주셨다.”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을 향해 몸을 숙였다.“의사께서 베푸신 큰 은혜는 훗날 반드시 후하게 갚겠네.”그러나 그 사람은 몸을 비켜 예를 받지 않았다.쉰 듯 거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태후 마마께서는 천금 같은 귀한 몸이십니다. 어찌 백성에게 예를 올리시려 하십니까. 태후 마마와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초민의 복입니다.”태후는 이렇게 분수를 아는 사람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그때 장한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지 태후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따로 상의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 일로 너와 의논하러 찾아온 것이다.”태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사광의 일이 새어 나갔다.”태후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곳엔 중병까지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깊은 산속인데 누가 알아챌 수 있단 말입니까?”장한월 역시 재수가 없다는 듯 얼굴 가득 음울한 기색을 띠었다.“수년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이번엔 내 수하들이 잠시 방심했다. 그 사광 안에 십이 년 전부터 있던 자가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영리하고 일 처리도 재빨라 점점 중용되기 시작했지. 십 년 동안 그자는 이미 작은 우두머리 자리까지 올라갔고, 최근 몇 년간은 위조 은자와 병기 제작에도 관여했다. 병사를 기르는 일까지는 몰랐겠지만, 아마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헌데 지금 그자가 도망쳤다!”태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어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헌데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자를 알아본 겁니까?”“처음엔 정체를 아주 잘 숨기고 있었다. 헌데 어느 날 내가 직접 사광을 시찰하러 갔을 때, 놈의 소매가 바위에 긁혀 팔의 표식이 드러났다. 그제야 이상함을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2화

    장녕은 말문이 막혔다.참으로 악덕스럽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장녕이 물러난 뒤, 이도현은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무릎 위에 앉은 어린 녀석을 놀아 주며 물었다. “본왕이 왜 통천서원 이번 기수 유생들의 성적을 전부 무효로 만들려는지 아느냐?”“아우~”어린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웅얼거렸다.“이 멍청한 녀석은 말해 줘도 모르겠지.”이도현은 피식 웃으며 아이를 놀리듯 말을 이었다.“통천서원은 최가가 세운 서원이다. 조정 최고의 대유학자들을 불러 모아 명성이 가장 높지. 들어가는 유생들 역시 모두 세가 자제들이고, 웬만한 관료 집안 자식들도 연줄 없이는 발도 못 들여놓는다. 통천이라, 그 서원에 들어가는 순간 이미 한 발은 조정에 걸친 셈이지. 청운서원은 앞으로 십 년을 더 애쓴다 한들 통천서원과 맞서긴 어렵다. 한미한 집안 출신 유생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조정에서 세가들에게 배척당할 테지만, 통천서원은 끊임없이 인재를 조정으로 밀어 넣으며 중요한 관직을 죄다 세가 손에 쥐게 만들겠지. 본왕과 선황께서 이십 년을 들여 세운 이 강산이다. 지금이야 본왕이 아직 저들과 상을 뒤엎을 자격이 있다지만, 두 세대만 더 지나면 조정과 사직이 전부 저들에게 잠식될 것이다. 그땐 이씨 황족 자손들조차 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단 말이다.”이도현은 문득 신수빈이 짓궂게 그 연극판을 꾸미던 모습을 떠올렸다.생각만 해도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네 어미는 정말 본왕의 복덩이다. 청운서원이 세가의 과거 독점을 깨뜨린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꾸민 연극판만 해도 본왕 마음에 꼭 들었어. 덕분에 통천서원의 기세도 한 번 눌러 줄 수 있게 됐고, 그 늙은 것들에게도 이제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똑똑히 보여 줄 수 있게 되었지. 머리 있는 조정 관리들이라면 이제 더는 통천서원 뒤나 핥고 다니진 못할 거다.”말을 하던 이도현은 어린 녀석이 자기 발을 붙잡고 입으로 가져가는 걸 보고 손을 뻗어 떼어 냈다.그런데 아이는 그가 자기도 먹으려는 줄 알았는지, 작은 발을 번쩍 들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74화

    측근 내시는 명을 받고 물러났지만, 아직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왕야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평소 옷차림에 아무 관심도 없고, 조복 아니면 늘 단정한 평상복이나 갑옷뿐이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런 걸 따지게 된 걸까 싶었다. 잠시 후, 여러 벌의 옷이 안으로 들여보내졌다.검은빛, 감청, 자줏빛 같은, 대개가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색이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도 눈에 띄는 색은 거의 없었다.이도현은 문득 모후가 살아있을 때 맞춰 준 한 벌의 비단 옷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모후는 장안에서 가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67화

    신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윤수혁은 어린 시절부터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환경에서 자라 아주 작은 호의 하나도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었다.그는 이미 그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수차례 그녀를 도운적도 있었다. 정말 빚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수빈 쪽일 것이다.“아주버님께서는 이미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따지자면 제가 아주버님께 진 빚이 더 크지요.”윤수혁은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한 햇살 같아 달빛의 쓸쓸한 냉기를 가볍게 덮어주는 듯했다.“제수씨와 저 사이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3화

    금자는 주먹을 쥐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불과 몇 번의 동작만에 남자는 땅에 나가떨어졌고 청하는 재빨리 여자를 부축했다. 신수빈은 다가가 두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여인은 신수빈이 분명 어느 대가의 귀한 부인임을 알아차리고 두 아이를 데리고 얼른 무릎을 꿇어 절을 했다. 신수빈은 그녀들을 일으켜 세웠다."어찌하여 그자와 이혼하지 않으시고 이리도 그에게 휘둘리며 고생만 하십니까?"여자는 목이 메어 답하였다. "이혼이 말이 쉽지, 친정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을 터이고 무엇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8화

    그의 손은 왼손 호구 자리에 희미하게 남은 이자국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신수빈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막다가 그녀에게 물린 자국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는 자는 없었고 모두가 저절로 머리를 떨구었다.이제서야 모두는 깨달았다. 소위 고명대신, 삼족정립의 형세는 모두 허상일 뿐, 실로 생사대권을 손에 쥐고 있는 자는 줄곧 이도현 한 사람뿐이었다.검시관이 계속 시신을 살폈고 조정에는 감히 다시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동각대학사, 내각차보라 할지라도, 그가 죽이라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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